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그들은 드디어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여리고에 이른다(46절).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15마일(24킬로) 떨어져 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은 아주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여리고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떠나려는데, 바디매오라는 눈 먼 거지가 예수님의 일행을 따라 오면서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47절)라고 외친다.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칭호였다. 그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분을 메시아로 여기고 있었다는 뜻이다. “시작하였다”는 표현에는 그 사람이 계속 외치고 있었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그가 소란 피우지 않도록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외친다(48절).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시고 그 사람을 불러오게 하신 다음(49절),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50절)고 물으신다. 그러자 그는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답한다. “다시”라고 말한 것을 보아, 그의 시각 장애는 후천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2절)고 말씀하신다. 여기서의 “구원”은 장애에서의 치유를 의미한다. 그는 곧바로 시력을 회복하였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
묵상: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51절)고 물으셨을 때,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답한 것은, 앞에서 예수님이 야고보와 요한에게 하신 말씀 즉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38절)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는 거지였으므로 다른 것을 구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눈 뜨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야고보와 요한은 본다고 했지만 실은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 있었고, 바디매오는 눈 멀었다 하지만 마음의 눈은 열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치유해 주셨고,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저자 마가는 예수님의 ‘여행기’(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를 기록하면서 두 개의 치유 이야기로 묶습니다. 후대 학자들은 이것을 ‘수미상관법’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떤 이야기의 처음과 끝을 유사한 이야기로 묶는 문학 기법입니다. 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문학 기법이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갈릴리 사역을 마치는 지점에서 눈먼 사람을 고치는 이야기를 전하고(8:22-26) 여행기를 마치는 지점에서 다시 눈먼 사람을 고치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벳새다에서 일어난 사건에서 눈먼 사람의 치유는 두 단계로 일어납니다. 반면, 여리고에서 일어난 사건에서는 즉시로 치유가 일어나고, 치유된 그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마가가 두 개의 치유 이야기로 여행기를 묶어 놓은 이유는 제자들이 영적으로 눈먼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벳세다의 눈먼 사람처럼 모든 것을 희미하게 보는 단계에 있었습니다. 마가는 여리고의 눈먼 사람이 즉시로 치유되고 제자로 따라나서는 이야기를 일종의 ‘복선’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지금은 비록 영적으로 눈먼 상태에 있지만 결국 그 사람처럼 눈이 밝아져서 예수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기도:
성령께서 저희 마음의 눈을 맑게 해주셔서, 주님이 누구이신지 알게 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눈을 떴습니다. 주님, 이 만큼이라도 영적 시력을 회복시켜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희의 시력은, 베새다의 그 사람처럼, 사람을 나무처럼 보는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저희가 주님께 구할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 주님, 저희에게, 정말 구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온전한 영적 시력으로 회복되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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