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창5:1-32)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4. 19. 07:19

해설:

하나님의 창조,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로써 창세기의 1막은 끝이 납니다. 6장부터는 창세기의 제 2막이 시작됩니다. 창세기 5장은 제 1막과 제 2막을 연결짓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형에게 살해 당한 아벨 대신으로 얻은 셋으로부터 노아에 이르는 장구한 역사의 이야기들을 성경 저자는 족보로 대신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5장의 족보와 11장의 족보를 결합하여 인류의 연대기를 추산합니다. 그렇게 계산하면 아담으로부터 우리 시대까지의 연대가 6천년이 조금 넘는 것으로 계산이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연대 계산에는 여러가지 난점이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표현은 때로 수대를 건너 뛰어 선조와 후손을 연결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족보의 시작하면서 저자는 창세기 1장과 2장을 요약합니다(1-2절). 이 요약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2절)라는 말씀입니다. 3절부터 이어지는 족보를 통해 저자가 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복이 대대손손 이어진다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독자는, 4장에 나오는 가인의 가계와 비교하여 셋의 족보를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긴 가인의 가계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보이지 않지만, 셋의 가계는 다산과 장수의 축복이 넘쳐납니다. 5장에 나오는 아담의 자손들은 365년을 산 에녹 외에는 적게는 5백년, 많게는 천년 가까이 살았습니다. 이것도 역시 거룩한 가계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이 족보는 죄를 지은 후에 아담에게 주어진 죽음의 운명이 어김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22절)하면서 365년을 산 에녹에 대해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24절)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데려가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카’는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저자는 죽음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데려감을 당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히 11:5).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죽었다”(5절, 8절, 11절, 14절, 17절, 20절, 27절, 31절)고 표현한 반면 에녹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데려가셨다”고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에녹은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3분의 1도 못 살았습니다. 물리적 시간의 양으로 보면 그는 짧게 살다가 갔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22절)라는 표현을 통해 그의 지상 삶이 결코 짧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 얼마나 오래 사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성경의 기록 상 가장 오래 산 므두셀라(969년) 보다 더 충만하게 살았다 할 수 있습니다. 

 

이 족보는 결국 노아에 이릅니다. ‘노아’라는 이름은 ‘위로’라는 뜻입니다(29절). 그의 아버지 라멕은 “주님께서 저주하신 땅 때문에, 우리가 수고하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데, 이 아들이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29절)라고 말합니다. 라멕은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도 못한 채 장차 일어날 일을 예언한 것입니다. 

 

홍수 이전 시대의 사람들의 수명은 매우 길었습니다. 또한 아이를 낳기 시작한 연령도 꽤 늦습니다. 아담은 133세에, 셋은 105세에, 에노스는 90세에 아이를 낳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홍수 이전 시대 사람들은 수명이 길었던 반면에 신체 변화의 속도가 느렸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것은 홍수 이전의 생태계가 홍수 이후에 크게 바뀐 까닭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묵상: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장수와 다산은 모두가 선망하는 복입니다. 저자는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2절)라는 말로 셋의 족보를 소개하면서 장수와 다산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반면, 4장에 나오는 가인의 족보(17-24절)에는 죄가 증폭되고 악화되는 모습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에노스 이후에 비로소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기 시작”(4:26)하였는데, 그 후손들에게는 축복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장수와 다산보다 더 큰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저자는 에녹이 비록 다른 사람의 수명에 비해 3분의 1밖에 살지 못했지만 평생토록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의 나이가 365살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1년이 365일이니, 365년은 충만한 시간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에녹의 지상 삶이 하나님과의 동행으로 충만했다는 의미로 풀 수 있습니다. 5장에 열거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에녹은 가장 귀하고 값진 축복을 받은 셈입니다.   

 

믿음의 삶이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모세에 대해 말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분을 마치 보는 듯이 바라보면서”(11:27)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깊이 사귀고 그분과 동행하면 “에덴의 동쪽”(즉 하나님의 임재에서 멀어진 상태)에 살고 있지만 실은 에덴에 살고 있는 셈입니다. 아삽은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나에게 복이니”(시 73:28)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믿음의 목표는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고 죽어서 그분의 품이 안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 죽음은 비극이나 파멸이 아닙니다. 지상에 사는 동안 추구했던 것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빌 1:21)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