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오늘의 사도신경5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새벽지기1 2015. 12. 3. 12:38


본디오 빌라도, 왠지 이 이름에서는 비극의 냄새가 난다. 이미 죽었으면서도 망각의 강 저편에 이를 수 없는 사람, 아무도 대신 져줄 수 없는 자기만의 십자가를 지고 지상을 배회하는 사람이다. 그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내주었던 예수는 이미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유와 생명의 새 몸을 입었지만, 이 불행한 사람은 지금도 사도신경 속에 고정된 채 사람들의 호명을 기다린다. 누가 부르든 달려나가 조롱을 당하기 위하여.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 준 죄로 카우카소스 암벽에 쇠사슬로 묶인 채 밤마다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당했던 프로메테우스, 그는 인류의 기억 속에 위대한 영웅으로 각인 되어 있다. 하지만 강성한 로마의 총독으로 식민지(植民地) 백성들을 제멋대로 먹어치우던(食民) 빌라도, 그는 예수사건과 연루됨으로 역사상 가장 불행한 인물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제 그를 치려고 들었던 돌을 잠시 거두자. 사도신경에 고정된 빌라도는 2천년 전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배했던 그 사람만이 아니다. 빌라도는 우리 속에도 있다. 진리보다 정치적 안정과 세속적인 출세에 연연하는 사람들의 몸을 빌어 빌라도는 거듭 태어난다.

"네가 왕이냐?"
"네가 말한 대로 나는 왕이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는다."
"진리가 무엇이냐?"(요18:37-38)

'빌라도', 위대한 진리행위를 눈앞에 보고 있으면서도, '진리란 무엇이냐'고 묻기만 할 뿐 그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이 뒷걸음질쳐버리는 사람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세상의 모든 명사들은 동사를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 '진리'라는 명사도 마찬가지이다. '진리'는 진리행위라는 동사를 통해 그 실체를 드러낸다. 바울 사도는 이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의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살전1:3). 행위로 표현되지 않는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수고를 거부하는 사랑은 아직 사랑이 아니다. 조급증에 시달리며 안절부절못하는 소망은 참 소망일 수 없다. 신앙생활은 고백과 실천의 일치를 지향한다. 고백 없는 실천은 건조하고, 혹은 실천 없는 고백은 공허하다. 웨슬리가 말하는 성화는 고백과 삶 사이의 틈을 메우기 위한 의도적인 노력이다.

'진리란 무엇이냐?' 이때 빌라도가 묻는 '진리'는 명사 속에 고착된 진리이다. 진리행위에 대한 의지가 배제된 물음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로마의 평화라는 허구의 가면을 벗겨내는 진리행위로, '거룩'의 의상을 입고 민중들의 곡절 많은 삶을 함부로 '죄'로 재단하던 바리새적 위선의 가면을 벗겨내는 진리행위로 자기 앞에 서있건만 빌라도는 진리를 보지 못한다.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을 태워 세상살이의 골 골마다 배어있는 어둠을 몰아내고, 뜨거운 가슴으로 세상의 냉기를 품어 녹이려는 사랑이 없는 한 우리는 여전히 빌라도처럼 진리 앞에서 진리를 묻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너무도 생생한 진리행위를 보고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이들은 진리의 적이 된다. 빌라도의 무지, 눈멀음은 진리를 십자가에 못박고야 말지 않았던가. 맑은 물에 손을 닦고, 본의가 아니었다고, 어쩔 수 없었다고 핑계를 대봐야 무슨 소용인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처럼 사도신경 속에 못 박혀 있다. 영원한 반면(反面)교사로.

예수는 죽었다. 아니, 죽임을 당했다. 그의 생명은 인위적으로 가로막혔고, 쪼개어졌고, 죽음의 너울 속에 감금되었다. 예수의 죽음은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생과 사는 본래 '빈 것'이라고 말하던 이의 죽음과 같지 않고, 죽음의 자리에서 닭 한 마리 빚진 것을 떠올렸던 어느 철학자의 죽음과도 같지 않다. 예수는 살고 싶었다. 그것도 간절히.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고 말하는 사람은 악마의 벗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렇다고 하여 죽음이 목표인 인생은 없다. 예수도 마찬가지이다. 십자가는 예수의 삶의 목표가 아니라 결과였다. 그의 삶을 향해 세상은 죽음을 선고했다. 그에게 죄가 있다면 인간을 사랑한 죄. 땅에 살면서 하늘을 살려 한 죄뿐이다.

