좋은 말씀/김기석목사

오늘의 사도신경 12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다'

새벽지기1 2015. 12. 7. 13:29

 

 

몸처럼 서러운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추위와 더위에 시달리고, 배고픔에 허덕이며, 폭력과 고문에 의해 찢기고 상하는 몸, 성적 욕망에 사로잡히고 때로는 성적 착취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몸, 질병으로 무력하게 되고 뒤틀리기도 하는 몸, 해가 갈수록 약해지고 쭈글쭈글해지는 몸. 물론 존재만으로도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몸이 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이미 소멸하는 존재의 덧없음이 숨어 있다. 몸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나고 또 살아간다는 것은 이래저래 힘겨운 일이다.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모태에서부터 죽어 나오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하는 욥의 경우는 극단적인 예라 하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기 한 몸을 주체하지 못한다. 조금만 괴로워도 부모의 관심이 오로지 자기에게 집중되기를 바라는 아이처럼 몸은 응석받이이다. 몸은 단순히 영혼을 담는 그릇이 아니다. 몸 없는 마음은 없다. 설사 있다 해도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몸이 없다면 죄도 없을 것이다. 죄의 유혹은 항상 몸을 매개로 해서 오지 않던가? 그래서인지 몸은 힘이 세다. 마음을 제멋대로 끌고 다닌다. 대개 사람들은 몸을 거추장스러워하면서도 몸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기꺼이 응하려 한다. 성 프란치스꼬는 몸이라는 고집 센 당나귀가 문제라고 했다. 과연 그렇다. 기쁨과 노염, 슬픔과 즐거움의 뿌리인 몸, 이게 문제다. 아니, 문제이면서 복이다. 소멸하는 몸 때문에 우리는 안간힘을 다해 오늘을 산다.

빔 벤더스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천사가 나온다. 인간의 삶을 관찰하고, 그들이 하는 마음속의 말들을 듣고 기록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다. 갈등과 번민에 잠긴 채 가혹한 생의 조건을 견디어 나가는 사람들이 불쌍해 보이지만, 어느 사이에 천사 카이겔은 그런 시간 속의 풍경에 동화되고 만다. 슬퍼하고, 번민하고, 눈물 흘리지만 다음 순간 사소한 일에도 기뻐하는 인간을 동경하는 것이다. 카이겔은 인간이 되기 원한다. 흑백 화면 속에 갇혀 있던 카이겔이 인간이 되는 순간, 천사의 갑옷에 베인 손에서 빨간 피가 흐른다. 마침내 그는 인간이 된 것이다. 그가 지은 묘한 표정이라니.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덧없는 시간 속으로의 진입이고, 시간 속의 존재는 몸을 매개로 해서 살아간다. 시간 속에 갇힌 몸, 그것은 행복의 뿌리이자 불행의 원천이다.

몸 속에는 우주의 신비가 숨어 있다. 31억 개나 되는 인간 유전자 지도를 작정하는 야심찬 게놈 프로젝트가 어느 정도 완성되자 미국의 대통령 클린턴은 "오늘 우리는 신이 인간을 창조한 과정을 연구, 이해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선언했다. 신의 암호를 해독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과연 위대하다. 유전자 지도를 통해 질병과 노화 치료의 길이 열릴 것이라 한다. 하지만 인종적·도덕적·법적인 어려운 문제도 낳게 될 것이다. 심약한 탓인지, 믿음이 없기 때문인지 나는 사람들의 자화자찬을 들으면서 이명증처럼 울려나는 소리를 듣는다.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창11:6) 하나님의 암호를 해독한다는 것, 그것은 축복인가, 재앙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우리가 선택해야 할 몫이다. 이스라엘 백성 앞에 축복의 그리심산과 저주의 에발산이 우뚝 서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어느 산에 오를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은 이제 신앙인들만의 고백이 아니다. 과학자들은 열렬하게 이 신앙을 고백한다. 20세기는 기술복제 시대이다. 모든 것이 일관된 공정 아래 대량 생산되고 대량 소비된다. 예술작품도 비슷한 운명이다. 그래서 예술작품의 유일무이성은 사라지고 있다. 생명도 마찬가지이다. 생명 자체를 만들어 낼 수는 없지만 체세포만 있으면 무엇이든 복제할 수 있다고 과학자들은 믿는다. 몸이 다시 산다는 것은 이제 과학적으로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다. 복제된 나의 분신은 '나'인가, 나의 '이미지'인가? 누군가가 나를 원자 단위로 다 분해한 후에 그것을 정교하게 재결합했다고 할 때―단 일 분 안에 결합이 완료되었다 해도―그 존재는 나인가, 아닌가? 과학의 진보는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가?

