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오늘의 사도신경 13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새벽지기1 2015. 12. 7. 14:56


"한번은 쿠마에서 나도 그 巫女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직접 보았
지요. 애들이 '巫女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지요.
'죽고싶어'."

엘리어트의 시「황무지」의 제사(題詞)이다.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죽음에 대한 전망도 없이 사는 그 무녀의 절망감에 지펴 마음이 울가망하였다. 무녀의 점치는 능력을 가상히 여긴 아폴로 신이 한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을 때 그는 손 안에 든 먼지만큼 많은 햇수를 살게 해달라고 했다. 시작과 끝이 분명한 인생 길에서 한 걸음쯤 비껴나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 불안이 잘까? 그때 무녀의 생은 절정이었다. 하지만 한가지 잊은 게 있다. 그만큼의 젊음도 달라는 부탁을 하지 못한 것이다. 세월과 더불어 무녀는 늙었고 점점 쪼그라들어 조롱 속에 갇힌 채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고 말았다. 이제 무녀의 소원은 죽는 것이다. 하지만 죽을 수 없다. 죽음도 삶의 과정임을 알지 못한 죄 때문에 죽음으로부터 절연된 삶의 고통속에 유배되어 있는 것이다. 무녀에게 살아있음은 복이 아니라, 저주이다. 방부 처리된 음식이 썩지 않는 것처럼, 무녀는 스스로 선택한 생의 황무지에서 한 순간도 시간의 권태와 공포를 잊지 못한 채 죽기를 소원할 뿐이다. '황무지', 바로 그것이다.

언젠가 오봉산 오솔길을 함께 걷던 후배와 나눈 대화가 생각난다.
"형은 죽음의 사자가 느닷없이 찾아와 함께 가자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별 수 있나. 함께 가야지."
"그렇게 느긋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을까요? 난 저항할 것 같은데요. '나는 아직 하지 못한 일이 있어. 내게 시간을 줘' 하면서 말이에요."
"글쎄, 난 그다지 완성하고싶은 일이 없어서인가, 별 애착이 안 생기네."
"형 좋아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베르그송의 말을 빌어 말했잖아요. 자기는 거리에 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15분씩만 적선해달라고 하겠다구요."
"그래 그랬지. 하지만 나는 시간을 연장해도 더 잘 살 자신이 없어. 물론 지금이 만족스럽다는 것은 아니지만, 끝을 생각하지 못하고 세월을 허송했다면 느닷없는 죽음은 내 삶에 대한 심판일거야. 유감없어. 책임져야지. 가족들이 염려되기는 하지만 나 없이 사는 게 그들의 몫이라면 그들이 감당할 수 있을 거야."

