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죄 속에서 사는 인간 (창세기 8장)

새벽지기1 2024. 4. 25. 06:03

해설:

40일 동안 밤낮으로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땅에서는 지하수가 솟구쳐 지상에는 백 오십 일 동안 물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방주 안에 갇혀 있는 노아의 가족과 모든 짐승을 생각하셔서 “땅 위에 바람을 일으키시니”(1절) 물이 빠지기 시작합니다. 비가 그치고 지하수가 솟기를 멈추자 물이 빠지고 방주는 아라랏 산에 걸려 떠다니기를 멈춥니다(2-4절). 아라랏 산은 지금의 터키 지방에 있는 가장 높은 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로부터 40일이 지나서 노아는 물이 얼마나 줄었는지 알아 보기 위해 까마귀를 날려 보냈는데, 공중을 날아 다니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습니다(6-7절). 얼마 후에 노아는 비둘기를 날려 보냈는데, 쉴 곳을 찾지 못하고 날아 다니다가 방주로 돌아 옵니다(8-9절). 노아는 일 주일 후에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냈고, 그 비둘기는 금방 딴 올리브 나뭇 잎을 물고 돌아옵니다(10-11절). 일주일이 더 지나 또 다시 그 비둘기를 날려 보내니 이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12절).

 

노아는 땅이 마르기를 기다립니다(13-14절).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모든 짐승을 데리고 방주를 나가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게 하여라”(17절)고 명령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명령을 반복하신 것입니다. 방주를 나온 노아는 제단을 쌓고 정결한 짐승을 잡아 번제를 드립니다(18-20절). 하나님께서는 번제물의 향기를 맡으시면서 다시는 사람의 죄로 인해 땅을 저주하지 않기로 정하십니다. “마음 속으로 다짐하셨다”(21절)는 표현도 역시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6:6)는 표현처럼 하나님의 인격성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성을 강조하면 마치 하나님의 위엄을 깎아 내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것이 언어가 가진 한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경험적 언어로 만족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언어로 표현하고 보면 늘 모순이 느껴집니다. 구약성경을 읽는 중에 우리는 늘 그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어쩔 수 없이 언어를 사용하여 설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언어는 하나님의 절대성과 초월성과 영원성을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표현해 놓고 나면 항상 뭔가 모순적인 것이 느껴집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인간의 언어로 깔끔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상이지 창조주 하나님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묵상: 

마지막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 즉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21절)는 말씀은 깊은 묵상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노아가 완전한 인간이어서 그와 그의 가족만 남겨 두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당대에 가장 의로운 사람이긴 했지만 여전히 죄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자손들은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 사실이 9장에 가면 여실히 드러납니다. 

 

죄성이 없는 인간 역사를 의도 하셨다면 노아와 그 가족까지 다 멸하고 새로 창조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했다면 인간은 더 이상 자유로운 인격체가 아니라 로봇과 같은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홍수의 심판은 속속들이 썩어 있는 역사를 청산하려는 것이었지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살면서 거룩하기를 힘씁니다. 때로 죄의 속박을 심하게 느낄 때면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깨끗이 씻어내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 봅니다. 또한 성령의 깊은 감화 가운데 거할 때면 죄성이 말끔히 치료된 것 같은 느낌을 가집니다. 하지만 그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면에서 죄성이 고개를 들 때마다 혹은 죄에 넘어질 때마다 좌절합니다. 죄 없이 살아가기를 힘쓰는 사람들일수록 영적 좌절감 혹은 영적 패배감에 휩싸이기 쉽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잊은 것입니다. 인간을 과대 평가한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죄성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적 목표는 죄 없는 삶이 아니라 죄 가운데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육체적으로도 무균 상태는 건강한 상태가 아닙니다. 세균이 득실거리는 환경에 살면서 면역성을 키워 세균에 무너지지 않는 것이 건강 상태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무균 상태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죄 가운데서 죄를 이기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때로 영적으로 약해지면 죄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곧 추스르고 일어나 다시 거룩하게 살아갑니다. 우리 안에 죄가 자라가지 않도록 그리하여 우리가 속속들이 썩지 않도록 늘 우리 자신을 돌아 보는 것이 영적 생활의 초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