많은 사람들이 몸의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게 어떤 몸이냐고 물으면 대답을 망설인다. 성경에 나와 있는대로 '신령한 몸'이라고 대답하는 이들도 있다. 사실 몸의 부활을 소망하는 이들의 사고 속에는 현재의 삶에 대한 미련이 담겨있는 경우가 많다. 욕망에 시달리면서도 그 욕망을 벗어버리려 하지 않는 것이 사람이다. '어서 죽어야지' 하는 노인의 거짓말에 속았다가는 낭패를 보게 마련이다. 팔은 떨리고, 두 다리는 약해지고, 이는 빠져서 씹지 못하고, 눈은 침침해져서 보는 것마저 힘들고, 귀는 먹어 바깥에서 나는 소리를 분별하지 못할 때(전12:3-4), 비애감에 사로잡혀 살아있음을 버겁게 여길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을 고대하는 것은 아니다. '어서 죽어야지' 하는 말은 사실은 건강하던 때에 대한 그리움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개똥밭에 뒹굴어도 이승이 좋다'는 말은 몸 가진 존재들이 느끼는 소멸에 대한 공포를 해학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몸이 다시 산다는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과 관련짓지 않고는 무의미하다. 몸의 부활에 대한 신앙고백은 형이상학적인 혹은 인간학적인 진리에 대한 것이 아니다. 세상을 거슬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다가 죽임을 당한 예수의 몸, 가시 면류관에 찢기고, 못이 박히고, 창에 찔린 그 몸은 영혼이 일시적으로 머무는 처소가 아니다. 바로 그 몸이야말로 부활의 생명이 싹터 나오는 거룩한 터전이다. 예수의 고난과 관계없는 몸의 부활은 없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가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상의 삶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키우는 자궁임을 가리키고 있다. 하늘과 땅이 맞닿은 지평선처럼 예수의 십자가는 시간과 영원이 만나 하나가 되는 곳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가 그것을 위해 생명을 걸었던 일들을 한사코 외면하면서도 예수의 부활에 동참하기를 원한다. 오직 믿는다는 사실 하나만 내세우면서. 예수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마음껏 육체의 요구에 응답하며 살면서도 소멸에 대한 공포를 물리치도록 해주는 부적인가? 아니다. 아니다. 몸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삶 전체를 하나님이 거하실만한 처소로 내드리는 사람이다. 몸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걸어간 그 길의 끝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것이며, 인위적으로 가로막힌 생명을 하나님이 받아 안아 온전케 하심을 믿는 것이며, 죽음의 지배권이 예수에 의해 폐기되었음을 믿으면서, 오늘 예수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이 고백은 따라서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몸 전체로 해야 한다. 삶으로도 번역되지 않은 신앙고백은 무의미하다. 로흐만의 말은 참으로 적확하다. "기독교인은 죽음의 그늘에서 살지만, 죽음을 믿지 않는다. 그는 육의 부활을 믿는다."

내가 살아 있고, 내가 나쁘다는 걸
모두들 압니다. 그렇지만
그 시작이나 끝은 모르지요.
어쨌든,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세사르 바예호,「같은 이야기」중에서-

우리는 신이 아픈 날, 곧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 날 태어났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신의 상처'를 함께 아파하는 것이다. 아파함은 마음의 문제만이 아니다. 신의 상처를 함께 아파하는 이들은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길르앗의 향유는 다름 아닌 사랑이다. 죽음보다도 강한 사랑 말이다. 사랑하지 않고, 함께 아파하지 않고, 몸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희언(戱言)이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전투태세를 갖추는 일이다. 물론 증오의 전투가 아니라, 사랑의 전투이지만. 사랑의 무기는 우리를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는 몸, 절망의 뿌리인 동시에 희망의 원천이기도 한 몸이다. 우리는 몸으로 영원을 바라본다. 생이 괴롭고 힘겨워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 몸을 성전 삼아, 몸에 하늘을 품고.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