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오늘의 사도신경2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새벽지기1 2015. 12. 2. 11:07

 

자연 재해로 인해 수많은 생명들이 속절없이 죽어가고, 사람들의 모듬살이에서 날마다 빚어지는 참혹한 일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스스로의 무기력함을 절감한다. 병에 시달리는 지친(至親)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한숨만 삼킬 때,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서는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아프면 좋으련만!"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그럴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안다. 잘 알기에 그 탄식은 더 비통하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실존의 한계상황 속에서 무기력함을 절감할 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늘은 원망의 표적이 된다. "아이고, 하늘도 무심하시지." 우리는 사람은 어떤지 몰라도 적어도 하늘만큼은 무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늘마저 무심하다면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산단 말인가. 하늘의 무심함은 우리의 존재 근거를 무너뜨린다. 아,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세상은 과연 혼돈과 부조리를 넘어 하나의 방향을 향하여 가고 있는가? 정말 하나님은 전능하신가?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다. 적어도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전능의 개념으로는 그렇다는 말이다. 하나님도 둥근 직각 삼각형은 그릴 수 없다. 또 이미 일어난 일을 무화시킬 수도 없다. 까뮈가 인간의 마지막 가능성이라고 했던 자살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노아 시대의 타락을 보고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지만 끝내 사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시는 하나님이다. 오쟁이 진 남편처럼 거듭거듭 자기 백성으로부터 등돌림을 당하면서도 끝내 사랑을 거두지 못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스스로 한계를 설정한 하나님의 무능이 우리에게는 전능으로 드러난다.

 

사도신경이 고백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무슨 일이든 못할 것이 없는 폭군의 전능이나, 스스로 만든 룰을 가차없이 범하면서 멋대로 행동하는 무규범의 전능이 아니고, 사랑의 전능이다. 어떠한 방해물도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좌절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믿음은 다른 세력들을 비신화화하고 인간의 세계와 정치적 세력을 비숙명화한다."는 로호만의 말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바로의 애굽은, 그리고 홍해는 자유의 새 땅을 향한 이스라엘의, 아니 하나님의 진군을 막을 수 없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무능과 실패의 상징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십자가야말로 인간을 구원의 길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대지약우(大智若愚), 큰 지혜는 어리석어 보인다 하지 않던가?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측량할 수 없다. 사량분별(思量分別)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현실에 대해 사람은 모름을 지켜야 한다(다석 유영모 선생은 사람을 가리켜 '모름지기'라 했다). 그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우리는 펼쳐진 질서만을 볼 수 있을 뿐, 접혀진 질서는 하나님이 보여주셔야 볼 수 있다.
유사(類似) 전능을 추구하는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지혜는 속도감이 없다. 286컴퓨터 같아서 도저히 참아낼 수 없다. 왜 하나님은 리얼타임으로 세상에 개입하시지 않는가?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은 나만의 하나님이 아니다. 엘리후의 말처럼 "하나님은 전능하시나 '아무도' 멸시치 아니하신다"(욥36:5). 세상 모든 일들은 촘촘한 그물코처럼 얽혀있다. 북경에 있는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태평양에 거대한 폭풍을 일으킨다지 않던가? 하나님의 방법과 시간은 예측할 수 없다. 안다고 하는 것이 모르는 것이고,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 내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서두르지 않으신다고 화를 낼 이유가 무엇인가?

 

사랑의 전능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라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이 과학자들의 우주 발생론과 충돌할 하등의 이유도 없다. 창세기 첫 머리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는 우주 발생론의 교과서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현실 밖에 있지 않으며, 모든 것은 다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고백적 증언이다. '한 알의 모래알 속에서 우주를 본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노래는 바로 그런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어디서 나타났는지 청개구리 한 마리가 벽을 타고 오르다가 멀뚱히 나를 바라본다. '참 희한하게 생긴 물건을 다 보겠구나' 하는 투로. 나는 이 청개구리가 왜 존재하는지, 또 어디에서 온 것인지 모른다(nowhere). 다만 이 청개구리가 고독의 시간 속에 찾아와 진귀한 손님으로 '지금 여기에'(now here)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뿐이다. 나는 이 청개구리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 그 정도의 힘은 내게 있다. 하지만 내게 그런 권리가 있는가? 없다. 이 작은 미물조차도―미물이라고? 아, 이 뿌리 깊은 인간 중심주의여!―피조 세계의 일원이다. 하나님의 질서 속에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하늘과 땅의 창조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피조세계의 인간학적 환원을 거부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넘어서지만, 세상을 부둥켜안고 계시다. 하나님은 자기동일성 속에 갇혀 홀로 있기를 바라는 자족적 존재가 아니라,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들과 함께 하시는 관계적 존재이시다. '함께' 한다는 것은 상처입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의 배덕 때문에 괴로움을 겪으시고, 상처 입은 사랑 때문에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끙끙 앓는 하나님
누구보다도 당신이 불쌍합니다.
우리가 암덩어리가 아니어야
당신 몸이 거뜬할 텐데
-최승호, [몸] 중에서-

창조주 하나님은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매우 기뻐하셨다.

하지만 기쁨은 잠깐이고, 긴 고통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 피조 세계의 역사와 연루되고 만 것이다. 특히 그 냄새나는, 사나운, 오만한, 신의를 모르는, 혼돈에 가까운 인간의 역사와 말이다. 전지하신 하나님이 이런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셨나? 그러나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올바른 질문이어야 올바른 대답이 나온다. 소경 된 자를 앞에 두고 그가 소경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를 묻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를 위해 하시려는 일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요한9장 참조). 피조 세계와, 특히 인간과 깊이 연루된 하나님은 지금 어떠신가? 시인은 끙끙 앓고 있다고 한다.
우리를 인해 "끙끙 앓는 하나님"을 우리는 아버지로 고백한다. 어머니라 해도 상관없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아내는 잠든 아이들의 머리맡에서 연필을 깎곤 했다. 아이들의 내일을 위해서. 그 모습은 거룩한 성례를 집행하는 사제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아내는 사랑과 염원을 담아 아이들의 꿈을 깎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아내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반영을 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시느라 깨어있는 하나님! 가부장적인 권위의 냄새는 어디에도 없다. 집을 나갔던 못난 자식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다가 고샅길을 돌아 나오는 아들을 보고 맨발로 달려나가 부둥켜안고 우는 하나님이 곧 예수의 아버지이다. "지존무상하시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인 초월적인 하나님은 동시에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는"(사57:15) 사랑의 아버지인 것이다.

 

"나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유기체적으로 결합된 것임을 상기시키시면서,

사랑의 주도권을 쥐고 구원을 일구어 가시는 하나님,

곧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한 근원적 신뢰의 표현이다.

 

주여, 불초(不肖)한 우리를 용서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