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오늘의 사도신경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새벽지기1 2015. 12. 2. 21:3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무엇을 보고 계신가요, 영감님?" 호기심이 생긴 그가 물었다.
노인은 머리를 들고 구슬픈 미소를 지었다. "흘러가고 사라지는 내 인생을, 내 삶이 흘러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다오."
"걱정 마세요, 영감님, 당신의 인생은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알고 있으니 바다를 향해서, 모든 사람의 삶은 바다를 향해서 흘러가고 있다오."
노인이 한숨을 지었다. "그래요, 젊은이, 그렇기 때문에 바닷물이 짜다오. 수많은 사람의 눈물이 모였기 때문에."
그는 다시 흘러가는 물로 고개를 돌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쟁과 神父』중에서-

인생은 정말 눈물의 바다인가?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쉽게 씌어져서 부끄럽다는 시인의 고백처럼, 나는 너무 쉽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오랫동안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교우 한 분이 식사를 마치고는 자조적으로 한마디한다. "나는 빨리 늙어 꼬부라졌으면 좋겠어요." 그는 자기의 삶이 버거운 것이다. 그의 앞에 당도하는 시간은 장미 꽃다발이 아니라, 쓰디쓴 상처를 안고 있다. 그는 현실로부터 탈출하고 싶다. 그런 그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나는 짐짓 쾌활한 목소리를 가장하고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만 살고 싶어요?" 그러자 뜻밖의 대답이 돌아온다.
"아직 모든 것을 포기하기에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아니, 늙으면 생에 대한 욕망이 저절로 스러질 것 같은가 보지요? 고목에 꽃핀다는 말 못 들어봤어요? 욕망은 잘 달래서 내보내거나 다른 욕망으로 승화시켜야지 강제로 추방하려고 하면 실력발휘를 하게 마련이에요."

 

말의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나는 겨우 이 정도밖에는 대꾸할 줄 모르는 목사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그의 삶을 든든하게 지탱해 줄 의지처가 아닌가. 언제든 다가가 기댈 수 있고, 울 수 있고, 상의할 수 있고, 인도함 받을 수 있고, 때로는 준엄한 나무람으로 우리 삶을 제자리로 되돌려주는 존재 말이다. 제 아무리 강한 척하는 사람도 '주' 없이는 살지 못한다. 우상 없이 기다리지 못하는 게 사람 아니던가?(출32장) 사람들은 자기 삶의 무의미성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주들(lords)을 만들어 섬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부자유함을, 취해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이데올로기·돈·명예·권력·출세·쾌락의 얼굴을 한 유사-주들(pseudo-lords)에 취해 사람들은 흥청거린다. 그래서 그들은 정말 행복한가? 오히려 허망하지 않은가? 남가일몽(南柯一夢)처럼, 숙취의 불쾌함처럼, 배멀미처럼.

 

우리는 누구나 자유를 위하여 태어났다. 그러나 자유는 기성품이 아니다. 돈을 주고 구입할 수도 없고, 우정을 빙자하여 빌릴 수도 없다. 자유는 싸우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누구의 소유물이 되기에는/누구의 더부살이가 되기에는,/혹은 온 세상 어느 왕국의/쓸만한 종이나 기계가 되기에는,/나는 너무나 고귀하게 태어났노라."(헨리 데이빗 쏘로우) 그런데도 우리는 고백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자유에 대한 포기인가? 노예적인 굴종인가? 많은 사람들이 자기 비하가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무능이 곧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계기라고 믿으며 짐짓 몸을 낮추는 것이 믿음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예수는 세상의 무기력과 부자유와 불의와 싸우는 전사(warrior)이시다. 예수는 징징거리는 사람들의 '주'가 아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들은 싸울 준비가 된 자들이다. 남을 제거하기 위한 미움의 싸움 말고 남을 살리려는 사랑의 싸움 말이다. 예수는 자유를 제한하거나, 우리의 의사에 반하여 무엇인가를 하도록 강제하는 폭군이 아니다. 그는 자유를 위한 싸움에, 사랑의 실천에 동참할 자들을 찾는 '사람을 찾는 하나님'(헤셀)이시다.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오직 그분만이 내 삶의 의미이고, 목표이고, 바른 길이라는 고백이며, 그의 싸움과 사랑의 실천에 연대함으로 삶의 무상성을 넘어 영원에 이르겠다는 다짐이다. 그들은 비애에 가득 찬 삶을 살면서도 결코 낙심하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이 있고, 가야 할 길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절대적 충성을 요구하는 문화식민주의·민족주의·과학주의·신자유주의·물질주의에 저항한다. 그들은 삶의 주도권을 예수께 넘겨드리고 산다. 하지만 예수는 정말 오늘의 교회에서 '주'인가? 교회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결정에서,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에서, 교회의 재정 사용에서, 주님은 정작 소외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불필요한 자기과시와 이익추구를 위해 주님을 골방 속에 유폐시키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하는 고백은 권력과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복음을 속화시키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거대한 물음표이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7:21) 이 얼마나 단호한 말씀인가?

 

우리는 예수를 '주'라고, 또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고대인들에게는 낯설지 않다. 고대 세계의 지배자들은 자기들의 권위를 절대화하기 위해서 그런 표현을 사용했다. 유대 전통에서는 이적을 행함으로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사람에게도 이 표현을 사용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출4:22)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나의 맏아들'이란 말은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이스라엘에게 맡겨진 책임과 관련된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호모우시아 혹은 호모이우시아를 놓고 갈등했던 교부시대의 역사가 있지만, 그게 어떻다는 말인가? 하나님과 아들 예수 사이의 동일본질을 주장한 사람들이 싸움에서 이겼다고 해서, 그것이 곧 유보할 수 없는 진리라도 된다는 말인가?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의미를 담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 우리는 예수와 하나님이 내적으로 일체임을 고백하는 것이며, 예수의 삶은 곧 하나님의 뜻의 구현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문제는 '외'아들이라는 표현이다. 이것은 다른 하나님의 아들의 가능성을 향해 내린 정지명령과 같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표현할 때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 다른 아들은 없는가? 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마5:9) 그렇다면 외아들이란 표현은 모순 아닌가? 문자적으로만 보면 그렇다. 그러나 그 말 속에 담겨있는 속뜻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지금 탁자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여인은 나의 유일한 아내이다. 정말이다. 세상에 아내들은 많지만 '나의 아내'는 한 명뿐이다. 펑퍼짐한 중년의 아줌마이지만 그래도 내게는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사랑에 빠진 젊은이들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게 아니라, 자기 연인을 중심으로 돈다는 사실을 금방 이해한다. 돌연 연인은 세상의 중심이 되어 그에게 다가온다. 연인은 세계의 배꼽이고, 하늘과 통하는 우주나무이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와 사랑에 빠지면, 그래서 그분 한 분만을 '주'로 모시고 살기로 작정하면―어쩌면 이것은 결단의 문제가 아니라 사로잡힘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다른 어떤 존재도 그에게는 '중심'의 자리를 요구할 수 없다. 그 때 예수는 우리에게 유일한 존재, 하나님의 '외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통해 하늘을 보고, 영원을 보고, 생명의 무궁함을 보고, 예수라는 하늘의 아들에게 온전히 사로잡혀, 그 안에서 그와 함께 그를 향해 걷기로 작정한 이들, 곧 예수가 꿈꾸었던 세상을 열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려는 전사들의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