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하나님의 소망 (로마서 15:8~21)

새벽지기1 2023. 3. 9. 21:00
지난해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올해 2월 6일에는 튀르키예와 시리아에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연이어 2월에 세계를 뒤흔드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쟁과 기근, 지진을 예언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종말의 징조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지 않는다는 것은 진실에 귀를 막는 어리석음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한때 수많은 사람이 ‘아메리칸 드림’을 말했던 미국을 보면 이 세상에 소망이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세계는 여전히 미국을 지구상에서 가장 앞서가는 경제, 군사 대국으로 손꼽습니다. 그러나 예전처럼 미국에 대한 도덕적 존경심을 가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청교도 시대에 불렸던 ‘언덕 위에 빛나는 도시’라는 명칭은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 대신 폭발적인 살인 범죄율과 마약 범죄가 횡행하는 몰락하는 사회로 보입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제 마약 청정국에서 마약 소비국으로 급속하게 전환되고 있습니다. 출산율이 0.78까지 떨어져 이 속도로 가면 수십 년 내 나라가 소멸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모두 이러한 상태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수치심이나 분노, 저항도 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소망이 없는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에베소서 2장 12절에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세상에 파묻혀 살아가며 하나님 없는 사회를 추구할 때 소망 없는 인생이 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을 모욕하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대적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실상과 종말의 분명한 징조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소망을 두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전히 세상에 소망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15장 13절에서 ‘소망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 소망의 대상이 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소망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여전히 버리지 아니하시고, 인내하시고, 소망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소망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소망이 있기에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소망을 믿는 자들이 구원의 소망을 품는 것입니다.  
구원의 소망, 하나님의 소망
“무엇이든지 이전에 기록된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됐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 인해 소망을 품게 하려는 것입니다”(롬 15:4). 
성경이 기록된 목적은 우리가 이 소망을 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의 소망입니다. 대개 ‘소망’이라는 단어는 확실함보다 불확실성을 말할 때 더 많이 사용합니다. 단지 미래에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은 단순한 바람 정도가 아닙니다. 확실히 이루어질 것을 내다보는 믿음입니다. 마르크스주의, 맑시즘에서는 소망이라는 단어를 매우 싫어합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을 말하는 기독교를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인생을 수동적으로 만들어서 현실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고,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라 거짓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더 현실적이고, 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칩니까? 구원의 소망은 현실에서 도피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가 할 일을 하게 합니다. 참된 성도는 구원의 소망 가운데 늘 사랑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여러분 각자가 소망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열심을 나타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히 6:11). 
“그뿐 아니라 또한 성령의 첫 열매를 가진 우리조차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 됨,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이 소망 가운데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소망하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소망한다면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롬 8:23~25).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왜 소망으로 구원받았다고 고백할까요? 믿음이 미래가 될 때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확실한 믿음이 미래시제가 될 때 그것을 소망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온전한 변화도 확실한 믿음으로 소망할 수 있습니다. 이 소망은 환란 가운데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또한 우리는 그분으로 인해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기뻐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합니다.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은 우리를 낙심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인해 그분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롬 5:2). 
우리가 믿음으로 들어간 은혜는 환란이 와도 그 환란 속에서 인내를 이루고, 인내는 연단을 이루고, 결국 그 연단을 통해서 소망을 이루어 갑니다. 믿음이 고난을 만날 때 소망이 밝게 빛나고, 소망을 열매 맺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구원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우리의 완전한 부활 영광을 소망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고, 환란을 만나도 그 환란 속에서 소망 가운데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이 구원의 소망입니다. 이 소망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가 그 소망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열방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첫째, 하나님의 소망은 열방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네 구절에서 구약을 인용하면서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는 예언의 말씀, 하나님의 소망을 설명합니다. <우리말성경>에 ‘이방 사람들’이라고 번역된 단어 헬라어 ‘타에스네(τνη)’는 ‘민족들’, ‘열방들’로 번역됩니다. <개역개정성경>에서 ‘열방들’이라고 번역한 것이 이방 사람보다 적합한 것 같습니다. 열방이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는 것이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열방이 함께 주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백성들로 변화되는 소망입니다. 로마서 15장 9절은 시편 18편 49절을 인용했습니다. “내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주께 찬양을 드리며 주의 이름을 찬송합니다.” 로마서 15장 10절은 신명기 32장 43절을 인용했습니다. “이방 사람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기뻐하라.” 로마서 15장 11절은 시편 127편 1절을 인용했습니다. “모든 이방 사람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로마서 15장 12절 말씀은 이사야 11장 10절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이새의 뿌리, 곧 이방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해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이방 사람들이 그 안에 소망을 둘 것이다.” 열방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는 것이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인종적, 문화적 갈등처럼 보입니다. 음식을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어떤 날을 지키느냐 등의 문제를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라는 시각에서 권면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더 깊은 원인을 찾고 있습니다. 음식 문제와 절기 문제는 에피소드입니다. 겉으로 분열이 나타난 이슈입니다. 그러나 더 깊은 원인이 있습니다. 이것을 ‘에피센터’(Epicentre)라고 합니다. 