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왜 울고 있느냐 (요한복음 20:11~18)

새벽지기1 2023. 5. 3. 06:33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승천하시기까지 40여 일 지상에 머무셨습니다. 그 40여 일 동안 예수님이 10여 차례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집중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행적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영광을 대적들에게 복수하는데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적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은 신성을 보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도리어 가장 앞서 예수님을 죽음에 넘기려 했던 이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거짓과 불의, 악함이 드러나니까 선하시고, 의로우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이후 영광을 비춘다고 해서 그들이 회개하거나 악함을 돌이키지 않을 것을 아셨기에 제자들에게 부활의 능력을 나눠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발견하고도 두려워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의심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도 여전히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불안해했습니다. 여전히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에는 연약한 제자들이었습니다. 바로 그 제자들을 예수님이 만나주셨습니다. 몇 사람은 개별적인 만남을 가져 주셨습니다. 
가장 순수한 사랑을 가진 여인들
부활의 기록 가운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개인적인 만남을 가져 주신 사람들에게 집중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제자 베드로, 의심 많은 제자 도마,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성 제자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주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와의 만남이 부각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표면적으로 가장 먼저 만나주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문화에서 여성의 증언은 법정에서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여성의 인권이 인정받지 못했던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에 만일 부활의 기록이 거짓으로 만들어진 문서라면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으로는 부활의 첫 증인이 여인이라는 시나리오를 결코 만들 수 없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부활의 모든 기록을 증거하는 신약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고 믿고 싶은 불신자들이 “무덤을 오인했다”, “잘못 찾아갔다”, “시체를 훔쳐갔다”, “예수님이 쌍둥이였다”등 별의 별 몸부림을 치다 결국 마지막에 도착하는 게 “신약 자체가 만들어진 신화적인 이야기”라고 주장합니다. 신약 성경의 부활 기록 자체를 만들어진 이야기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이 여인들이었고, 막달라 마리아와 개인적인 만남이 있었다는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은 도저히 만들 수 없습니다. 마치 천동설을 믿었던 시대에 지동설로 어떤 스토리가 나오지 않는 것처럼, 그들의 상상 속에도 있을 수 없는 기록입니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를 가장 먼저 만나주신 것은 단지 부활의 사실만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장 깊이 예수님을 사랑한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십자가에 예수님이 못 박히실 때도 가장 가까이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있었고, 사도 요한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십자가와의 물리적인 거리는 예수님과의 사랑의 거리였을 것입니다. 멀찍이 바라보는 사람은 예수님과 마음이 멀어진 사람이겠고, 그 끔찍한 십자가 형틀에 가까이 있었던 이는 가장 사랑하는 이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당연히 사랑이 있었겠고,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으로부터 자유함을 받아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섬겼던 제자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다른 여성제자들과 함께 안식 이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왔습니다. 무덤을 찾아온 이유는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후 안식일이 시작되기 바로 가까이 있었기에 시신을 수습할 시간 없이 돌무덤에 안치되었습니다. 원래 십자가에서 죽은 사형수는 무덤이 없습니다. 골짜기에 버려지거나 불태워지는 쓰레기 취급을 받았습니다. 무덤에 안치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 또한 변수가 일어난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부자가 자신의 돌무덤에 예수님을 안치시켰고, 빌라도를 움직일 만큼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정치적 역량과 재정적인 능력을 가지고 돌무덤에 안치한 것은 구약에 메시아가 죽임 당한 이후 부자의 묘실에 안치되었다는 예언까지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돌무덤에 안치되려면 시신이 처리되어야 했습니다. 향품이 발라진 상태로 어느 정도 보존되도록 해야 하는데 그냥 돌무덤에 안치된 것입니다. 그리고 무덤 문이 봉인되었습니다. 무덤 문이 봉인되고, 군병들이 지키고 있었던 것은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부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인들이 염려하며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굳게 문이 닫혀 있고, 군병들이 지키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무덤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군병들에게 돌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한들 열어줄 거라는 기대도 할 수 없었습니다. 또 봉인된 문은 수십 명의 장정이 열려고 해도 열리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인들은 왜 향품을 들고 갔을까요? 그것이 사랑입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보다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여인들이 하러 간 것입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고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에 여인들이 찾아간 것입니다. 그들이 찾아간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시신이었습니다. 깊은 사랑과 순수한 사랑을 가진 제자에게 예수님이 가장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여러분, 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가장 깊이 만납니까? 예수님에 대한 가장 순수한 사랑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신비한 예수님의 임재를 체험합니다.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용하려는 태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과시나 다른 어떤 이유라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눈물의 이유
기쁨의 눈물, 승리의 눈물

 
여인들이 무덤에 찾았을 때 무덤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돌문을 열어놓은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나오시도록 도우려는 게 아닙니다. 여인들이 그 무덤 안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인들의 발걸음을 아셨고, 여인들이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알고 첫 증인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만일 돌문이 열려 있지 않고,  무덤 안을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목격했다고 하면 누구도 믿지 않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환상을 보았다”,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고 취급받을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무덤 문이 열렸다는 것을 알고, 그 안에 들어가 봤더니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베드로와 요한 같은 다른 제자들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그들도 달려와서 시신이 없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제자들의 행동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들은 아직도 예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자들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요 20:9~10). 
