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께 육체의 고난만큼이나 아픔을 주었던 것이 사랑하는 제자들의 배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손과 발에만 못이 박힌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이 못이 박혔습니다. 특히 가장 가까이 생활했던 유다와 베드로의 배반이 예수님의 가슴에 못 박히는 아픔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6절에서 28절까지 예수님이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면서 성만찬을 제정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두 제자의 배반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20~25절은 가룟 유다의 배반을 설명하고 있고, 31~75절까지는 베드로의 배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만찬을 제정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는 가장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반면 유다의 말은 의도적인 기만에서 나오는 거짓말입니다. 베드로의 말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예수님을 부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아름다운 말씀이 두 제자의 배반의 말에 둘러싸여 나타납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별이 빛나듯이, 죄의 어두움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빛나고 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출애굽 중에 한 순간, 한 저녁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실 때 완고하게 거부하는 바로에게 열 가지 재앙을 주셨습니다. 열 가지 재앙 중에 마지막 재앙이 애굽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의 생명을 취하는 재앙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백성들에게 어린 양의 피를 문에 바르도록 하셨고, 그 어린 양의 피가 표식이 되어서 약속의 백성들에게 재앙이 임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유월(Passover)하도록 하신 절기를 ‘유월절’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 밤에 어린 양의 피가 약속의 백성들을 재앙으로부터 보호한 것을 기념하는 식사가 ‘유월절 식사’입니다. 하나님이 유월절 절기를 제정하신 이유는 애굽으로부터 이끌어내신 구원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장차 하나님이 베푸실 새로운 출애굽을 내다보며 기다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과거 출애굽이 정치적인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라면, 장차 다가올 새로운 출애굽은 죄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되신 예수님의 죽음으로 새로운 출애굽을 이루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마지막 유월절 만찬은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이시며, 새로운 출애굽을 이루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특히 유월절 만찬은 예수님을 배반할 제자들과 함께하는 만찬이었다는 게 중요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배반을 이기는 사랑
배반을 이기는 사랑
“모두들 식사를 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21절).
이 배반에 대한 예고가 없다면 예수님은 예기치 않은 제자의 배신으로 뜻밖의 죽음을 맞이한 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뜻밖의 배반으로 원치 않는 죽음을 맞이한 운명의 희생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운명의 희생자가 아니라 운명의 주관자셨습니다. 유다의 배반을 미리 아셨고, 이 만찬 가운데 유다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반을 슬퍼하셨고, 고통스러워하셨고, 괴로워하셨고, 유다에게 끝까지 기회를 주시며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특이한 것은 예수님이 한 제자의 배반을 예고하시면서 이름을 거명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유다’라는 이름을 거명하셨다면 제자들에 의해 끌려 나갔을 것입니다. 23절에서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23절)라고 말씀하셨는데. ‘아주 가까운 친구’를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내가 믿던 가까운 친구, 내 빵을 나눠 먹던 그 친구조차 나를 대적해 발꿈치를 들었습니다”(시 41:9). ‘발꿈치를 들었다’는 것은 배반했다는 뜻입니다. <시편> 41편은 다윗이 믿었던 아히도벨에게 배반당하고 쓴 시인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도 가까운 친구에게 배반당하신다는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배반당하시는 메시아를 예언합니다.
이 배반에 대한 예고가 없다면 예수님은 예기치 않은 제자의 배신으로 뜻밖의 죽음을 맞이한 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뜻밖의 배반으로 원치 않는 죽음을 맞이한 운명의 희생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운명의 희생자가 아니라 운명의 주관자셨습니다. 유다의 배반을 미리 아셨고, 이 만찬 가운데 유다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반을 슬퍼하셨고, 고통스러워하셨고, 괴로워하셨고, 유다에게 끝까지 기회를 주시며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특이한 것은 예수님이 한 제자의 배반을 예고하시면서 이름을 거명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유다’라는 이름을 거명하셨다면 제자들에 의해 끌려 나갔을 것입니다. 23절에서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23절)라고 말씀하셨는데. ‘아주 가까운 친구’를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내가 믿던 가까운 친구, 내 빵을 나눠 먹던 그 친구조차 나를 대적해 발꿈치를 들었습니다”(시 41:9). ‘발꿈치를 들었다’는 것은 배반했다는 뜻입니다. <시편> 41편은 다윗이 믿었던 아히도벨에게 배반당하고 쓴 시인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도 가까운 친구에게 배반당하신다는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배반당하시는 메시아를 예언합니다.
예수님이 친구가 배반할 거라고 예고하시는 이유는 유다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또 나머지 제자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배반을 미리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를 배반한 유다가 말했습니다. ‘랍비여! 저는 아니겠지요?’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말했다’”(25절).
