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오늘의 사도신경8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새벽지기1 2015. 12. 4. 11:15



다시 오실 분은 하늘로 올리우신 바로 그분이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오실 주님을 기다린다. '저리로서 오실 주님.' 여기서 '저리'는 심판자의 직위가 아니다. 이곳에 있는 고백자의 입장에서 먼 곳, 곧 하늘을 가리킨다. 왜 이런 뻔한 소리를 하냐구? 한국의 유명한 어느 소설가가 자신의 잡문 중에 사도신경의 이 대목을 언급하다가 독자들이 '저리'란 말을 모를까 저어하여 친절하게 한자로 토를 달아 설명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저리(楮李)는 갈매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가지고 심판을 주재하게 될 하늘의 심판자라는 것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도 고민이 많이 되었던 모양이다. '저리'라는 말에 '어떤 지위나 신분을 가지고'라는 뜻을 나타내는 부사격 조사 '로서'가 붙어있으니 그의 착각을 나무랄 수도 없다. 물론 '로서'는 어떤 동작이 '그곳으로부터 시작됨'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 소설가가 하나만 알았지 둘은 몰랐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리'라는 단어에 이미 저곳에서 이곳으로의 방향성이 전제되어 있는 것처럼, '저리'라는 단어에는 이곳에서 저곳으로의 방향성이 내포되어 있다. 한마디로 '저리'란 말과 '로서'라는 단어는 부조화한 결합이라는 말이다. '거기에서부터'라고 하면 될 것을 '저리로서'라 했으니 이런 착각이 일어났던 것이다. 지방 장로 연수교육에서 있었던 일이다. 강의를 마치고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했더니 한 분이 진지하게 물었다. "주기도문에 보면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나라이'라는 말에 어떤 심오한 뜻이 있습니까?" "그건 주격 조사 '은·는·이·가'의 오용 사례겠지요." 하고 대답했더니 그렇다면 그걸 왜 안고치냐고 따져 물었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개역 개정판은 이것을 바로 잡았다).

아무튼 우리는 하늘로 올리우신 주님이 다시 오실 분임을 믿는다. 요한계시록은 예수의 실재를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로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그분의 오심은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심판을 행하기 위해서이다. '심판'하면 우리는 일단 천국와 지옥을 생각한다. 그만큼 심판이라는 단어는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많은 이들이 심판 날 하나님 앞에 펼쳐져 있을 생명책에 자기 이름이 없을까 염려한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돋보기를 끼고 곰팡내나는 책을 들여다보며 심술궂은 표정으로 판결을 내리는 무정한 노인일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가 걸어온 삶의 발자취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는 생명책 때문에 전전긍긍 한다. 한 교인이 내게 물었다.

"생명책이 정말 있어요?"
그의 질문 속에는 부끄러운 자기 삶이 낱낱이 드러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담겨있다.