제자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11절이 막달라 마리아의 반응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울다가 몸을 굽혀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11절). 
집으로 돌아간 제자들과 무덤 밖에 서서 계속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가 대조됩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는데 일단 집으로 돌아간 제자들과 시신이 없어진 무덤 밖에 서 있는 막달라 마리아가 얼마나 대조가 됩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는데 빈 무덤을 그냥 두고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왜 그냥 돌아갔을까요? 어떤 제자는 달리 방법이 없어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예수님에 대한 사랑 강도의 차이일 수 있습니다. 무엇이 막달라 마리아로 하여금 무덤을 떠나지 못하게 했을까요?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울고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은 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자신을 귀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처참하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울었습니다. 사랑의 눈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눈물은 말씀에 대한 불신에서 나온 눈물이기도 합니다. 9절을 보면 “그들은 아직도 예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가장 깊은 제자조차 부활의 약속에 대한 말씀을 아직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불신에서 나오는 눈물이라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래서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신이 있던 자리에 앉아서 마리아에게 질문합니다.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이 질문은 마리아의 눈물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사랑에서 나온 눈물입니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빈 무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눈물이라는 지적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눈물이지만 또한 불신의 눈물입니다. 어떻게 똑같은 눈물이 사랑의 눈물이면서 동시에 불신의 눈물일 수 있습니까?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물었습니다.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마리아가 천사들에게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13절). 
막달라 마리아는 빈 무덤을 보고도 “사람들이 시신을 어디로 가져갔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눈물이면서 동시에 불신의 눈물입니다. 빈 무덤을 보고도 예수님의 위대한 부활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상황을 정반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빈 무덤이 죽음을 이기신 승리의 증거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패배자처럼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예수님을 찾지 않고, 여전히 죽임 당하신 예수님의 시신만 찾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에게는 빈 무덤이 슬픔의 장소였습니다. 빈 무덤은 기쁨의 장소임에도 여전히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슬픔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질문하신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신앙이 없고, 헌신되지 않아서입니까?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가장 깊은 사랑과 가장 깊은 헌신이 있었기에 십자가에 가장 가까이 있었고, 무덤에도 가장 먼저 찾아왔습니다. 가장 깊이 사랑하고, 가장 헌신된 제자에게도 불신의 눈물이 있었습니다. 우리 신앙이 어느 정도 믿는 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부활을 올바로 믿지 않으면 모든 신앙이 희미해지고 무너질 수 있습니다. 빈 무덤, 승리의 현장에서 패배자처럼 울고 있을 수 있습니다. 기쁨의 자리에서 슬픔의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우리도 때로 눈물의 이유를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의로운 눈물인 것 같은데 때로는 그 안에 죄가 들어 있는 눈물일 수 있습니다. 은혜 받아서 눈물을 흘린 것 같은데 가만 보면 서글퍼서 눈물을 흘릴 때도 있습니다. 마땅히 울어야 할 것을 위해 울지 못하고, 울지 않아야 할 것을 울 수도 있습니다. 신앙이 깊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헌신된 성도들도 눈물의 이유가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눈물의 이유가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흘리는 기쁨의 눈물, 승리의 눈물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다른 차원의 사랑으로 변화
 
부활하신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조금 전에 다른 제자들이 함께 왔을 때,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있을 때 나타나셨을 수도 있었을 텐데 제자들이 집으로 돌아간 이후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만 나타나신 이유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변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을 거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알아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에게만 여전히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네가 누구를 찾고 있느냐?’ 마리아는 그 사람이 동산지기인 줄 알고 말했습니다. ‘주여, 당신이 그분을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 말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그분을 모셔 가겠습니다’”(15절). 
