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오늘의 사도신경4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심을 믿습니다'

새벽지기1 2015. 12. 3. 10:46



입원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치 화원에 들어서는 것 같았다. 꽃 무더기 사이로 저기, 마침내 소원을 이루었다는 안도감과 감사함으로 고요해진 얼굴이 보였다. 결혼한지 10여 년만에 첫 아이를 본 교우였다. "오셨어요?" 하며 반가워하는 그의 음성은 맑은 종소리 같았다. 아이의 출산은 그에게 복역의 기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하늘의 나팔소리였던 것이다. 결혼 초 아기보다는 일이 더 소중했기에 포기해야 했던 생명들, 그리고 시작된 오랜 불임의 세월. 그를 괴롭힌 것은 불임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불임이 생명을 소홀히 여겼던 자기 죄에 대한 하늘의 형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고도로 발달했다는 의학적인·과학적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그는 하나님께 매달렸다. "한나를 긍휼히 여기심 같이, 사라와 리브가와 라헬의 태를 열어주심 같이 제게도 주님의 은총을 허락하소서." 그리고 마침내 예쁘고 건강한 사내 아이를 출산한 것이다.

 

실증주의자들은 이 경우를 두고 과학적인 설명을 찾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탄식과 눈물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 아기가 하늘의 선물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내가 낳았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셨다' 고백한다.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는 생명 없는 소년의 몸 위에 엎드림으로써 죽은 아이를 소생시킨 엘리사의 모습(왕하4:34)에서, 죽은 인류의 몸 위에 엎드려 그 몸의 지체들에 당신의 지체들을 포개어 놓으시고 하나님의 생명을 죽은 인간에게 결합시키시는 성자의 모습을 보았다. 아론의 지팡이에 감복숭아 꽃이 피고(민17:8), 돌올리브 나무가 참올리브 나무에 접붙여짐으로 열매를 맺는 것같이(롬11:17), 성자는 불모의 세상과 하늘을 결합시키기 위해 마리아의 몸을 통해 오셨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심을 믿습니다".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고백은 생물학적 차원의 진술이 아니라, 우리가 주로,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예수의 근원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는 그 시원을 헤아릴 수 없는 저 어두운 심연, 사람의 접근이 허락되지 않는 저 장엄의 세계인 하늘로 소급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성령 잉태는 하늘의 주도권에 의한 탄생을 증언하고 있다. 인간 아버지가 부정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가 세계 여러 나라의 건국설화와 형태상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난생(卵生)설화이든, 신인 하강(下降)설화이든, 건국시조들에게는 인간 아버지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누군가를 계승한 존재가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운 존재들로 고백되어야 하기에 아버지는 부정될 수밖에 없다. 역사의 새 장을 연 존재들을 성적인 욕망의 소산이라든지, 종족 보존을 위한 욕망의 소산으로 고백할 수는 없었던 까닭이다.

 