어떤 갈등이나 문제가 있으면 겉으로 나타난 이슈는 핑계일 뿐이고, 더 깊은 문제, 보이지 않는 문제가 깔린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교회에 갈등이 일어나면 그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가 있지만, 실제로는 더 깊이 묵어 있던 다른 근본적인 원인이 그 문제를 발생하게 한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주에는 음식 문제, 절기 문제로 믿음이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품어야 한다고 권면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는 보다 깊은 의미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소망은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망에 관심을 가지지 못할 때 음식을 먹느냐 마느냐, 절기를 지키느냐 마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로마교회가 성장하면서 주후 49년경 클라우디오라는 황제에 의해서 유대인들이 일제히 추방되었던 기간이 있었습니다. 추방되었다가 서서히 돌아오면서 유대문화와 전혀 상관없는 이방인들로 구성된 로마교회가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생긴 문화와 관습의 차이가 그들 가운데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그때 바울이 “겉으로 나타난 문제일 뿐이다.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뻐하는 하나님의 소망에 관심을 가진다면 그것이 문제가 되겠느냐? 문제가 될 수 없다”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소망을 비전으로 삼지 못하면 싸울 이유가 수천 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망을 비전으로 삼으면 다투고 분열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것만이 교회의 목적은 아닙니다. 중요한 일이지만, 필요를 채우는 게 궁극적인 목표가 되면 분열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열방이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둘 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소망을 여전히 가지고 계십니다. 종말의 징조인 전쟁과 기근과 지진이 빈번해지고,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랑이 식어가는 때에도 여전히 소망을 버리지 않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소망을 이루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유대인으로 오셔서 모든 하나님의 약속들을 이루신 목적은 하나님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해 할례받은 사람의 종이 되셨습니다. 이는 조상에게 주신 약속들을 확증하시고 이방 사람들도 그 긍휼하심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기록되기를 ’그러므로 내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주께 찬양을 드리며 주의 이름을 찬송합니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8~9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열방이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는 이 변화를 위해서 우리가 하나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망이 흘러가는 통로
 
둘째, 하나님의 소망이 흘러가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소망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믿음 생활 가운데 모든 기쁨과 평강을 충만하게 하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흘러넘치게 하시기를 빕니다”(13절). 
하나님이 소망의 하나님이시고, 우리도 소망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소망이 흘러넘쳐서 전해지는 통로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소망이 흘러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절망이 흐릅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람은 하나님의 소망이 전해지는 통로입니다. 선교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소망이 우리를 통해서 열방으로 흘러가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하나님의 소망이 임하고, 열방이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은 바울의 기도입니다. 바울의 기도제목입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여러분의 믿음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셔서 소망이 여러분에게 흘러넘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이 왜 이것을 기도했을까요? 자신이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한 이유는 자신 안에 소망이 흘러넘쳤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열방을 바라보면서 그들도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는 일이 일어나기를 기도하며 하나님의 소망을 전해주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최근 몇 주 동안 미국 켄터키에 있는 애즈베리 신학교에서 부흥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수 주 동안 매일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하고, 예배가 끝났는데도 돌아가지 않고 계속 기도하고, 수만 명이 학교에 몰려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소망이 없어 보였던 미국 땅에 과거에 있었던 영적 부흥이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부흥이란 무엇입니까? 예배를 마쳤는데도 계속 예배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설교 시간에만 듣는 게 아니라 개인적으로 읽고 또 읽고, 하나님의 임재가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회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소망이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부흥입니다. 하나님이 소망을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미국에 대한 소망을 계속 가지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부흥이 일어나는 이유입니다. 기도하는 영혼에게 부흥의 역사를 허락하셔서 소망이 흘러넘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소망이 흘러넘친 역사가 선교의 역사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의 소망이 전해지는 통로가 되는 것을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인해 여러분에게 몇 가지를 담대하게 쓴 것은 여러분에게 다시 생각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은혜는 나로 이방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게 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방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일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돼서 받으실 만한 것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15~16절). 
두 가지 차원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는 무조건 사랑과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내가 받는 은혜입니다.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의롭다 함을 받는 은혜입니다. 또 다른 차원의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전해지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쓰임 받는 은혜입니다. 나에게 소망이 흘러넘쳐서 누군가에게 소망이 전해지는 통로가 되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받는 은혜에만 머무는 경우가 있습니다. 쓰임 받는 은혜, 내가 통로가 되는 은혜, 나를 통해 소망이 흘러가는 은혜를 바울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18~21절까지는 성령님이 자신을 통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고백합니다. 자신이 복음을 전할 때마다 놀라운 표적과 기사가 함께 나타났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사모합니다. 그런데 왜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가 없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지 않아서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고, 하나님의 소망이 전달되는데 자신을 드리고 쓰임 받는 은혜를 간구하는 사람들에게서 표적과 기사가 나타납니다. 쓰임 받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곳에 복음 전하기를 열망했습니다. 이는 남의 터 위에 집을 짓지 않으려는 뜻에서였습니다”(20절). 
하나님의 소망이 자신의 열망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이 복음을 듣고, 보고, 이 소망으로 함께 참여하게 되는 것이 바울의 열망이었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동일한 소망을 주십니다. 구원의 소망을 주십니다. 열국이 그리스도에게 오는 소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소망이 흘러넘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소망으로 하나 될 때 열방에 하나님의 소망이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온누리교회를 통해서, 우리를 통해서, 나를 통해서 복음이 열방에 전해지고, 모든 이가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는 역사가 마지막 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