폭력과 광기가 사랑과 초월에의 꿈을 못박는 야수의 시간,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아주 무력하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보라'는 조롱 어린 야유를 받으면서도 예수는 침묵한다. 그 고독한 시간 예수의 전 존재는 하나님을 우러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땅의 중력을 거부하면서 예수는 더 큰 생명의 부력으로 떠올랐다. 이윽고 예수의 입에서 나온 기도,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예수는 초월의 빛 속에서 야수의 시간을 타넘는다.

우리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은 그가 이 세상과는 완전히 낯선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무력해 보이나 강하다. 무력한 예수, 완전히 벌거벗기운 채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로마의 평화라는 허구의 신화를 여축없이 드러낸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추위가 봄꽃을 한결 아름답게 피운다"(寒凝大地發春華-노신)지 않던가. 폭력과 광기로 얼어붙은 세상 위에 피어난 한 송이 꽃, 예수.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가 되고, 칼이 되고, 총알이 되는 곳 어디에서나 예수는 향기로운 피꽃을 피우기 위해 다시 십자가에 오른다.

예수의 십자가는 현재진행형이다. 과거완료형이 아니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교회는 십자가를 명사 속에 감금하고 있지 않는가? 동사로 전위되어 우리 삶의 평화를 깨지 못하도록. 신자유주의의 파도가 세상 도처에 있는 기층민들을 덮치고, 새 천년의 열림을 경축하는 샴페인 거품이 썩은 세상의 악취를 교묘히 은폐하고, 교회의 찬양소리가 피조세계의 신음 소리를 삼킬 때, 금관을 씌워 예수의 입을 막을 때, 예수는 또 다시 십자가에 올라 피를 흘린다. 이승우의 소설「연금술사의 춤」에 나오는 공본영의 '소리'는 무시해도 좋을 광인의 외침일 뿐인가?

"너희들, 십자가를 끌어내려 목에다 걺으로써 탐욕스런 육체를 장식하듯 음란하고 부패한 영혼에다 종교를 장식하는 너희들. 예배행위를 무슨 친교 모임이나 고상한 취미 정도로밖에 생각지 않는 너희들, 신(神)이, 너희의 썩어문드러진 영혼의 무덤을 은폐하기 위한 회(灰) 외엔 아무 것도 아닌, 너희들의 타락을 더 어떻게 참으랴. 그래, 십자가가 너무 크고 무거워서 부담스럽더냐. 너무 큰 십자가가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죄의 무게와 그 고통이 도저히 못 참을 정도더냐. 그래서 십자가를 장식품으로 만들었느냐. 그래서 호색적인 너희 정부들의 모가지에다 걸어서 달랑달랑 흔들고 다니게 하였느냐. 오호! 그렇게 해서 고통이 사라지더냐. '있는' 죄가 그런다고 없어지더냐! '살아 있는' 신이 그렇게 해서 죽어주더냐……."

울울한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눈을 들었는데, 몇 해 전 태백에서 온 '바보 예수'가 말끄러미 쳐다본다.

테라 코타로 빚어진 예수, 그는 두 팔을 벌려 온 세상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 두 눈은 퀭하니 뚫려있고, 힘에 겨운 듯 입은 벌어져 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곤 한다. 공허한 그 눈이 내 속을 꿰뚫어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를 볼 때마다 나는 김현승의 시를 듣는다. '나는 내가 항상 무겁다,/나같이 무거운 무게도 내게는 없을 것이다.//나는 내가 무거워/나를 등에 지고 다닌다,/나는 나의 짐이다.'([鉛] 중에서) '나는 나의 짐이다'를 '너는 나의 짐이다'로 고쳐 외워본다. 나를 지고, 온 세상의 죄의 짐을 지고 헐떡이는 예수 앞에서 나는 말문이 막힌다. 오늘 예수의 십자가는 당신을 따라 캄캄한 어둠을 가로지르라는 부름으로,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열정으로 길 없는 곳에 길을 만들라는 요청으로 우리 가운데 우뚝 서있다. 죽음을 타넘기 위해서는 죽음을 통과할 수밖에 없음을 가리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