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오늘의 사도신경 11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

새벽지기1 2015. 12. 6. 09:49


아담과 하와가 달콤한 과즙이 흐르는 열매를 따먹은 이후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는 죄의 그림자가 드리워있다.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이다. 인생은 유혹인데 유혹을 견디어낼 힘이 우리에겐 늘 부족하다. 그래서 유혹에 넘어가고, 잠시 후에는 회오(悔悟)에 잠긴다. 하지만 또 다른 유혹이 다가오면 속절없이 넘어가고 만다. 찢길대로 찢긴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 사람이 다 나 같았으면…" 하고 탄식하다가도 말꼬리를 흐리는 까닭은 세상의 어둠이 '나'의 어둠과 무관하지 않음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진리의 길은 한사코 피하면서 허망한 일들에 대해서는 생래의 기호를 가지고 있는 내 실상을 알기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하는 바울의 고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죄인'이라는 단어 속에는 우리의 감정을 거스르는 뭔가가 있다. 하나님 앞에서든 사람 앞에서든 스스로의 죄인됨을 인정한다는 것은 여간한 용기가 아니다. 자기의 실상을 '보는 자'만이 자기가 죄인임을 안다. 하지만 남의 허물을 보기에 익숙한 사람도 자신의 허물은 보지 않으려 한다. 기독교인들은 '죄인' 이라는 단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지만 정작 자신의 죄의 깊이를 깨닫고 아파하는 이는 많지 않다. 죄에 이끌리는 인간의 보편적인 성향은 인정하지만 나'의 죄성만은 한사코 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온 인류는 사랑하지만 가까이 있는 구체적인 이웃은 사랑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부엌에서 상추를 씻던 아내가 '어머' 하는 탄성을 지른다. 무심히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는 내 눈앞에 아내는 접시 하나를 내민다. 접시 위에는 조그마한 달팽이 한 마리가 기어가고 있다. 접시 가장자리에 이르더니 한껏 머리를 내밀어 주변을 살핀다. 마치 '여기가 어디야?' 하듯이. 그 모습이 안쓰럽다. 접시를 들고 마당가 풀밭으로 나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면서 혼잣소리로 말한다.
'여기가 어디야?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누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나를 옮겨 주면 얼마나 좋을까?'

등에 무거운 집을 지고 온몸으로 길을 찾는 달팽이를 보면서 엉뚱하게도 나는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미션"의 로드리고 멘도사를 떠올렸다.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용병으로, 노예 상인으로 살다가 우발적으로 동생을 죽이고 수도원에 칩거한 채 세상과 담을 쌓는다. 그가 수도원의 깊은 담장 속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자기 삶의 실상이었으리라.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그는 부정할 수 없는 과거에 매여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다.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신부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신부는 그를 가리켜 "세상에서 달아나 숨으려는 겁쟁이"라고 하며, 그를 자기 칩거의 동굴에서 이끌어내려 한다.

"그 정도요? 그렇게 비굴하게 살 겁니까?"
"다른 방법이 없어요."
"삶이 있소."
"삶이란 없소."
"용서받을 길이 있소, 멘도사."
"난 용서받을 수 없소."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가지고 당신은 범죄를 택했소. 이제 속죄의 길을 택할 용기는 없는 겁니까?
"내게 충분한 속죄는 없어요."
"그래도 해보시지 않겠소?"
"해보겠느냐고요? 실패하더라도 지켜 보시겠소?"

마침내 로드리고는 속죄의 길을 택할 용기를 낸다. 죄인이란 과녁을 빗나간 존재란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은 존재 말이다. 로드리고의 길 찾기는 처절하다. 그는 노예 상인 시절의 모든 물건들을 그물 속에 담아 밧줄에 매어 온 몸으로 끌면서 끈다. 한자로 '罪'라는 글자가 '그물'을 뜻하는 '망= '과 '아닐' '非'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로드리고의 그물'은 실상 극복되어야 할 자기의 과거요, 죄의 무게이다. 그 짐은 어느 누구도 대신 감당할 수 없는 그만의 짐이다.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며 당도한 과라니 마을에서 목에 칼을 들이대는 부족장 앞에서 눈을 감고 있는 것은 무력함 때문이 아니다. 그는 내맡겨진 존재다. 자포자기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문지방에서 그는 하나의 부름을 기다린다.

