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믿는 복음의 중심에 십자가가 우뚝 서 있습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상징물이 아닙니다. 죄 가운데 빠져있어 진노의 자녀일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지극히 연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 진리입니다. 십자가는 죄인들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진리입니다. 옛사람을 십자가에 함께 못 박음으로 부활의 생명으로 살게 하는 살아있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십자가가 삶의 중심이 되고, 원리가 되며,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았던 바울처럼 살게 됩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고난의 여정에서 십자가를 둘러싼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연약한 모습으로 못 박혀 있는 예수님을 보면서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처형에 가담했던 로마 군병들, 사형을 언도했던 본디오 빌라도, 빌라도를 압박했던 유대 지도자들, 지나가는 군중들 모두 가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특히 로마 군병들은 노골적으로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께 내뱉은 조롱의 말들이 아이러니로 나타납니다.
‘아이러니’라는 말은 원래 헬라어로 ‘시치미를 뚝 떼다’, ‘위장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모르고 무지하게 내뱉은 말들이 그대로 나타날 때, 결코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내뱉은 말이 실제로 나타났을 때 ‘아이러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아이러니가 나타납니다. 오늘은 세 가지 아이러니가 나타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고난 전체가 그것을 나타내지만, 오늘은 <마태복음> 28장 본문을 중심으로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왕이라고 조롱받으셨던
예수님은 실제 왕이셨다
예수님은 실제 왕이셨다
첫째, 군병들에 의해서 왕이라고 조롱받으셨던 예수님은 실제 왕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옷을 벗기고 자주색 옷을 입혔습니다. 또 가시로 관을 엮어서 예수의 머리에 씌우고는 그 오른손에 갈대를 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희롱하며 말했습니다. ‘유대 사람의 왕, 만세!’ 그들은 예수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때렸습니다”(28~30절).
27절 이하에 나타난 로마 군병들의 행동은 평상시 십자가 처형을 집행하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총독 관저 앞으로 들어오자 모든 군병이 예수님을 둘러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자주색 옷을 입혔습니다. 마치 왕이 입는 화려한 가운처럼 자주색 옷을 입히고, 왕관을 상징하는 면류관을 가시로 만들어서 씌우고, 왕이 휘두르는 홀과 같은 갈대를 들게 하고, 모두 무릎을 예수님 앞에 꿇었습니다. 마치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왕이 화려한 옷과 홀, 왕관을 쓴 모습을 연출한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 사람의 왕, 만세”라고 외쳤습니다. 평소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죄수에게는 하지 않는 매우 특이한 행동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진정 경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롱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러니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조롱하고 모욕하는 그분이 진정 세상의 경배를 받으셔야 마땅한 왕이시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옷을 벗기고 자주색 옷을 입혔습니다. 또 가시로 관을 엮어서 예수의 머리에 씌우고는 그 오른손에 갈대를 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희롱하며 말했습니다. ‘유대 사람의 왕, 만세!’ 그들은 예수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때렸습니다”(28~30절).
