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오늘의 사도신경6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새벽지기1 2015. 12. 4. 10:43


 

 

상여가 마을 고샅길을 휘돌아 신작로에 들어섰을 때, 아내의 울음소리는 더욱 애처로웠다.

"어머니! 이렇게 가실 줄 알았더라면 한번이라도 더 안아드릴 걸. 이제 마지막 가시는 길 고향산천이나마 두루 둘러보세요." 결혼해서 5년 동안 모시고 살았던 시어머니의 예기치 못한 떠남 앞에서 아내는 그저 서러웠다. 대견하다는 듯이 말끄러미 자식들을 바라보시다가, 묻는 말에 그저 선선한 웃음으로만 대답하던 어머니는 조용히, 아주 조용히 세상을 떠나셨다. 심지에 남은 마지막 기름 한 방울까지 다 태우고 툭 꺼지는 등잔불처럼. 서러울 것도, 안타까울 것도 없는 깨끗한 떠남이었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야산 비탈에 마련된 유택 앞에서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듯 조용히 속삭였다. "어머니, 사시는 동안 한번도 편히 쉬지 못하셨지요? 이제 이곳에 고단한 육신 눕히고 편히 쉬세요. 아무도 어머니의 고요를 방해하지 못할 거예요. 따뜻하지요, 하나님의 품이? 당신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이 제게는 얼마나 큰복인지 몰라요. 고마워요. '엄마'. 안녕히 가세요."

 

어머니가 누워 계신 무덤은 누가 뭐라 해도 나의 고향이다. 해마다 찾아가야 하는 순례의 성지이다. 그곳에서 나는 늘 새롭게 어머니와 만난다. 실존의 인사를 한다. 여름이면 무덤 가에 지천으로 피어나 바람에 흔들리는 띠풀도, 망초꽃도, 할미꽂도 어머니의 수인사인양 정겹기만 하다. 겨울이면 무덤 가의 잎 진 나무들이 허세를 여의고 살라는 어머니의 당부를 몸짓으로 전해준다. 1월 중순, 어머니의 무덤 가에 앉아 예수의 죽음을 생각해본다. 북새통을 이루며 몰려들던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버림받은 채 설 땅을 잃고 죽임을 당한 예수. 그의 죽음을 애곡하는 것은 갈릴리에서부터 그를 따르던 여인들 뿐이었다. 어디 마음껏 호곡할 수나 있었나? 숨죽인 흐느낌으로 여인들은 예수의 시신을 따라갔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마련해 두었던 무덤, 아무도 묻힌 적이 없던 그 무덤에 예수는 모셔졌다. 예수는 죽어서도 혼자인 것이다.

 

예수의 죽음 이후의 사흘은 인류 역사상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밥을 먹는 자는 밥을 먹고, 길을 걷는 자는 길을 걷고, 웃고 떠드는 자는 여전히 웃고 떠들고, 우는 자는 계속 울고, 잇속을 찾아 눈을 희번득거리는 이들은 여전히 분주하고, 아침이면 해가 뜨고, 저녁이면 해가 졌다. 달을 보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이들은 그리움에 목이 메었다. 예수 없는 세상이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이전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 앞에서, 그를 사랑하던 이들은 얼마나 상심했을까. 그가 십자가에 있을 때 해조차 빛을 잃었다고 복음서 기자들은 기록했는데, 그가 없는 사흘 동안 세상은 별고(?) 없었다. 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이 왜 그리도 모순되게 생각되는 것일까.
이제 묻는다. 인생의 길이 끝나는 곳에 홀연히 나타나 우리를 가두고 마는 무덤은 꿈도 사랑도 미움도 시새움도 흔적 없이 삼켜버리고 마는 무의 심연인가? 비목(碑木)조차 세우지 않은 예수의 무덤은 그가 꿈꾸었던 세상이 한낱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참담한 표징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꿈은 죽지 않는다. 눈 속에 파묻힌 씨앗이 봄이 기다리듯 참 생명은 생명의 봄을 기다린다. 예수의 '무덤'은 '무상한 인생'에 덧붙여진 '덤'이 아니라 새 생명을 잉태한 '자궁'이다. 봉분을 만드는 우리나라의 무덤은 임신한 산모의 배를 닮지 않았던가? 예수의 무덤은 사멸할 수밖에 없는 생명과 불멸의 참 생명 사이의 경계선이며 문지방이다. 그리고 예수가 무덤에 누워있던 '사흘'은 새 생명의 회임(懷妊) 기간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시간이다.

