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오늘의 사도신경7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새벽지기1 2015. 12. 4. 11:02

 


1970년대의 젊은이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코드는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 포크송, 장발이었다. 젊음을 주체할 수 없는 세대에게 그 시대는 너무나 암담했다. 불온하지 않은 젊음은 젊음일 수 없다는 김수영의 말을 되뇌이며 우리는 자유를 꿈꿨다. 기존의 것에는 가차없이 물음표를 붙였다. 이것이 그 암담한 시대를 견디기 위한 젊은이들의 절규였다. 아, 한가지 더. 그때 우리는 리챠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 열광했다. 선창가와 어선 주위를 돌면서 먹이를 먼저 차지하려고 빽빽 소리지르고 싸우고, 고기와 빵조각 위에 다이빙을 하는 갈매기 무리를 떠나서 높고 빨리 나는 것을 연습했던 아웃사이더 조나단 리빙스턴에게서 우리는 고독한 자유인의 초상을 보았던 것이다. 감상적 낭만주의라고 매도를 당해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진지했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아니 나는 이 책에서 노갈매기 '치앙'의 존재를 주목하지 않았다. 질풍노도 시기의 치기 어린 눈에 그는 너무나 이상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높고 빨리 날기를 훈련하던 조나단은 어느 날 은빛 날개를 가진 갈매기 치앙을 만난다. 그 노갈매기는 조나단의 염원을 알아채고 그에게 비행술의 비결을 가르쳐준다.
"생각처럼 빨리 나는 것, 거기가 어디든지 간에 말야. 너는 이미 도착했음을 앎으로써 시작하지 않으면 안 돼…"
이미 도착했음을 앎으로써 시작한다는 말은 아직 시간과 공간의 지각에 갇혀 있는 조나단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노갈매기 치앙은 하늘은 시공을 넘어선 초월의 세계임을 가르쳐준다.
"하늘은 장소가 아니고 또 그것은 시간이 아니야. 하늘은 완전하게 되는 거야."
이윽고 치앙은 완전에 이르기 위해 해야 할 일을 가르쳐준다. 먼저 제한된 육체 안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중단하고, 어떤 인위적인 동작도 다 중단할 것. 그리고 그의 진정한 본성이 쓰여지지 않은 수(數)처럼 완벽하게 시공을 동시에 가로질러 어디서나 살아 있음을 알아차릴 것.

 

{갈매기의 꿈}에 열광했던 20대를 지나 40대 중반에 이른 지금 나는 아웃사이더 조나단 리빙스턴의 고독보다는 끝없이 완전을 지향했던 구도자 조나단 리빙스턴의 근기(根氣)에 마음이 끌린다. 그리고 치앙의 가르침, 하늘은 장소가 아니고 시간도 아니고 완전하게 되는 것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무덤에 묻히심이 하강의 이미지라면 하늘에 오르심은 상승의 이미지이다. 예수는 하강과 상승의 통일을 통해 '하늘' 곧 '완전'에 이르셨다. 성서적 의미에서 하늘은 푸른 창공이나, 북두칠성이나 다른 어느 별자리 근처 어디쯤을 지칭하는 개념일 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나 행복을 일컫는 것도 아니다. 성서가 말하는 하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따라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현존 안에 오롯이 머물게 되었음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예수는 비로소 모든 이들의 '주님'이 되셨다.

 