27절 이하에 나타난 로마 군병들의 행동은 평상시 십자가 처형을 집행하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총독 관저 앞으로 들어오자 모든 군병이 예수님을 둘러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자주색 옷을 입혔습니다. 마치 왕이 입는 화려한 가운처럼 자주색 옷을 입히고, 왕관을 상징하는 면류관을 가시로 만들어서 씌우고, 왕이 휘두르는 홀과 같은 갈대를 들게 하고, 모두 무릎을 예수님 앞에 꿇었습니다. 마치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왕이 화려한 옷과 홀, 왕관을 쓴 모습을 연출한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 사람의 왕, 만세”라고 외쳤습니다. 평소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죄수에게는 하지 않는 매우 특이한 행동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진정 경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롱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러니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조롱하고 모욕하는 그분이 진정 세상의 경배를 받으셔야 마땅한 왕이시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 형틀 위에 죄패가 있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모든 죄수의 죄목을 붙여놓는 것입니다. 그 죄패를 정하는 책임은 빌라도 총독에게 있었습니다. 그 죄패는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로 만들어서 당시 모든 사람이 지나가면서 죄명을 알 수 있게 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죄패에 이렇게 써달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했습니다. ‘자칭 유대인의 왕’이었다. ‘자칭’이라는 말을 넣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거절합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붙였습니다. 빌라도는 “내가 쓸 것을 썼다”며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렇다면 빌라도는 예수님이 진짜 왕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죄패를 쓴 것일까요? 아닙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자칭’이라고 해야 예수님 개인의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써달라고 했는데, 빌라도는 그것을 거절하고, 자칭이라고 쓰지 않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습니다. ‘자칭’이라고 쓰면 예수님 개인의 문제가 되지만, ‘자칭’이라는 말을 뺌으로써 유대 민족 전체를 조롱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칭이 아닌 실제 유대인의 왕처럼 만듦으로써 “봐라. 이것이 유대인의 왕의 종말이다. 이 나라의 왕이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가 되었으니 유대 민족은 얼마나 형편없는 민족인가”라고 조롱하고 모욕하기 위해서 ‘자칭’이라는 말을 뺀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은 그 머리에 쓴 죄패대로 그분이 왕이셨음이 증거되었습니다. 모든 구체적인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아이러니로 나타난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죄패를 조롱하기 위한 의도로 썼지만, 그 또한 하나의 아이러니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메시아
둘째, 다른 이들은 구원하고 자신은 구원할 수 없느냐고 조롱받았던 예수님은 실제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메시아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를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남을 구원한다더니 정작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군!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니 어디 한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지.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어 주겠다’”(41~42절).
유대 지도자들이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병자를 고치는 능력, 예수님의 모든 교훈의 영향력을 그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예수님의 사역을 인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또한 조롱하기 위해서입니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라니 어디 한 번 내려와 보라지”하는 것도 조롱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려고 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사실이었습니다. 로마의 군병들처럼 유대의 지도자들도 아이러니를 만들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심으로써 자신을 구원하셨다면, 능력을 보여주셨다면, 그는 다른 이를 구원하는 메시아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메시아
둘째, 다른 이들은 구원하고 자신은 구원할 수 없느냐고 조롱받았던 예수님은 실제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메시아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를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남을 구원한다더니 정작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군!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니 어디 한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지.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어 주겠다’”(41~42절).
유대 지도자들이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병자를 고치는 능력, 예수님의 모든 교훈의 영향력을 그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예수님의 사역을 인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또한 조롱하기 위해서입니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라니 어디 한 번 내려와 보라지”하는 것도 조롱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려고 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사실이었습니다. 로마의 군병들처럼 유대의 지도자들도 아이러니를 만들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심으로써 자신을 구원하셨다면, 능력을 보여주셨다면, 그는 다른 이를 구원하는 메시아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에 보면 대제사장 가야바가 이 상황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게 하지 않는 것이 유익한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님이 죽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만 보면 십자가의 죽음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 사람이 백성들을 위해 죽어서 우리 모두가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하냐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 계획을 지지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가야바는 다른 속셈으로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자 자신들의 거짓이 드러날까 봐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중들을 선동한 것입니다. “이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 로마 민족이 우리 민족을 완전히 제거할 것이다”라는 근거 없는 거짓말을 하고, 선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포장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 죽음으로써 우리 모두가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 몰아야 한다고 지도자들을 거짓 선동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 자체는 맞는 말입니다. 한 분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으로 우리 모두를 살게 한 것이 얼마나 유익합니까? 그는 거짓으로 자신의 죄를 포장하고, 예수님을 빨리 제거함으로써 선한 영향력을 가로막으려고 했던 거짓 선동이 실제로 예수님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구원하지 않음으로써, 한 사람이 백성들을 위해 죽음으로 그들을 살렸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말도 십자가의 아이러니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을 신뢰하셨다
셋째, 하나님의 버리심을 절규했던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을 신뢰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니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그를 당장 구원하시겠지. 자기 스스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했었다”(43절)
“오후 3시쯤 돼 예수께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이것은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째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입니다”(46절).
