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더 깊이 깨닫고, 복음 안에 굳게 서고,
복음에 더 순종하고,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27절이나 됩니다. 많은 이름이 등장합니다. 총 35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이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얼마나 소중하게 기록했을까 생각했습니다. 이 분들의 이름을 부르는 게 얼마나 소중한 하나님의 마음인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마음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의 모든 사역에 기쁨으로 동역했고,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함께 고난 받았던 이들이기에 사도 바울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가족이나 친척 외에 주소록에 기록되고 기억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습니까? 특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복음 증거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 사역을 위해서 함께 힘쓰는 성도들의 이름을 몇 명이나 기억하고 있습니까? 저도 여러 분의 이름이 떠올랐습니다. 잊을 수 없는 한 권사님이 계십니다. 제가 가난한 신학생 시절, 다른 교회 교육전도사 시절 제 모습이 조금 누추해 보이셨는지 어느 날 저를 찾아오셔서 “ 전도사님을 제 아들처럼 생각해도 되겠습 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그냥 덕담 인줄 알고 “네, 그렇게 하십시오”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 철마다 옷이 필요하면 옷을, 반찬이 필요하면 반찬을 주셨습니다. 반찬이 필요한 때를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용돈이 필요하면 용돈을 주셨습니다. 저를 정말 아들처럼 생각하시고 필요를 채워주고 싶으셔서 저에게 먼저 양해를 구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제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면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 같은 분이었습니다. 후에 그 권사님이 생각이 나서 찾아뵈었더니 지방에 계신다고 했습니다.“왜 지방에 계신가요?”라고 했더니 남편이 사업을 무리하게 하다가 파산했다고 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빚을 한 푼이라도 더 갚으려고 지방으로 가셨다고 하셨습니다. 여전히 신실한 믿음으로 사시는 모습과 저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뵈었습니다. 이 외에도 목회 여정에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하나님이 보내주신 많은 분의 지원과 중보기도와 협력이 있었습니다. 제가 모르는 많은 중보기도자도 있습니다. 그 귀한 중보기도로 인해서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있기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로마서> 16 장을 읽으면서 그분들의 얼굴과 이름, 때로는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온누리교회 역사 속에 함께 기도하고 수고하시며 협력하신 모든 성도의 이름을 바울이 < 로마서> 16장을 기록할 때처럼, 하나님이 하늘나라 생명책과 역사책에 귀하게 기록 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동역자들
<로마서> 16장에 35명의 이름이 집중적으로 나오는 것이 특이합니다. 사도 바울의 다른 서신을 보면 대개 문제를 일으키거나 모범이 되었던 몇 사람의 이름만 잠시 열거 될 뿐인데, 유독 <로마서> 16장에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학자들이 의아해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 사도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다. 다른 곳으로 갈 편지가 잘못 편집된 것 아닌가?”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지금까지 전도여행을 통해서 만났던 성도들, 특히 로마를 중심으로 왕래 하며 만났던 사람들임이 틀림없습니다. 초창기에는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왕래가 있었고, 로마는 로마 제국의 중심지 아니겠습니까? 로마를 중심으로 뻗은 여러 경로와 이유로 왕래하다가 사도 바울을 만나고, 함께 동역하게 된 이들과 로마 교회의 일원이 된 성도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열거한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브리스가와 아굴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고린도와 에베소에도 있었지만 원래 로마 출신입니다. 이 두 사람처럼 여러 경로로 사도 바울을 만났고, 동역했고, 바울과 함께 고난을 받았던 성도들의 이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 사랑의 문안을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는 표현이 모두 다릅니다. 그들에게 각기 다른 사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통 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동역자들입니다. 그들이 바울과 만난 것도 예수님 때문이고, 바울과 함께 일하게 된 것도 예수님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들을 만나게 했고, 공동체로 묶어 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교리적인 논쟁을 위해 쓴 것이 아닙니다. 복음 안에서 한 영혼을 세우고, 돌보고,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히 세우기 위해 쓴 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랑으로 문안하는 이들은 모두 이름 없이 헌신한 성도들입니다. 간략하게 이름을 언급하고 칭찬하는데 역사적으로 이들에 대해 남아 있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들은 이름을 남기기 위해 사도 바울을 섬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섬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생명을 다하기까지 고난을 받았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 쓰고 사도 바울을 구했다고 했습니다(4절).