물론 일말의 기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싸이버 시대에 웬 책요? 병원에 가보세요. 머리카락 한 올만 있으면 우리가 과거에 어떤 병을 알았는지 건강상태는 어떠했는지 다 알 수 있대요. 몸은 우리 삶의 기록 보관소라 할 수 있어요. 하물며 우리가 있기 전부터 우리를 알고 계셨던 하나님이 겨우 책을 뒤적이며 내 삶을 판단하실 거라 생각해요? 우리의 존재 자체가 우리 삶에 대한 증거요 증언이지요. 책 걱정 그만 하시고 오늘을 아름답게 살 궁리나 하세요."
"그래도 성경에 생명책이 있다고 했는데요?"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젊은 신학도 시절 나는 친구들과 대화 중에 독신(瀆神)의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까뮈의 '정오의 사상'에 매료되었던 나는 예수의 제자이기보다는 프로메테우스의 후예가 되기를 더 좋아했다. 교회가 정해놓은 사유의 한계에 즐겨 머물면서 신학을 논하는 이들의 유쾌한 지껄임을 "노예의 명랑성"이라고 폄하하면서 나는 스스로 다짐하듯 말했다. "나의 선택이 신의 진노를 사 설사 지옥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나는 기꺼이 일탈의 길을 걷겠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곤 했다. 내가 이렇듯 격정적이었던 것은 교회가 지옥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강조해 교인들을 묶어두려 한다는 혐의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치기어림조차도 넉넉하게 품어주시는 하나님 덕분에 나는 지금 목사로 살고 있다.
심판은 정말 두려운 현실인가? 그렇다. 하나님을 등지고 걸어간 이들에게는.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길 위에 서있는 이들에게는. 반복되는 이야기이지만 오실 주님은 바로 하늘로 올리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하늘로 올리우셨다고 해서 예수의 구원사역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예수의 오심은 구원사역의 계속이다. 예수는 가파른 시선으로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 벌을 주기 위해 오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해 오신다.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열정을 이해하는 사람에게 심판은 자유의 완성이요, 의의 회복이다. 심판에 대한 믿음은 우리 삶을 위축시키는 요인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을 향한 우리의 선택은 현실적인 좌절을 넘어 불멸하는 것이며, 진리를 따르기 위해 선택한 고통은 기쁨의 꽃등으로 환하게 빛날 것임을 확신하게 한다.
오실 예수는 이미 오셨던 예수이며 지금도 우리 곁에 와 계신 예수이다. 예수는 누구와 만나도 그들의 실상을 드러내신다. 베드로와 만나 그의 깊은 속에 있던 반석을 드러냈고, 나다나엘 속에서는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을 드러내셨다. 바리새인들은 그와 만나 자기들 속에 있는 위선의 실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주여, 당신은 나를 내 자신 안으로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자신을 살피기가 싫어서 여태 내가 있던 내 등 뒤에서 나를 떼쳐서 바로 내 얼굴 앞에다 나를 세워놓으셨습니다. 얼마나 추하고 일그러지고, 더럽고 때끼었고, 종기투성이인지 보아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은 바로 우리 모두의 고백이다. 예수 앞에 서면 우리는 추하고 흉한 자신의 실상과 대면하게 된다. 치유가 올바른 진단을 전제로 하는 것처럼, 구원에 대한 목마름은 자기의 실상에 대한 적나라한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주님의 현존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심판자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실상의 드러냄으로서의 심판은 파멸에의 선고가 아니라, 구원에의 초대이다. 우리는 거듭거듭 이 초대 앞에서 살고 있다. 물론 그분이 내리실 최종적인 선고가 남아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주님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은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삶을 의미있게 살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안타까운 것은 '심판' 하면 사람들이 대개 지옥불을 연상한다는 사실이다. 죄와 허물 속에 살아가는 자기 삶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그렇게 가르쳐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옥불을 강조하는 것은 교육적인 목적에서, 선한 삶을 권장하고, 믿음의 길을 걷도록 하기 위한 뜻도 있지만, 미지의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근원적인 두려움을 이용해 그들을 지배하려는 나쁜 의도도 없지 않다. 사람들은 기쁨이나 소망보다는 두려움과 공포에 더 즉각적으로 반응하니까. "좋은 소식은 그것이 나쁜 소식으로 왜곡된 후에야 비로소 대중 시장에서 팔린다"는 노드롭 프라이의 말은 인간의 우매함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사람은 자기 내부의 리듬에 따라 살아갈 때 아름답다. 그런데 사람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자신의 삶을 유배시키고 산다. 심지어 사랑조차 의무가 된다. 예배와 기도 그리고 봉사가 오직 심판을 피하기 위한 몸부림이라면, 그것은 변형된 두려움일 뿐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 말에 무슨 말을 덧보탤 수 있으랴. 덧보탠다면 이미 사랑이 아니다. 사랑의 의상을 입은 미움일 뿐이다. "배고픈 사람을 먹이고,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잔 대접하고, 나그네를 환대하고, 헐벗은 사람을 입히고, 병든 사람을 위로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찾아보는" 일이 의무감에서라면,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면 인생은 고달프기 한량없는 유배생활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고백한다. 고대하는 마음으로 고백한다. "거기에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주님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