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믿는다는 것 (창12:1-3)

새벽지기1 2024. 5. 2. 04:36

해설:

하란에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려 할 즈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십니다. 1절부터 3절에 이르는 하나님의 말씀은 “가라” 혹은 “떠나라”는 명령으로 시작하고 “그러면”이라는 종속문이 따라 붙습니다. 

 

12장 1절은 22장 2절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가라”고 명령하면서 “내가 보여주는 땅”을 목적지로 제시하십니다. 정확히 번역하자면 “내가 보여줄 땅”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에도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으로 가라 하십니다. 이것도 역시 “내가 너에게 일러줄 산”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하셨는데, 22장에서는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 “너의 사랑하는 자”를 바치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저자는,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는 것이 아들 이삭을 바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 어려운 명령을 주시면서 일곱 가지의 약속을 제시하십니다. 첫째,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는 것, 둘째, “복을 주겠다”는 것, 셋째,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는 것, 넷째,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것(2절), 다섯째, 그를 축복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복을 베푸시겠다는 것, 여섯째, 그를 저주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저주하겠다는 것, 일곱째,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3절). 일곱 가지의 약속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나님이 그의 미래를 책임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주실 것을 기대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놓고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짧은 말씀 속에 “복”에 대한 언급이 다섯 번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에 3장부터 11장까지 하나님의 주된 행동은 저주하고 징계하고 심판하는 것이었습니다. 1장과 2장의 이야기에서 흘러 넘치던 복이 끊기고 화가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불러 내시면서 끊겼던 복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아브람을 택하여 제사장의 나라를 세우심으로써 제한적이나마 태초의 복을 회복하려는 것입니다. 

 

묵상: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11:1)라고 말한 다음, 믿음으로 산 사람들에 대해 열거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가는 곳을 알지도 못하고 떠났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약속하신 분을 신실한 분으로 생각했기 때문”(11:11)이라고 말합니다. “신실하다”는 말은 “믿을만 하다” 혹은 “끝까지 변함 없다”는 뜻입니다. 약속한 것은 틀림 없이 지키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저자는,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15:6)고 말합니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자기 확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신실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고 그 믿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말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한결같이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믿음”(faith)을 “신실함”(faithfulness)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집니다. 믿는다는 것은 어떤 교리를 지적으로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한결같이, 끝까지, 변함 없이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실하시므로 우리도 그분께 신실하게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강한 의지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아브람의 소명 이야기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순종한 첫 사람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