유다가 가증스럽게 다른 제자들처럼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약속하고, 예수님께 붙은 현상금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당시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던 백성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섣불리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체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 모르게, 동요하지 않게, 은밀한 시간과 장소에서 예수님을 체포해야 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 측근 중 한 사람의 협력이 필요했습니다.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을 때, 유월절을 준비하는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는 게 매우 역설적입니다. 그들은 유월절의 의미와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사악함을 택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유다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유다에게 돌아올 기회를 주셨습니다. 유다는 하나님 예정의 희생자가 아닙니다. 유다의 악한 마음 때문에 그 일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유다는 사탄의 희생자도 아닙니다. 다른 본문을 보면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는데 저항 없이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유다가 사탄에게 문을 열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마지막 만찬에 앉아 거짓으로 예수님과 함께 식사했습니다. 가까운 친구, 제자들도 속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모든 죄, 의도, 계획을 알고 계셨습니다. 경고와 인내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돌이키지 않자 예수님이 또 하나의 행위를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이 빵 한 조각을 적셔서 주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빵 한 조각을 적셔서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에게 주셨습니다”(요 13:26).
만찬에서 빵 한 조각을 건네는 것은 그 식탁에서 가장 중요한 손님에게 최고의 예우를 갖추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반할 제자를 최고의 손님으로 대우하셨습니다. 가장 큰 배반의 아픔을 가져다 줄 유다를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가장 사랑하셨습니다.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까지 유다를 악에서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만찬 배경은 사탄의 종이 되어서 배반하는 제자와 함께하는 만찬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반할 제자에게 끝까지 돌이킬 기회를 주시며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다를 위해서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배반을 이기는 사랑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때 예수를 배반한 유다가 말했습니다. ‘랍비여! 저는 아니겠지요?’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말했다’”(25절).
유다가 가증스럽게 다른 제자들처럼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약속하고, 예수님께 붙은 현상금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당시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던 백성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섣불리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체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 모르게, 동요하지 않게, 은밀한 시간과 장소에서 예수님을 체포해야 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 측근 중 한 사람의 협력이 필요했습니다.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을 때, 유월절을 준비하는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는 게 매우 역설적입니다. 그들은 유월절의 의미와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사악함을 택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유다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유다에게 돌아올 기회를 주셨습니다. 유다는 하나님 예정의 희생자가 아닙니다. 유다의 악한 마음 때문에 그 일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유다는 사탄의 희생자도 아닙니다. 다른 본문을 보면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는데 저항 없이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유다가 사탄에게 문을 열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마지막 만찬에 앉아 거짓으로 예수님과 함께 식사했습니다. 가까운 친구, 제자들도 속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모든 죄, 의도, 계획을 알고 계셨습니다. 경고와 인내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돌이키지 않자 예수님이 또 하나의 행위를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이 빵 한 조각을 적셔서 주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빵 한 조각을 적셔서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에게 주셨습니다”(요 13:26).
만찬에서 빵 한 조각을 건네는 것은 그 식탁에서 가장 중요한 손님에게 최고의 예우를 갖추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반할 제자를 최고의 손님으로 대우하셨습니다. 가장 큰 배반의 아픔을 가져다 줄 유다를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가장 사랑하셨습니다.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까지 유다를 악에서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만찬 배경은 사탄의 종이 되어서 배반하는 제자와 함께하는 만찬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반할 제자에게 끝까지 돌이킬 기회를 주시며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다를 위해서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배반을 이기는 사랑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새로운 출애굽,
새 언약의 은혜 이루는 죽음
새 언약의 은혜 이루는 죽음
“그들이 식사를 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 떼어 제자들에게 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받아서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그리고 또 잔을 들어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모두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위해 많은 사람들을 위해 흘리는 내 피, 곧 언약의 피다’”(26~28절).
예수님이 빵을 나눠주시면서 “내 몸”이라고 하셨고, 포도주를 나눠 주시면서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빵을 나눠주시면서 “이것이 나의 몸”이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이 받았을 충격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잔을 나눠 주시면서 “이것이 나의 피다. 곧 언약의 피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이 받았을 충격을 늘 염두에 둬야 합니다. 이해할 수 없게 다가오는 충격적인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의 몸을 부셔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우리의 죄를 씻고,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영원한 음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먹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먹는다’는 것은 그 음식이 우리의 일부가 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 몸의 일부가 되는 연합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출애굽, 새로운 유월절, 새로운 언약을 이루시는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계셨습니다. 예수님 몸이 찢겨지시고, 피가 흘려지시는 것은 단순히 억울하고 끔찍한 죽음이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이루신 출애굽의 역사, 하나님이 오랫동안 주신 새 언약의 모든 은혜를 이루시는 죽음입니다.