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는 함께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7절). 수고를 더 많이 한 사람들 마리아와 버시를 기억합니다. 사도 바울이 문안하고 있는 사람들은 인종, 계층, 직업, 성별이 다양했습니다. 그 다양한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교회를 이룬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노예 신분이었습니다. 암블리아, 우르바노, 허메는 노예 신분으로 확인됩니다. 또 어떤 이들은 황제의 가까운 친구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아리스도불로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헤롯 대왕의 손자 중 한 사람이었지만 평민처럼 살았고, 여전 히 글라우디오 황제와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황제와 가까운 친구부터 노예 신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분의 계층의 사람들이 한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에배네도라는 사람은 아시아 최초로 회심한 그리스도인이었고, 마리아, 안드로니고, 유니아는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 차별 없이 한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9명의 여성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리더십 역할을 감당했던 공동체였다는 뜻입니다. 특히 브리스가는 남편인 아굴라보다 훨씬 앞서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통해서 그녀의 지도력을 보여줍니다. 1절에 나오는 ‘뵈뵈’ 라는 여인은 여성 사업가로 확인됩니 다. 여성 사업가로서 왕래를 자주했기에 고린도에 있는 바울에게 편지를 받아서 로마 교회에 전달하는 책임을 맡았던 인물이 뵈뵈라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적인 의견입니다. 이처럼 로마 교회 당시 성도들이 여러 교회를 왕래하면서 바울의 편지를 전달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뵈뵈 뿐 만 아니라 아운그리도, 블레곤, 허메, 바르도바, 허마 등의 이름도 사업가 그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양한 직업, 남성과 여성, 여러 인종이 모두 함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녹아져 한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영혼을 돌보는 문안
사도 바울이 문안하는 이들 중에 주목할 이름이 나오는데, 13절에 등장하는 ‘루포’ 입니다. 루포는 <마가복음> 15장 21절에도 나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너무 지쳐서 걸을 수 없자 로마 병사가 구레네 출신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합니다. 그 시몬을 “알렉 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소개합니다. 루포는 <마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시몬의 아들이었을 거라고 학자들은 봅니다. 루포가 바울의 동역자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구레네 출신 시몬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셀렘에 왔다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역할을 감당 했습니다. 그는 성스러운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 보게 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11장에서 구레네 출신 몇 사람이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구레네 출신 시몬과 그의 아들 루포, 그의 어머니가 바울의 동역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복음이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는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동역자들의 이름으로도 문안합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뿐 만 아니라 자신과 함께 있는 여덟 사람의 이름을 열거합니다. 가장 가까운 디모데부터 시작해서 바울의 친척들 누기오, 야손, 소시바 더, < 로마서>를 기록할 때 옆에서 받아 적은 더디오, 교회를 돌보는 가이오, 재무관 에라스도, 그의 형제 구아도 등의 이름을 알려 주면서 함께 문안합니다. 영혼을 돌보는 중요한 일은 문안입니다. 서로 기억하고 생각하며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바울의 기억력이 좋았기 때문에 이 많은 사람의 이름을 기억했을까요? 기억력이 아니라 기도의 힘입니다. 성도들을 향한 기도와 사랑에서 영혼을 향한 사랑이 등장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를 사도 바울이 섬겼던 것입니다. 이 사랑의 문안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이름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 안에 협력하고, 서로 문안하고 돌보는 성도들의 이름이 사도 바울처럼 계속 많아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의 축복이요, 복음이 전해지는 일에 우리가 참여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거룩한 경계’를 명하다