지금도 이런 입장에서 많이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죽음의 심연에서 삶을 한 방울씩 길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이들을 바라보노라면 나의 관념이 사치인 것 같아 부끄럽다. 하지만 나는 죽음을 마치 뱀을 바라보듯 이물스럽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나의 관념이다. 죽음의 현실 앞에서 나의 태도가 어떻게 바뀔는지 장담할 수 없다. 사람들은 왜 죽음을 두려워할까?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이기 때문에? 끈 떨어진 연처럼 익숙했던 모든 것들로부터 멀어지면서 나의 부재를 실감해야 하기 때문에? 아니면 누구의 말대로 남겨놓고 가야 하는 시신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나의 흔적이 퇴주잔에 쏟아 부어지는 술처럼 무의미하게 사라져 망각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어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비록 고단할망정 사람들은 산 자의 땅에 머물기를 좋아한다. "모든 산 자 중에 참예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전9:4) 사람은 불멸을 꿈꾼다. 물론 때가 되면 돌아가야 함을 모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기들의 흔적을 세상에 남긴다. 불멸을 꿈꾸며. 고호는 그림을 통해 불멸을 획득했다. 베토벤과 모차르트는 음악을 통해 세익스피어와 괴테는 문학을 통해 불멸에 들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인간 세상의 영웅들이다. 범죄와 연루되지 않았음을 밝히기 위해 사람들은 알리바이(부재증명)를 만들지만, 자기 존재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다. 그러나 세속적인 불멸의 표징을 달고 간 이는 몇 되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죽음과 더불어 잊혀진다. 무덤가의 풀이 길어질수록 망각도 깊어간다. 그는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생은 흔적만으로 남는다 하지만 그 흔적조차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흐려지다가 마침내 스러지고 만다는 것, 그것이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세속적인 불멸조차 꿈꿀 수 없는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생은 소멸을 운명인양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렇다면 오늘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시간을 쟁기질하기 위해 땀흘려왔던 나날이, 갈등과 아픔의 심연을 온 몸으로 헤치고 나아간 우리의 삶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인생이란 망각의 허구렁을 향한 돌진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어떤 생명도 무의미하지 않다. 생명이 남기고 간 흔적은, 그것이 크든 작든, 유의미하다.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시간을 무한히 연장하여 산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살든 죽든 하나님의 품을 벗어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위대한 천재들이나 영웅들의 삶만이 불멸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부조리하고 사소하고 헛되어 보이는 일조차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불멸의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것이다. 뻘 밭을 기어가는 지렁이의 흔적처럼 아련한 삶조차도 소중하게 받아들여주는 분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살게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망각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시간 안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에도 영원의 빛이 드리워있다는 것은 오늘을 살게 하는 힘이지만, 오늘을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는 재촉이기도 하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영원의 전망 속에서 살아가는 것인가? 예수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모델이다. 이 말은 구속의 은총을 깎아내리려는 말이 아니다. 예수 믿음이란 예수를 통한 구원을 받아들임인 동시에 예수 닮음에 대한 열망이 아닌가? 예수는 "나를 따르라" 했다. 예수 닮음과 예수 따름이야말로 우리를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한다. 예수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중심은 '하나님 나라'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나라이다. 예수는 사랑을 통해 영원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었다. 사랑은 자기를 벗어나는 것이다. 곧 사랑은 자아의 출구요 영원의 입구이다. "진정한 사랑은 항상 옳다. 비록 틀렸을지라도." 어거스틴의 말을 연상시키는 밀란 쿤데라의 이 말은 얼마나 도전적인가.

어떠한 경우에라도 사랑을 선택할 용기를 갖고 살 수 있을까?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 사랑을 선택한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라도 사랑을 선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미운 놈 미워하고 외면할 놈 외면하는 게 어쩌면 인간적이다. 그러나 신앙은 인간적 자연의 한계를 넘어선다. 그것은 자기를 넘어서려는 결단이다. 폭력으로 얼룩진 세상에서 간디와 마틴 루터 킹의 비폭력운동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신다. 십자가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랑할 수 없음을 넘어 사랑을 선택할 용기를 갖는다는 것, 그것은 시간 속에 영원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은 사랑을 선택할 용기를 가진 이들의 고백이다.

"인류의 근본적인 나눔은 '믿는 자'와 '안 믿는 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족하는 자와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 자 사이에, 다른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자와 그 고통을 나누겠다고 받아들
이는 자 사이에 있다."(피에르,『당신의 사랑은 어디 있습니까?』)

빈민구호 공동체인 '엠마우스'의 창시자인 프랑스의 피에르 신부의 말은 우리에게 크나큰 도전이 되어 다가온다. 교회의 담을 높이 둘러치고 자폐적인 경건의 폐쇄회로를 맴도는 한국교회는 피에르 신부의 말을 거울 삼을 필요가 있다. 교회를 아들에게 혹은 사위에게 물려주면서 그 정당성을 강변하는 이들에게 피에르 신부의 말은 하늘의 독백이 아닐는지…. 사랑은 자아의 출구라 했다. 사랑을 위해 자기 상실의 길, 고통의 길조차 마다하지 않은 이들에게 주어진 약속이 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
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
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
라."(계21:3-4)

사도신경의 열 두 대문을 통과하면서 나는 짐을 벗은 홀가분함을 느끼지만, 고백과 삶의 틈을 좁혀야 한다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십자가는 벗어버려야 할 짐이 아니라, 지고 가야 할 보배가 아니던가? 달새는 온통 달만 생각한다는 데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그리고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며 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