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야고보와 요한이 선수를 친 것을 알고 다른 열 제자가 “분개하였다”(41절). 그들에게도 같은 욕망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곁으로 부르시고는, 하나님 나라와 땅의 나라를 대조시켜 보이신다. “너희가 아는 대로”(42절)는 세상의 질서를 말한다. “이방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세상의 질서를 두 개의 단어로 정의하신다. 하나는 “내리누르다”인데, 이것은 “위에서 다스리다”(‘카타크리누오’)라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세도를 부리다”로서, 이것은 “위에서 권세를 휘두르다”(‘카텍수시아조’)는 의미다. 다른 사람보다 높아져서 군림하고 부리려는 욕망이 세상 돌아가는 기본 원리라는 뜻이다. 이 말씀으로써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세상 질서와 동일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신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43절)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세상 질서와는 다르다”는 의미다. 예수님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욕망과 “으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일단 인정해 주신다. 다만, 위대함과 으뜸됨의 의미와 그렇게 되는 방법을 수정해 주신다. 하나님 나라에서 위대함과 으뜸됨을 결정하는 것은 가진 것과 성취한 것의 분량이 아니라 희생하고 헌신한 것의 분량이다. “섬기는 사람”은 ‘디아코노스’ 즉 청지기를 의미하고, “종”은 ‘둘로스’ 즉 노예를 의미한다. 스스로를 낮추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섬기고 희생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큰 사람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45절)고 하신다. 메시아 즉 영원한 왕으로 오신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따라 낮아지고 섬기는 길을 가신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섬김과 희생의 절정이다. “인자”로서 다시 오셔서 가장 높은 왕이 되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셨다. 이것은 제자들이 메시아에 대해 기대하고 있던 관념을 뒤집어 엎는 말씀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까지 그분의 고난과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를 직역하면 “많은 사람을 위한 몸값으로”가 된다. 여기에 사용된 전치사 ‘안티’는 “위하여”로 번역할 수도 있고 “대신에”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두 가지 번역이 모두 가능하지만, 일차적인 의미는 “대신에”라고 보아야 한다. 이사야서 53장의 예언처럼, 메시아로서 예수님은 우리 “대신에” 우리 모두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기 때문이다. 헬라어 표현에서 “많은”(‘폴로이’)는 문맥에 따라서 “모두”라는 의미를 가진다. “몸값”은 ‘뤼트론’의 번역으로서 노예를 자유하게 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몸값을 의미한다.
묵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욕망(식욕, 성욕, 성취욕, 명예욕 등)은 원래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주어진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잠재성을 마음껏 꽃 피우도록 주어진 도구입니다. 따라서 인간성이 심하게 망가지지 않았다면, 좋은 사람이 되고 그것으로 인정 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문제는 죄성이 세균처럼 모든 욕망에 퍼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래서 욕망은 자주 방향을 잃어,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을 바라고, 한계를 망각합니다. 죄성에 물든 식욕은 과식과 폭식을 부르고, 성욕은 간음과 음행으로 나아가고, 성취욕은 온갖 불의를 만들어 냅니다. 그로 인해 세상은 “만인을 향한 만인의 투쟁” 현장이 되고, 그것이 심화되면 현실은 지옥으로 변합니다.
이 세상을 현실 지옥으로 만든 것이 죄성에 물든 인간의 욕망에 있으므로, 현실 지옥을 현실 낙원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첫 걸음은 인간 존재 안에 퍼져 있는 죄성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성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할 때에야 완전히 제거될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우리는 죄성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다만 죄성이 우리를 압도하지 않도록 죄성의 세력을 죽여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 몸 안에 다양한 세균이 살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건강하다는 말은 세균이 완전히 박멸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세균이 우리 몸을 압도하지 않도록 제어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성이 발호하지 않게 하려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방법대로 우리의 욕망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이 세상을 현실 낙원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여 할 수 있는대로 많은 사람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평가하는 것에 휘둘리지 않고 주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기도:
주님, 주님의 영으로 저희를 채우고 다스려주십시오. 한 순간이라도, 고삐풀린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시고, 사로잡힐 때면 얼른 저희를 깨우쳐 주셔서, 그것이 저희의 습관이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주님께서 걸으신 섬김의 길, 희생의 길을 저희도 기쁨으로 걸어가게 해주십시오. 저희로 인해 이 세상의 한 구석이라도 밝아지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좋은 말씀 > -사귐의 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정 욕구와 상승 욕구 (막 10:35-40) / 김영봉 목사 (0) | 2025.03.05 |
---|---|
맡기고 기다린다는 것 (막 10:32-34) / 김영봉 목사 (0) | 2025.03.04 |
나와 복음을 위하여 (막 10:23-31) / 김영봉 목사 (2) | 2025.03.02 |
복이 화가 되지 않도록 (막 10:17-22) / 김영봉 목사 (0) | 2025.03.01 |
차별의식이라는 죄 (막 10:13-16) / 김영봉 목사 (0) | 2025.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