세 번째 아이러니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죽임 당하시는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고, 그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마틴 루터는 이것을 가리켜 ‘십자가에 달리시고 감추이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버리심을 절규했던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을 신뢰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니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그를 당장 구원하시겠지. 자기 스스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했었다”(43절)
“오후 3시쯤 돼 예수께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이것은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째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입니다”(46절).
세 번째 아이러니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죽임 당하시는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고, 그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마틴 루터는 이것을 가리켜 ‘십자가에 달리시고 감추이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엘리야를 부르나보다’, ‘어떤 기적을 일으키려나보다’라고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째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말씀입니다. “어째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말씀이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지금까지 순종하며 살았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나오실 줄 몰랐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의미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살리기 위하여 그 아들을 실제로 버리신 사건이고,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께 쏟아 부은 저주의 사건이기에 하나님은 아들을 어둠 속에 버리시고, 죽음에 처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어째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나를 버리시면 안 되는데 왜 버렸습니까?”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앞에 있는 “내 하나님, 내 하나님‘”라는 말씀 속에는 버림 받는 시간 속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여전히 신뢰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는 그 순간에도 아버지를 여전히 신뢰하고 계셨습니다.
“어째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것은 하나님께 원망하고 한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탄, 탄식,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이 아들을 버릴 만큼 놀랍고 크신 사랑이군요.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버리실 만큼 놀랍고 크신 사랑이시군요”라는 의미입니다.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째서 나를 버리셨습니까?”부르짖음은 예수님을 버리실 만큼 이 모든 세상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탄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버림받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여전히 신뢰하고 계셨습니다. 여전히 순종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예수님을 믿어야 할 이유!
예수님을 믿어야 할 이유!
사람들이 볼 때 ’하나님이 예수님을 저렇게 버리셨는데 어떻게 신뢰할까?‘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처럼 오해하지만, 하나님은 그 아들을 버리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예수님은 하나님을 여전히 신뢰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조롱하고 쏟아낸 모든 말들을 가려내면 아이러니가 많이 나옵니다. “저가 성전을 헐고 3일만 짓는다고 한다”는 조롱도 실제 예수님이 죽으심과 부활로 새로운 성전을 3일 만에 지으셨습니다. 모든 아이러니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만왕의 왕인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하나님의 아들인 내가 나를 구원하지 않고 너를 구원했다. 아버지께 버림받는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함으로 너를 구원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심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자들은 언젠가 내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믿어야 할 이유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요즘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교회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뱉는 말들이 실제로 나타나는 아이러니가 될 것입니다. 진정한 진리는 그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한 말에 의해서 더 밝게 빛납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진리셨기에 예수님을 모르고 내뱉은 이들의 조롱이 모두 아이러니로 나타나 예수님이 진정 구원자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알게 됩니다.
“만왕의 왕인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하나님의 아들인 내가 나를 구원하지 않고 너를 구원했다. 아버지께 버림받는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함으로 너를 구원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심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자들은 언젠가 내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믿어야 할 이유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요즘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교회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뱉는 말들이 실제로 나타나는 아이러니가 될 것입니다. 진정한 진리는 그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한 말에 의해서 더 밝게 빛납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진리셨기에 예수님을 모르고 내뱉은 이들의 조롱이 모두 아이러니로 나타나 예수님이 진정 구원자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모르기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모르기에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도 조롱하고 모욕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 편에 온전히 서 있다면, 교회를 향한 사람들의 조롱도 언젠가 그들의 삶 속에 아이러니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전도자로 바꾸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그분의 나라를 대적하는 모든 이들을 사랑으로 변화시켜서 아이러니로 나타나게 할 것입니다. 그러한 일들이 역사상 정말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부정하기 위해 글을 쓰다가 도리어 증거하는 사람으로 바뀐 사례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고난을 겪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 살아갈 때 놀랍게도 세상 가운데 아이러니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처럼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십자가를 굳게 붙잡으십시오. 십자가의 역설이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아이러니가 나타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도 동일한 아이러니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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