물론 예수는 시간의 한계를 넘어 영원을 호흡하며 사셨다. 하지만 육체를 지닌 존재로서 예수는 시공의 한계에 갇혀 있었다. 그의 존재는 유대 팔레스타인의 경계를 넘기 어려웠다는 말이다. 지금 여기서 갑순이를 만나 정담을 나누면서, 동시에 100리 밖에 있는 갑돌이와 만나 사업을 의논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실존적으로는 과거와 미래를 통섭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삶은 오직 현재의 지평 속에서 영위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늘에 오르심으로, 곧 하나님의 현존 가운데 머묾으로써, 예수는 어느 때 어느 곳에든지 항상 계실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여기서 나의 아픈 속내를 헤아리시면서, 저 멀리 코소보 난민의 상처입은 가슴을 쓸어주실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장난스러운 질문이 떠오른다. 왜 하필이면 오른편인가? 왼편은 안 되는가? 성경은 오른쪽을 좋아한다. 부활하신 주님이 디베랴 바다로 제자들을 찾아가셨을 때 밤새도록 빈 그물질에 지친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그물을 내려보라고 하시며 가리키신 곳도 오른쪽이고, 히브리 시인들이 고통 중에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구할 때 바라는 것도 하나님의 권능의 오른손이다.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 왼쪽은 불길함을 나타낸다(언어가 갖는 원초적 이데올로기). 왼쪽을 뜻하는 영어 'left'는 기본적으로 '약하다, 가치없다, 어설프다'는 뜻을 가지고 있고, 오른쪽을 뜻하는 'right'는 '옳다'는 뜻으로 통용된다. 우리말도 마찬가지다. '오른'은 '옳은'에서 나왔고, '왼'은 '그르다'는 뜻의 고어 '외다'에서 나왔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말은 예수를 '주님' 곧 '하나님의 권능'을 가진 존재로 고백하는 우리에게는 당연한 표현이다. 우리는 아무도 이런 표현에 감히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1998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주제 사라마구는 {수도원의 비망록}에서 바르똘로메우 로렌수 신부의 입을 통해 하나님은 한 손밖에 없으실 거라고 말한다. 놀라셨는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소설의 작중인물 발따자르도 여러분들처럼 깜짝 놀랐다. 그래서 그는 악마가 장난을 치지 못하도록 재빨리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는 신부에게 하나님이 한 손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성경의 어디에 적혀 있는지 밝혀달라고 부탁한다. 물론 성경에는 어디에도 그런 말은 나오지 않는다. 로렌수 신부는 외팔이인 발따자르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경의 그 어디에도 그런 말은 적혀 있지 않아. 다만 하나님은 왼손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고 내가 한 번 생각해 보았던 것뿐일세. 왜냐하면 하나님은 항상 오른손을 쓰시고 오른편에만 앉게 하시니까 말이야. 자네 혹시 성경이나 교회 신부들이 쓴 글에서 하나님의 왼손에 대해 언급하는 글귀를 본 적이 있나?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왼편에는 앉아 있지 않아. 그곳은 텅 비어 있기 때문이지. 그것은 공허한 장소하고 할 수 있다네. 아무것도 아닌 곳이지. 그러니까 하나님은 한손잡이라고 할 수밖에."

 

불경스러워 보이는 로렌수 신부의 말 때문에 상처를 입을 필요는 없다. 이것은 소설이니까. 로렌수 신부는 전쟁터에 나가 한 팔을 잃고 실의에 빠진 발따자르를 자기의 조수로 삼기 위해 이런 말을 했지만, 나는 텅 비어 있는 하나님의 왼편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왼편, 그 공허한 그늘이 왠지 눈물겹지 않은가? 하나님의 왼편은 왜 비어 있을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비워둔 자리가 아닐까? 약하고, 무가치하고, 어설프기 그지없지만, 그분의 뜻을 온몸으로 살아내려고 애씀을 통해 채워가야 할 우리 몫의 자리가 아닐까?
예수는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은 예수가 신적인 위엄 가운데 역사에 대한 전권자로 등극하셨음을 가리킨다. 무덤에까지 내려가셨던 이가 하늘 위엄의 자리에 오르는 이 극적인 반전을 고백의 언어 말고 다른 어떤 언어로 표현할 수 있으랴. 지평선 너머로 가뭇없이 사라지는 길을 아득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늘이 땅으로 스며들고, 땅이 하늘과 하나되어 한 점을 이루는 곳. 땅의 길은 땅에서 끝나지 않는다. 땅의 길은 하늘로 이어진다.


'그분은 항시 하늘을 거닐고 계십니다. 그분이 하늘을 거니시다 빙그레 웃으시면 나도 지상에서 따라 웃습니다. 그분이 구름 속에 숨어 또 빙그레 웃으시면 나도 꽃그늘에 숨어 따라 웃습니다. 지상에 사는 나는 하늘에 계신 그분의 꿈의 일부. 그분이 사색에 잠기어 별밭별 사이로 거니실 때면 나도 풀잎 이슬만 딛으며 시를 생각합니다. 시의 지문이 풀잎 끝에 참담히 빛나고 이슬 안으로 새벽이 빛무늬 깔고 내릴 때면 나는 그 길로 그분을 맞이합니다.
몸은 지상에 있어도 마음은 항시 하늘을 거니는 나는 그분의 꿈의 일부입니다.'
-이성선, {하늘문을 두드리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