로드리고의 변화된 모습을 확인한 원주민 하나가 그의 몸에 묶은 밧줄을 자르고, 그 짐을 폭포 아래로 굴러내렸을 때, 멘도사는 울음 같기도 하고 웃음 같기도 한 기묘한 울음을 터뜨린다. 그 울음은 해방된 자의, 마침내 자기 길을 찾은 자의, 받아들여짐을 체험한 자의 울음이다. 화석처럼 굳어있던 그의 얼굴에 표정이 돌아온 그 순간은 거듭남의 순간이었다. 로드리고가 속죄의 길을 택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이미 받으셨지만, 원주민에 의해 받아들여졌을 때 그는 비로소 해방을 경험했다.

우리는 죄를 용서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 용서는 하나님의 본질이다.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무력하게 할만한 죄는 없다. 죄가 가볍다는 말이 아니다. 모든 죄는 무겁다. 세상에서 저질러진 모든 죄는 하나님께 저지른 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이 말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안에서 나와 관련되어 있다는 고백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웃에게 저지르는 잘못도, 피조물에게 저지르는 잘못도, 자기 자신에게 저지르는 잘못도 다 하나님에게 상처를 입히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우리는 죄의 상황 속에 살고 있다. 죄는 누구도 벗어날 수 없을 만큼 튼튼한 밧줄로 우리를 옭아매 제멋대로 끌고 간다. 우리는 자유가 없다. 죄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지불하는 어떤 대가도 넉넉하지 않다. '충분한 속죄는 없다.'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4) 하고 탄식했는지도 모른다. 죄의 용서는 배상이나 보상으로는 얻을 수 없다. 오직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에 귀의하는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열린 용서의 문은 들어서는 이에게만 열린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고뇌 속으로 들어오시고, 우리의 죄의 짐을 떠맡으시고, 그것을 제거해주신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
이 고백은 과거에 매였던 삶을 해방하여 새로운 미래를 향하도록 한다. 용서함 받은 자의 삶은 미래의 빛 가운데 정초한 삶이다. 미래에 근거한 삶은 부유(浮游)하는 삶이 아니라, 현재를 온전하게 살아내는 힘찬 삶이다.

하지만 고뇌와 아픔, 자각과 자기 응시가 없는 용서는 용서가 아니다. 용서하는 이는 있을지 몰라도 용서받는 자는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죄의 짐을 내려놓기 원해 신을 찾는다. 그리하고는 돌아서서 똑같은 죄를 저지른다. 교회를 자동세탁기에 비유한 어느 시인의 은유는 아프지만 우리의 현실을 꿰뚫고 있다. 더럽혀진 몸과 마음을 던져넣기만 하면 깨끗하게 빨아주는 곳, 교회는 그런 곳인가? 아니다. 그럴 수 없다. 물론 하나님께 용서받기 위해 우리가 지불할 대가는 없다. 하지만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죄로 얽힌 모든 관계를 풀어내기 위한 치열한 노력 없이는 사죄함 받은 자의 행복을 알 수 없다. 형제의 피가 흘러내린 땅, 자매의 눈물이 흘러내린 땅, 그곳으로 돌아가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의 용서는 다가온다. 값없이.

아, 오늘 삶의 길을 열기 위해 자기 죄의 짐을 지고 이구아수 폭포를 거슬러 오르던 로드리고 멘도사는 어디 있는가? 그 울음 같기도 하고 웃음 같기도 한 그 기묘한 울음을 우는 자는 어디 있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얽힌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도 가야 하지만, 죄의 현장으로 돌아가 형제의 용서를 구해야 함을 아는 자는 어디 있는가? 용서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낮추고, 용서하기 위해 마음을 여는 그곳에 하나님도 함께 하신다.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상추에 붙어 내 집을 찾아왔던 그 달팽이는 어디로 갔을까? 길을 제대로 찾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