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오늘의 사도신경1 '나는∼믿습니다'

새벽지기1 2015. 12. 2. 10:54

 


지금은 다른 세상으로 영원히 이사를 가버리신 나의 선생님은 냉면을 참 좋아하셨다.

선생님은 간혹 을지로에 있는 단골 냉면집으로 우리를 불러내셨다. 냉면을 먹은 후에 꼭 들르는 곳이 있었다. 종묘(宗廟). 선생님은 종묘 뒤편에 있는 숲을 참 좋아하셨다. 그러나 더 좋아하신 것은 느긋하게 종묘와 창경궁을 거닐면서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어느 날 선생님은 문득 종묘정전 앞에 멈추어 서신 채, 단순하면서도 장엄하게 이어지고 있는 지붕의 선과 열지어 서있는 기둥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그리고 물으셨다.
"너, 조선 왕가에서 종묘가 상징하는 바가 뭔지 알고 있니?"
"왕가의 조상신을 모신 일종의 사당 아닙니까? 왕궁의 오른쪽에 있는 사직단(社稷壇)과 함께 왕가의 상징이지요."
"그래. 그런데 그걸 신학적으로 표현해보란 말이야."
우둔하기만 한 제자는 그때 대답을 못했다. 열주를 향했던 눈길을 거두어 발걸음을 옮기시면서 선생님은 간결하게 말씀하셨다.
"애퍼스탈리시티(apostolicity)".
'사도성이라, 아, 이 종묘야말로 왕가의 정통성을 가시화한 상징물이란 말씀이구나.' 새삼스레 선생님에 대한 외경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보고 듣고 만나고 겪는 모든 일을 신학의 감으로 삼는 저 놀라운 집중력! 그리고 그날 나는 '사도성'이라는 말과 새롭게 만났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존재도 무로부터 스스로 걸어나오지는 않았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힘이, 혹은 필연이 우리(모든 존재)를 이곳에 데려왔다. 우리를 있게 한 그것을 가리켜 뿌리라 해도 좋고, 어머니라 해도 좋고, 근원이라 해도 좋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있게 한 그 근거를 고의로 무시하거나 잊어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무시하거나 잊어버리는 것은 곧 자기가 서있는 발판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딛고 있는 발판, 혹은 우리와 근원을 이어주는 끈을 가리켜 역사, 혹은 전통이라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역사와 전통에서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난다. 한 발을 과거의 어둠속에 딛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전통을 가볍게 무시하고, 뽀송뽀송한 현재만을 누리고 싶어한다. '바야흐로 새로운 밀레니엄이 눈 앞인데, 앞을 내다보기에도 눈이 피곤할 지경인데, 뒤를 돌아보라구! 노, 땡큐.' 이런 시대에 '사도신경'을 돌아보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인가? 아니면 꼭 필요한 일인가? 두고 볼 일이다.

신앙은 일차적으로는 개인의 자각 근거한다. 주체적인 경험이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말이다.

우리가 삶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깊이 자각하고, 그분의 섭리 안에서 호흡하며 사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그러나 종교 체험이 영혼의 미궁이 되는 경우도 종종 본다. 기도 중에 무슨 음성을 들었다거나, 어떤 영상을 보았다고 하는 이들이 미혹에 빠지는 모습을 우리는 많이 보았다. 세속적인 동기에서 그런 경험을 창작한 사기꾼도 물론 있겠지만, 진짜로 듣고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체험에 스스로 도취되어, 그 체험의 무게를 달아보지 않는다. 인격의 변화, 삶의 변화가 따르지 않는 종교체험의 폐해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두 번째 차원인 전통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 신앙이 올바로 토대 위에 정초되기 위해서는 전통의 매개가 필요하다. 전통 자체가 계시나 신앙체험의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적어도 전통은 아리아드네의 명주실 구실은 한다. 크레타의 영웅 테세우스가 다이달로스의 미궁(迷宮)을 빠져나올 때 붙잡고 나왔던 실 말이다. 우리가 근원과의 연결을 잃고 방황하지 않기 위해서는 전통과의 대화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전통과 대화한다 하여 의고주의자(擬古主義者)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통과의 개방적이고 비판적인 대화를 통해 우리가 딛고 서있는 삶의 토대를 확인하고, 또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것이다. "모든 역사는 다 현대사"라는 역사학자 크로체의 말은 바로 그런 뜻일 것이다.

사도신경의 삶의 자리는 초대교회의 예배 의식, 특히 세례식이다.

일종의 입문의례인 세례식 때 참가자들은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길 떠나기로 결단한 표로 자기들의 믿음을 공적으로 고백해야 했고("나는 ∼을 믿습니다. 아멘."), 그 고백의 내용을 교회는 12항목(여기서도 역시 12라는 숫자에 대한 집착을 볼 수 있다)으로 정리했던 것이다. "나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에서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에 이르기까지.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사도신경은 무척 허술해 보인다. 성경, 성례전, 믿음을 통한 구원, 화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고백 혹은 신경은 동 시대의 문제에 답하기 위해 채택된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모든 시대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영원의 신경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사도신경은 오늘의 상황에서 폐기되거나, 대치되어야 할까? 아니다. 그것은 목욕물을 버리려다가 목욕통 속의 아기까지 버리는 격이다. 사도신경은 통시적으로, 공시적으로 신앙의 일치를 위한 중요한 전거이다. 따라서 사도신경은 각 시대의 컨텍스트가 제기하는 다양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늘 새롭게 재해석되어야 한다.

하루종일 색칠공부 책에 그림을 그리는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나비, 꽃, 구름, 강물을 그렸다. 혹시라도 금 밖으로 자신의 색칠이 나갈까 두려워하며. 나비도 꽃도 구름도 강물도 모두 색칠하는 선에 갇혀 있는 것을 보며 엄마는 혼잣소리로 말한다. 엄마만 아니라면 그 선 밖으로 북북 칠하라고, 선 밖으로 꿈틀꿈틀 뭉게뭉게 꽃피어나라고, 위반하라고, 범하라고 부추길텐데. 하지만 엄마는 그러지 못한다. 엄마이기에. 그래서 탄식한다.

나 그토록 제도를 증오했건만
엄마는 제도다.
나를 묶었던 그것으로 너를 묶다니!
내가 그 여자이고 총독부다.
엄마를 죽여라! 랄라.
-김승희, [제도] 중에서

선 밖으로 조금만 뭉게뭉게 꽃피어나면 인생이 즐겁다.

모험의 대가를 치뤄야 하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조금만 벗어날 용기를 갖는다면―물론 벗어나기 위한 벗어남이 아니다. 우리의 자리를 보다 잘 보기 위한 벗어남이다―기독교 신앙은 한결 풍요로은 색채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우리를 편협한 정체성의 감옥에 가두어버리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한 걸음만 앞으로 내딛자.
우리 앞에는 "나는 ∼를 믿습니다"라는 12번의 고백이 있다. 물론 진정한 믿음은 주격도 목적격도 붙일 수 없다. 참으로 믿는다는 것은 하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꿈을 나의 꿈으로 삼아 살아가는 것이다. '길' 되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 '길'을 걷다가 마침내 그 '길'과 하나되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그 궁극의 자리에는 주격과 목적격의 구분이 없다. 믿는 '나'가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 속에 녹아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아직 '길'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길'로 인도하는 12대문을 열고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려는 것이다.

주여, 우리를 도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