“…내가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의 말이다”(렘 31:34b).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계획을 갖고 계셨고, 그 죄를 기억하지 않는 완전한 용서와 회복의 역사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을 유월절 어린 양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그가 자기 목숨을 죽음으로 내던지고 죄 지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으며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죄 지은 사람들이 용서를 받도록 중재를 했기 때문이다”(사 53:12b).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흘리는 피입니다.
“또 모세는 피를 가져다가 백성들에게 뿌리며 ‘이것은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따라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다’라고 말했습니다”(출 24:8).
율법을 가지고 우리가 준행하겠다고 하는 백성들에게 모세가 피를 뿌립니다. 그 뻘건 피를 뿌리면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라고 했습니다. 출애굽 한 백성들에게 언약의 피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짧은 말씀 속에 하나님이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약속하신 모든 약속이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완성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안에 있다”(요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연합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떡과 잔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을 체험하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심을 체험하는 통로가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생명의 빵으로 먹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놀랍게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는다는 약속이 실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와 같은 배반자를 위해서도 자신의 생명을 음식으로 내어주시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랑은 그 어떤 배반보다 큰 사랑입니다. 배반을 이기고 넘어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그 사랑을 체험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배반이 주는 상처와 아픔도 이깁니다. 우리도 때로 배반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오직 십자가 사랑으로만 이기고, 치유될 수 있습니다. 성찬에 참여할 때 배반을 이긴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찬송을 부른 후에 올리브 산으로 향했습니다”(30절).
성경에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찬송하셨다는 유일한 구절입니다. 기적을 베푸시고 난 뒤에 찬송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놀랄만한 기적 이후 찬송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을 향해 나가며 찬송하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그 어떤 죄와 상처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배반한 우리들을 십자가를 통해 용서하시고, 화목하게 하시고, 연합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상처가 십자가의 사랑으로 씻어지고, 화목해지며, 연합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빵을 나눠주시면서 “내 몸”이라고 하셨고, 포도주를 나눠 주시면서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빵을 나눠주시면서 “이것이 나의 몸”이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이 받았을 충격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잔을 나눠 주시면서 “이것이 나의 피다. 곧 언약의 피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이 받았을 충격을 늘 염두에 둬야 합니다. 이해할 수 없게 다가오는 충격적인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의 몸을 부셔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우리의 죄를 씻고,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영원한 음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먹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먹는다’는 것은 그 음식이 우리의 일부가 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 몸의 일부가 되는 연합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출애굽, 새로운 유월절, 새로운 언약을 이루시는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계셨습니다. 예수님 몸이 찢겨지시고, 피가 흘려지시는 것은 단순히 억울하고 끔찍한 죽음이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이루신 출애굽의 역사, 하나님이 오랫동안 주신 새 언약의 모든 은혜를 이루시는 죽음입니다.
“…내가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의 말이다”(렘 31:34b).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계획을 갖고 계셨고, 그 죄를 기억하지 않는 완전한 용서와 회복의 역사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을 유월절 어린 양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그가 자기 목숨을 죽음으로 내던지고 죄 지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으며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죄 지은 사람들이 용서를 받도록 중재를 했기 때문이다”(사 53:12b).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흘리는 피입니다.
“또 모세는 피를 가져다가 백성들에게 뿌리며 ‘이것은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따라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다’라고 말했습니다”(출 24:8).
율법을 가지고 우리가 준행하겠다고 하는 백성들에게 모세가 피를 뿌립니다. 그 뻘건 피를 뿌리면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라고 했습니다. 출애굽 한 백성들에게 언약의 피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짧은 말씀 속에 하나님이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약속하신 모든 약속이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완성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안에 있다”(요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연합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떡과 잔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을 체험하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심을 체험하는 통로가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생명의 빵으로 먹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놀랍게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는다는 약속이 실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와 같은 배반자를 위해서도 자신의 생명을 음식으로 내어주시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랑은 그 어떤 배반보다 큰 사랑입니다. 배반을 이기고 넘어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그 사랑을 체험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배반이 주는 상처와 아픔도 이깁니다. 우리도 때로 배반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오직 십자가 사랑으로만 이기고, 치유될 수 있습니다. 성찬에 참여할 때 배반을 이긴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찬송을 부른 후에 올리브 산으로 향했습니다”(30절).
성경에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찬송하셨다는 유일한 구절입니다. 기적을 베푸시고 난 뒤에 찬송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놀랄만한 기적 이후 찬송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을 향해 나가며 찬송하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그 어떤 죄와 상처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배반한 우리들을 십자가를 통해 용서하시고, 화목하게 하시고, 연합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상처가 십자가의 사랑으로 씻어지고, 화목해지며, 연합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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