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동쪽으로만 가기를 원하는 사람들 (창11:1-9)

새벽지기1 2024. 4. 28. 06:22

해설:

노아의 아들들에게서 다시 인구가 번성한 후에 일어난 이야기 하나가 1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전반부(1-11장)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아직 언어가 하나일 때(1절) 사람들이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시날 평야에 자리를 잡습니다(2절). 2절의 “동쪽에서 이동하여 오다가”는 오역에 가깝습니다. 개역개정(“동방으로 옮기다가”)의 번역이 맞습니다. 창세기에서 “동쪽으로 가다”라는 말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건축 기술을 발전시켜 도시를 세웁니다(3절). 그들은 또한 도시 중심에 거대한 탑을 쌓습니다. 중동 지방에서 발견된 ‘지구라트’ 식의 탑이었을 것입니다. 그 탑을 세우려는 목적은 통치력을 강화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4절). “하늘에 닿게 하자”는 말은 그들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뜻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10장 8-14절에 나오는 니므롯 왕이 큰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을 보시고(5절) 하나님은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6절) 하고 탄식하시고 그들을 흩어버리기로 작정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1장 26절과 3장 22절에서처럼 “우리”라는 복수 일인칭 대명사로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고, 그로 인해 탑 공사는 중지 됩니다(8절). 그 이후로 그곳은 ‘바벨’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9절).  

 

묵상:

바벨탑의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이야기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창세기 3장이 개인의 타락에 관한 이야기라면, 11장의 바벨탑 이야기는 인류의 집단적인 타락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이유는 하나님처럼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탑을 쌓아 올린 이유도 하늘에 닿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동쪽으로” 더 멀리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더 멀어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불안감과 두려움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들은 거대한 도시를 짓고 탑을 쌓아 올림으로써 그 감정을 해결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하게 만들어 그 시도를 좌절시키십니다. 인간이 하나의 집단이 되어 그들의 능력을 결집시키면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고, 그것은 인류에게 행복이 아니라 불행을 가져다 줄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류의 미래에 대한 무서운 예언처럼 들립니다. 요즈음 과학 문명이 만들어 내는 일들을 보면 정말 인류에게는 못할 일이 없어 보입니다. 그 능력을 옳게 사용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으실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난 역사가 증명하듯 인류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선하게 사용할 능력이 없습니다. 능력은 제한이 없는 것 같은데, 그것을 선하게 사용할 능력은 모자랍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무한한 능력은 결국 무한한 불행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성이 늘 향하는 방향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었듯이, 우리 인간의 마음 안에는 신이 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잠재 되어 있습니다. 인간에게 어떤 힘이 주어지면 신이 되고 싶은 욕망은 더욱 강력해집니다. 시날 광야에 세워졌던 거대한 도시와 탑은 지난 인류 역사에서 거듭 나타났다 사라졌고, 지금은 과학과 문명의 영역에서 다른 방식으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바벨탑의 사건은 또한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과 짝을 이룹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 하신 후에 120여 신도들이 모여 기도하는 중에 성령의 부으심을 경험합니다. 그 때 그들은 각국의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시날 광야에서 소통 능력을 잃어버린 인류가 새로운 방식으로 소통할 능력을 얻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소통의 능력은 인간을 하나님의 자리에 서게 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부여하신 소통의 능력은 자신을 더욱 낮추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