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멜기세덱에 대해 설명한 다음, 저자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에 대해 설명한다. 레위 자손의 제사장직은 율법을 통해 주신 명령을 따른 것이다(11절). “완전한 것”은 완전하고도 영원한 속죄를 의미한다. 레위 자손의 제사장들은 계속하여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들이 드린 속죄 제사가 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전하고도 영원한 속죄를 이루기 위해서는 레위 자손이 드리는 제사와는 다른 제사가 필요했다.
그런 제사가 드려지려면 율법에도 변화가 일어나야 했다(12절). 율법은 완전한 것이 올 때면 그 효력을 다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과 예언”을 완성하신 분이요, 그것 위에 계신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한 것이 왔다면 레위 지파 제사장들이 행했던 제사 제도에도 변화가 일어나야 했다.
예수님은 유다 지파에서 나셨다. 율법에 따르면, 그분은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실 수 없었다. 하지만 그분은 대제사장이 되셨다. 멜기세덱이 율법과 상관 없이 세워진 제사장인 것처럼, 예수님도 율법의 규정과 상관 없이 대제사장으로 세움 받으셨다(13-15절).
“썩지 않는 생명의 능력”(16절)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써, 한시적인 규정인 율법과 대비된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은 시편 110편 4절이 말하는 것처럼 영원하다(17절). 영원한 것이 왔으므로 “전에 있던 계명은 무력하고 무익하게”(18절)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더 좋은 소망”의 원인이 되셨다. “더 좋은 소망”은 그분의 보혈의 은혜로써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가리킨다. 그 소망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다(19절).
묵상: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로마인이 남긴 기록을 보면, 성전에서 나오는 짐승의 피냄새와 번제로 인해 발생한 연기 냄새가 도시 전체에 진동했다고 합니다. 외지인이 유대 전통에 대해 폄하하기 위해 쓴 글이므로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 해도, 이 기록은 어느 정도의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한 나라의 수도가 되기에 지정학적으로 매우 좋지 않은 위치에 있음에도 당시 가장 번성한 도시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성전에서 매일 지속되고 있던 거대한 소비 체제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율법이 정한 제사 제도의 제한적 효력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일 해에 한 번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 모든 백성의 죄를 위해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그 의식을 매년 반복해야 했습니다. 그것에 더하여, 각 사람은 자신의 죄를 속하기 위해 율법의 규정에 따라 짐승이나 곡물을 가지고 와서 속죄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연약한 인간이기에 그 사람은 또 다시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는 속죄 제사를 반복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흐르는 짐승의 피는 멎을 새가 없었고 하늘로 올라가는 연기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거대한 소비 장치는 주후 70년에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 멈추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짐승의 피로 속죄 제사를 드리는 시대는 끝날 것이며, 죄를 지을 때마다 무한 반복하는 속죄 제사도 끝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신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 자신의 피로 영원하고도 완전한 제사를 드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그분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직과 제사 제도를 폐지하셨습니다. 이제는 그분의 보혈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
오늘도 주님의 보혈의 은혜 안에 머물러 살아갑니다. 그 은혜가 저희를 지성소에 세웁니다. 하나님이 저희 안에, 저희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오, 주님, 저희에게 이 은혜를 주시니 감사 드립니다. 오늘도 저희의 호흡이, 눕고 일어나는 것이, 생각하고 말하고 일하는 모든 것을 통해 주님이 드러나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구합니다. 아멘.
'좋은 말씀 > -사귐의 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든든한 뒷배 (히 8:1-6) / 김영봉 목사 (0) | 2025.03.30 |
---|---|
완전히, 영원히, 그리고 언제나! (히 7:20-28) / 김영봉 목사 (0) | 2025.03.29 |
멜기세덱과 예수님 (히 7:1-10) / 김영봉 목사 (0) | 2025.03.27 |
그분의 약속과 맹세 (히 6:13-20) / 김영봉 목사 (0) | 2025.03.26 |
구원에 이르게 하는 더 좋은 것들 (히 6:9-12) / 김영봉 목사 (0) | 2025.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