마태복음 1장에는 예수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대개 건너뛰는 대목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에서 보듯 "낳고, 낳고"로 이어지는 이 족보의 끝에 마태는 예수의 탄생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1:16) 마태는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고 기록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다고도 하지 않는다. 마태는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틀을 깨고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예수는 여기서 '목적어'가 아니라 '주어'로 바뀌었고, '낳았다'는 능동적 표현은 '태어났다'는 수동적 표현으로 바뀌고 있다. 이것은 예수가 이전의 어떤 존재들과도 구별되는 새로운 존재이고, 그 태어남의 주체는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탄생이야기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는 고백에서 드러나듯이 인간인 '어머니'의 세계를 긍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늘이 땅과 결합하고, 영원이 시간 속에 돌입할 때 여성의 태를 이용한다는 것은, 가부장적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가히 전복적 상상력이라 할만하다. 그렇다면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서 가부장적 사회의 '지배자'인 '남성'이 배제되고 '여성'의 역할이 강조된 이유는 무엇일까? 신화학자인 조셉 캠벨은 이에 대해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수단이란 이 세상의 일상적인 수단들―富나 권력이나 性―이 아니라 겸손과 약함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세상의 지배관계를 역전시키러 오신 분의 무기는 겸손과 연약함이다. 싸우고, 정복하고, 지배하고, 명령하고, 소유하고, 명성을 얻으려는 남성적인 힘들이 부딪쳐 일어난 혼돈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은 여성적인 것을 통해 세상을 정화하려 하신다. 예수는 지배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지배의 포기, 섬김의 선택은 예수의 삶을 하나로 꿰고 있는 날실이다. 구유에서 시작해 십자가에서 끝난 인생, 벌거벗은 채 사람들의 손길에 무기력하게 내맡겨진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렘브란트의 성화 '수태고지'는 마리아가 의자에서 내려와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아 영광의 빛에 둘러싸인 천사의 전언을 듣는 모습을 담고 있다. 마리아는 고개를 숙인 채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있다. 그의 합장한 손은 고딕식 건물을 닮았다. 땅의 중력을 거부하는 듯 한 점의 중심을 향해 상승하고 있는 고딕 건물 말이다. 그 손에서 나는 마리아의 목소리를 듣는다. "보십시오, 나는 주의 여종입니다. 천사님의 말씀대로 나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눅2:38) 나무의 곁순처럼 무성한 인간적 욕망을 밀어내고, 신적 어둠을 향해 몸을 여는 이 순결한 수동성을 통해 인류의 태 속에 마침내 하늘이 잉태되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창문 커텐은 일렁이는 마리아의 마음을 절묘하게 드러내고 있지만, 마리아의 앉음새는 흔들림이 없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구세사에서 그릇 역할만 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마그니피캇이라 부르는 "마리아의 찬가"(눅1:46-55)는 하나님의 역사 섭리를 기뻐하면서, 이 흐름에 동참하려는 은총을 입은 자의 역동적인 모습을 장엄하게 보여주고 있다.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는 고백은 예수의 신적 기원을 드러냄과 동시에 인간적인 기원도 암시하고 있다. 예수가 구체적인 살과 피를 가지고 있었던 여인의 몸을 빌어 태어나셨다고 고백함으로써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역사와 근원적으로 연루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늘의 아들인 동시에 대지의 아들이다. 육체를 받아 태어났기에 우리처럼 아파했고, 고민했고, 고난당했다. 그렇기에 인간이라는 멍에를 지고 살아가는 우리의 연약함을 함께 아파할 수 있고, 우리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히4:15). 도마는 예수님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나있는 상흔을 보고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고 고백했지만, 우리는 그분의 탄생의 흔적인 배꼽을 생각하며 안심하는 것이다.

"그대여, 당신이 누구든지간에, 당신의 배꼽을 보여준다며는, 나 그대를 사랑하겠습니다, 더럽게 뒤엉긴 자그만 동그람이 굽이굽이 꼬불쳐진 그대의 서러운 배꼽도 나의 배꼽과 똑같이 부끄러운 죄와 어리석은 욕망이 고불고불 서리서리 끼어있을 테지요, 그대여, 어둠의 태 속에서 영문 모르고 튀어나와 정처없이 죄를 짓고 죽어가는 그대여, 그대여," -김승희, [배꼽을 위한 연가(1)] 중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심을 믿습니다." 실증주의자와 회의주의자가 냉소를 머금고 우리를 바라보고, 오만한 인문주의자가 종교는 계몽 이전의 몽매함 속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해도 우리는 이 고백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죽임의 문화가 검버섯처럼 피어난 불모의 대지 위에 몸을 맞대고 생명을 소생시키려는 하나님의 일이 계속되고 있음을 믿기에. 그런데 나는 지금 칼릴 지브란의 음성을 듣는다.
"잠시, 바람 위로 한순간의 휴식이 오면, 또다른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

 

오늘 하나님의 꿈을 위해 자신의 태를 내놓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의 꿈을 품고 세속적인 즐거움과 안락함의 유혹을 거절하다가,

마침내 죽음에 맞서 생명을 낳고야마는 오늘의 마리아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