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위로자로 살기 (창6:9-22)

새벽지기1 2024. 4. 23. 05:57

해설:

저자는 5장 28-32절에서 라멕과 노아에 대해 간단히 소개 합니다. 라멕은 힘들여 노동해야 하는 인간을 위로해 달라는 뜻으로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고 짓습니다. 노아는 오백 살이 지나서야 자녀를 낳기 시작합니다. 6장 8절에서 저자는 인류의 타락상을 묘사하면서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께 은혜를 입었다”고 적습니다. 그런 다음 저자는 9절 이하에서 노아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합니다.

 

먼저, 저자는 세 가지 단어로 노아를 소개합니다. 그는 “의로웠고” “흠 없었었으며”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9절). “의로움”(짜디크)은 그의 존재 상태에 대한 묘사이고 “흠없음”(타밈)은 그의 행동에 관한 묘사입니다. 의롭고 흠 없는 삶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에녹의 삶의 방식이기도 했습니다(5:22).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어서 저자는 6장 1-8절에서 간단히 묘사한 인류의 죄악상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11-12절). 여기서 저자는 “썩었다”는 단어를 세 번 반복하여 타락성의 정도를 묘사합니다. 썩어 있는 주체에 대해 저자는 세 개의 단어들(세상, 땅, 사람들)을 사용함으로써 총체적으로 부패했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피조 세계는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므로 인간의 타락은 다른 피조물에게 악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심판의 계획을 알려 주시고(13절) 방주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길이는 대략 140미터, 폭 23미터, 높이 14미터의 크기로, 삼층의 통배(지붕 덮힌 배)를 지으라고 하십니다(14-16절). 하나님은 노아에게 가족 모두를 데리고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 외의 모든 인류를 홍수로 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7-18절). 또한 모든 종류의 동물들을 한쌍씩 데리고 들어가고(19-20절), 그 짐승들이 먹을 음식도 준비하게 하였습니다(21절). 

 

마지막에 저자는 “노아는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다 하였다. 꼭 그대로 하였다”(22절)고 써서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정확히 지켰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묵상:

인간 사회에 죄가 들어온 이후, 하나님을 예배하며 동행하기를 힘쓰는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에노스가 그랬고, 에녹이 그랬으며, 노아가 그랬습니다. 절대 다수가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죄를 즐기고 있을 때, 세상의 한켠에서 잠잠히, 차분히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 거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죄성이 있어서 때로, 자주 죄를 즐기고 싶은 유혹에 흔들립니다. 또한 “죄 권하는 세상”은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합니다. 온갖 압력과 회유로 거룩한 삶을 방해합니다. 그 모든 유혹과 압력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이유는 그렇게 사는 것이 진실로 복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힘쓸 때 우리 존재의 모든 영역은 올바른 상태로 자리 잡습니다. 그것이 ‘의’(짜디크)입니다. 그렇게 될 때, 위로 하나님을 섬기고 옆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아래로 모든 생명을 돌보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이 ‘흠없음’(타밈)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의 원상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몸은 “에덴의 동쪽”에 살고 있지만 실제로는 에덴의 삶의 방식을 회복한 것입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진정한 위로와 안식을 얻습니다. 그 위로와 안식은 그 사람을 통해 이 세상으로 흘러 나갑니다. 노아가 세상을 위로하는 존재가 된 것은 홀로 외로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의롭고 흠없이 살기를 힘썼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노아처럼 그분과 동행하며 삶으로써 이 세상을 위로할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매일 하나님과 신실하게 동행해야 합니다. 그분 안에서 위로와 안식을 얻으면 그 위로와 안식이 세상을 흘러 나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