예수님도 천사가 질문한 동일한 질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왜 울고 있느냐?”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 질문이 두 번이나 주어집니다. 이 질문이 주어진 것은 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을 예수님이 치유해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대할 때 가장 어울리지 않는 태도는 죽임 당하신 십자가에 시선이 머물러 있는 눈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실 때도 슬피 우는 여인들에게 “나를 위해 울지 말라. 너희 자신과 자녀를 위해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도 “나를 위해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고난주간을 예수님을 동정하는 기간으로 보낸다면 예수님의 말씀과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위해 울지 말라. 나는 동정의 눈물이 필요하지 않다. 내가 이렇게 죽어야 하는 이유, 곧 너희 자신과 자녀를 위해 울라”고 말입니다. 우리 눈물의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빈 무덤을 남기고 부활하셨는데도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왜 울고 있느냐?”고 두 번씩이나 질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에도, 부활하셔서 살아계심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여전히 무덤 밖에서 울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온 승리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이 세상의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눌려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눈물이 어떤 눈물인지 질문하십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야”라고 하시자 막달라 마리아가 돌아서서 히브리어로 “랍오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선생님’이라는 뜻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이 말은 랍비보다 훨씬 높은 경어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평소 예수님을 부르던 호칭이었습니다. 이때 막달라 마리아가 어떻게 움직였을까요? 틀림없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갔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온유하지만 단호하게 그녀에게서 물러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만지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못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갈 것이다’라고 말하여라”(17절). 
“나를 만지지 마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단지 여인이었기 때문일까요? 도마에게는 “나를 만져보라”고 말씀하셨지만, 여인에게는 “나를 만지지 마라”고 말씀하신 것은 여인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나에게 매달리지 말라’, ‘집착하지 말라’, ‘나를 붙잡아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지금 생각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가져온 놀라운 변화를 깨닫고, 이제는 부활을 증거하는 제자가 되어야 하는데 여전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 머물러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기에  죽음도 붙잡아둘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예수님을 붙잡아 둘 수 없고, 예수님을 가장 깊이 사랑하는 이도 붙잡아 둘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승천하셔서 다시 오실 재림을 기다리는 천상에서 사역을 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이전의 모습으로만 알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제 하나님께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이 다른 차원의 사랑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물리적으로 예수님 옆에 있는 제자가 아니라 부활 승천하셔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비하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헌신하는 믿음도 때로 나만의 예수님, 우리만의 예수님으로 붙잡아 두려는 신앙일 수 있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그분, 온 세상의 예수님이시요, 다시 오실 예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한다고 했을 때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을 붙잡아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붙잡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던 제자들처럼 마리아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에게 그 시각으로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17절 후반부에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일어날 변화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갈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곧 우리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그분의 하나님이 곧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누리실 모든 아버지와의 관계를 우리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곧 우리의 부활이 된 것입니다. “나는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만 너희도 장차 하나님께로 나와 같이 돌아가게 될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새로운 변화를 말씀하셨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무덤을 떠나지 않는 그 사랑을 받고 나타나심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눈물은 사랑의 눈물이자 또한 불신의 눈물이었습니다. 아직도 부활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오해의 눈물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쩌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져오신 온전한 관계, 온전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쁨의 눈물, 승리의 눈물이 아니라 마리아의 눈물에 머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눈물의 이유, 헌신의 이유, 사랑의 이유를 예수님의 부활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때문이 아닌 것은 마리아처럼 자신이 왜 우는지 모르고 우는 눈물이 될 수 있습니다. 

부활절이 지난 첫 주입니다. 부활절은 1년에 한 번 지나가는 절기가 아닙니다. 매주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는 주일이 되어야 합니다. 마틴 루터가 말하기를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어제 죽으셨고, 오늘 다시 사셨고, 내일 다시 오실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언제 죽으셨습니까? 어제 죽으셨습니다. 언제 다시 사셨습니까? 오늘입니다. 언제 다시 오십니까? 내일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긴장이어야 합니다. 매주 주일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체험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