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말씀으로 온 우주와 모든 생명을 창조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이 세상을 맡기시고 당신의 뜻을 전하셨다.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선택하신 다음에는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고,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다(1절).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으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간헐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전해졌다는 뜻이다.
“마지막 날”(2절)은 예언자들이 “그 날이 오면......”이라고 지칭했던, 하나님께서 구원 역사를 새롭게 하실 날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는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마 1:23)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요 1:14).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주셨지만,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는 말씀이 되셨다.
2절 중간에 “하나님께서는......”으로 시작하여 4절까지 이르는 부분은 히브리서 저자가 쓴 것일 수도 있고, 초대 교회에서 신앙고백문 혹은 찬송가로 사용된 것을 인용한 것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그를 통하여 온 세상을 지으”셨다. 요한복음 1장 1-5절은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로고스’)이 성부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하셨다고 말한다. 그분은 장차 “인자”로서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분은 “만물의 상속자”이시다. 그뿐 아니라, 그분은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3절)이시다. 그분은 창조자요 통치지이며 완성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3절)이시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분에게 발산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분은 또한 “하나님의 본체대로의 모습”이시다. 그분은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존재가 아니라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후대 교회에서는 “성육신”(incarnation)이라고 표현했다.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그분은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서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다.” 이것은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과 승천 사건을 의미한다. “높은 곳”과 “오른쪽”은 공간적인 의미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신적 차원을 가리키는 비유 언어로 사용되었다. 구원을 완성하시고 하나님의 자리로 돌아가신 예수님은 천사들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었다(4절).
묵상:
세례를 베풀기 전에 세례 후보자에게 묻는 마지막 질문은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주님이요 구원자라고 믿습니까?”입니다. “주님”이라고 믿는다는 말은 그분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자신의 삶을 주관하신다고 믿는다는 뜻이고, “구원자”라고 믿는다는 말은 그분이 자신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해 주셨음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아야 할 최소한의 지식이요 최소한의 고백입니다. 그 고백이 진실하다면 구원 받았다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완성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문턱을 넘어서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비경을 품은 거대한 국립공원에 비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는 말을 잃게 하는 놀라운 경관들이 숨어 있습니다. 만일 출입문을 통과하고 나서 입구에서 서성이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그 공원을 누리고 즐기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최소한의 지식과 고백으로 만족하는 것이 그와 같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편지에서 예수라는 거대한 신비를 탐험하도록 독자들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첫 네 절만 해도 여러가지 언어와 비유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단지 나의 주님이요 구원자가 아니라 온 세상을 지으셨고 유지하시고 완성하실 분입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완성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를 제거하셨고, 마지막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이루신 일이 어떤 것인지, 저자는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기도:
주님, 저희가 주님을 너무 작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생각할 수 있는 만큼, 이해할 수 있는 만큼, 설명할 수 있는 만큼, 주님을 축소하여 믿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원에 이르러 입장권을 사고 들어가 입구에서 서성인 것이 저희의 모습이었습니다. 오, 주님, 저희의 믿음을 깨뜨리시고 주님을 주님의 크기로 믿도록 인도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좋은 말씀 > -사귐의 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들과 천사 (히1:5-14) / 김영봉 목사 (0) | 2025.03.09 |
---|---|
진정 필요한 것 (막 10:46-52) / 김영봉 목사 (0) | 2025.03.07 |
길 잃은 욕망 (막 10:41-45) / 김영봉 목사 (0) | 2025.03.06 |
인정 욕구와 상승 욕구 (막 10:35-40) / 김영봉 목사 (0) | 2025.03.05 |
맡기고 기다린다는 것 (막 10:32-34) / 김영봉 목사 (0) | 2025.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