바울은 사랑으로 문안하면서 끝맺는 것처럼 보였는데, 매섭고 날카로운 경계를 하고 있습니다. 거짓과 아첨, 현혹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무너뜨리는 일을 경계하라는 ‘거룩한 경계’를 명합니다. “형제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배운 교훈에 역행해 분열을 일으키고 훼방하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그들을 멀리하십시오. 그런 사람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고 자기 배만 채우며 그럴듯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 합니다”(17~18절). 복음에 역행해서 분열과 훼방, 현혹하고, 아첨하는 거짓된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든, 어떤 교회든지 이런 이들이 나타나는데 그들을 경계하고 멀리하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위선적인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에게 저항하시고, 책망하시고, 그들을 경계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사역하는 내내 거짓 선생들, 사기꾼들과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많은 사이비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24장에서 종말의 징조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전쟁, 기근, 지진,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예언자들, 자칭 메시아라고 하는 자들도 종말의 징조입니다. 그들을 경계하라고 합니다. 그들의 말도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은 도리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이단과 사이비는 아니더라도 공동체 안에서 분열, 거짓, 아첨으로 자신을 따르게 하는 이가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경계해야 합니다. 영혼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악의 영향력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빨리 조치해야 한 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신속하게 경계하고 조치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경계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선한 일에 지혜롭고 악한 일에 순진하라”
“여러분의 순종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고 있어 나는 여러분으로 인해 기뻐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선한 일에는 지혜롭고 악한 일에는 순진하기를 바랍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여러분의 발아래서 짓밟히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19~20절). 우리 영혼을 진리로 계속 교훈하면 선한 일에는 순진하고, 악한 일에는 지혜롭게 됩니다. 우리는 악의 실체를 경계하면서 악에 대해 궁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악을 연구하는 것만큼 위험한 게 없습니다. 어떤 분은 “세 에 악한 것도 경험해 봐야 피할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하는데, 아닙니다. 악은 경험해야 피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합니다. 악은 연구할 필요 없이 버리는 것입니다. 악한 일에는 순진 하고, 선한 일에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선을 더 묵상하고, 마음에 채우고, 더 선한 것을 이루기 위해 연구할 때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선한 역사의 통로가 된 분들의 삶을 연구하고, 그들처럼 살기 위해 노력할 때 하나님이 지혜를 주십니다. 이 지혜는 사용할수록 더 풍성해집니다. 지혜를 선한 쪽으로 사용하는지 나쁜 쪽으로 사용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선한 일에 지혜롭고 악한 일에 순진하라”는 말씀이 우리 삶에서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사탄을 성도들의 발아래 짓밟히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을 보면 메시아가 오셔서 사탄의 머리를 부순다고 했습니다. 승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 완전한 승리의 기쁨을 우리에게 맛보게 하려고 사탄을 우리 발로 밟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머리를 부숨으로 승리를 이루셨고, 그 승리를 우리가 맛보고 누리도록 사탄을 발로 밟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승리 속에 살아가게 하신다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에는 지혜롭고, 악한 일에는 순진해야 합니다. 복음에 대한 장엄한 선언 <로마서>는 복음에 대한 장엄한 선언으로 다시 돌아와 끝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전하는 복음과 예수 그 리스도에 대한 선포를 따라, 그리고 비밀의 계시를 따라 능히 여러분을 견고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비밀은 영원 전부터 감춰져 오다가 이제는 나타나게 됐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예언자들의 글로 인해 믿고 순종하게 하시려고 모든 민족에게 알려지게 됐습니다. 오직 한 분이신 지혜로우신 하나님 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영광이 영원무궁하 기를 빕니다. 아멘”(25~27절).
<로마서>의 주제는 복음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 계획이 비밀스럽게 계시되어 왔는데 이제는 밝히 드러났고, 모든 민족에게 알려지 게 되었고, 알려져야 합니다. 복음은 인간이 발명하고,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새로운 통찰력이 아닙니다. 복음의 기원은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누가 복음을 기획하고, 역사를 움직여서 사람들이 믿도록 계획하고 체계화할 수 있단 말입니까?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알려졌고, 우리를 통해서 전해짐으로 구원을 이루시고,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며, 그분께 영광이 돌려져야 합니다. 여러분, 복음이 저와 여러분을 견고하게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를 마치면서 복음을 더 깊이 깨닫고, 복음 안에 굳게 서고, 복음에 더 순종하고,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랑으로 문안했던 여러 사람의 이름처럼, 이 세상 역사에는 알려지지 않을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생명책과 하나님 나라의 사도 행전적 역사책에는 우리의 이름이 소중히 기록되기를 원합니다. 복음 안에서의 삶이 더욱 견고해지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통해서 복음이 더 온전히 증거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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