 

장사한지 삼일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을 믿습니다.
사흘 후 벙그러진 꽃망울이 열리듯 무덤은 열렸다. 열린 무덤은 크게 죽는 것이 사는 길임을 가리키고 있다. 사랑 없는 세상에서 단호히 사랑을 선택한다는 것은 일종의 몰락이고 죽음이다. 하지만 몰락이 두려워 사랑을 포기한다면 삶을 누릴 수 없다. 예수는 절벽 같은 세상에서 사랑을 위해 몸을 내던졌고, 거칠게 내동댕이쳐졌지만 바로 그 도약을 통해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났다. 영원한 생명의 문은 죽음을 통해 나있었던 것이다.
"티파사의 아침 폐허 위에 맺히는 이슬. 세상에서 가장 오래 된 것 위에 세상에서 가장 젊고 싱싱한 것. 이것이 바로 나의 신앙이고 또 내 생각으로는 예술과 삶의 원칙이다."(까뮈,『작가수첩Ⅲ』중에서)
죽은 살구나무 지팡이에서 꽃이 피듯, 예수는 무덤이라는 자궁을 통해 가장 젊고 싱싱한 생명으로 태어나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 그는 골고다 언덕 여기저기에 나뒹구는 죽음 위에 맺힌 하늘의 이슬인양 영롱한 생명으로 부활했다.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에서 희망을 본다. 그리고 부활에의 소망을 목청껏 노래한다. '죽어야 산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자아를 여의지 않고는 큰 생명으로 태어날 수 없음을 안다. 하지만 죽음은 싫다. 절제에서 오는 결락의 불편도 싫다. 누릴 것을 다 누리고 편히 살다가 부활에만 참여하고 싶다. 많은 교회들이 사람들의 이런 덧없는 욕망에 방부 처리를 해준다. 그래서 진리를 잃는 대신 교인을 얻는다. 남긴 것 하나 없어 남의 무덤에 묻힐 수밖에 없었던 예수는 죽어서 사는 길을 가리키는데, 교회는 죽지 않고 사는 길을 가리키며 배를 불린다. 배가 불러 포효하기를 잊은 사자처럼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욕망의 술에 취해 해롱거리며 갈짓자 걸음으로 세상을 배회하는 이들을 향해 대갈일성하지 않는다. 이 땅에서 영원을 추구하는 자만이 영원으로 돌아갈 수 있음을 가르치지 않는다. 예수가 묻혔던 무덤에 우리가 곱다시 묻히지 않고는 다시 살아날 수 없음을 큰 소리로,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칼릴 지브란의 '무덤을 파는 사람'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무슨 종교를 믿느냐?"
"나는 하나님을 믿고 그 선지자들을 섬긴다. 나는 미덕을 사랑하고 영원히 살기를 바란다."
나는 용감하게 신앙 고백을 했다.
신기하리만치 영리해 보이는 그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속빈 말은 옛날 사람들한테서 주워들은 소리지 네 체험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너는 너 자신밖에 아무도 안 믿지.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네 자신만 섬기고 있다. 결국, 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향수의 영원함만 믿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시작된 이래 인간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 숭배해 왔다. 거기에 적당한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신'이라는 단어가 그거지만 실은 자신을 의미할 뿐이다."(칼릴 지브란,「무덤을 파는 사람」중에서)

 

'무덤을 파는 사람'은 지금도 자기 자신만 섬기는 사람, 곧 살아 있는 시체를 묻으려고 깊은 구덩이를 파고 있다. 우리 모두 그 구덩이 속에 가만히 누워 하늘을 보자. 뺨을 스치는 바람의 손길도 느껴보고, 높다랗게 떠있는 구름의 전언도 들어보자. 등을 통해 전해오는 부드러운 흙의 속삭임도 들어보자. 그러면 알게 될까? 우리가 얼마나 본질에서 멀어진 삶을 살고 있는지.
죽어야 산다. 죽기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죽어야 한다. 제대로 죽어야 제대로 산다. 참 복이란 죽어야 할 자리에서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등불을 밝혀들고 어둠을 향해 온몸으로 돌진하다가 죽은 이들이 있다.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택한 이들이 있다. 평화의 제단에 온 몸을 바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죽어서 산 자들이다. 살아있는 시체가 아니다. 하지만 제발 비루하고 구차한 기득권 유지를 위해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과 욕망의 신에게 헤픈 웃음을 팔면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지는 말라. 부활신앙을 기롱하지 말라.

 

부장품조차 남기지 않은 예수의 무덤, 텅 비어 향기만 가득한 그곳에서 영원에 이르는 길이 시작된다.

비우고 비우고 또 비워 가벼워진 몸에 하나님은 날개를 달아주셨다. 절대의 세계를 향해 비상하도록.

하지만 우리는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에서 다시 살아나심을 믿습니다."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얼굴을 들지 못한다.
'해마다
내가 죽지 못한 부끄러움에
얼굴을 못드는 부활절 아침'
-이해인,「부활절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