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십자가의 역설 (고린도전서 1:18~25)

새벽지기1 2023. 4. 3. 05:57
현대인들은 십자가에 친숙해졌습니다. 십자가에 친숙해지면서 우리가 잊어버리게 된 것은 원래 십자가는 결코 친숙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 시대 가장 잔인한 사형틀이었던 십자가를 오늘날 우리는 장식품으로 사용하면서 십자가의 의미와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1세기 초대교회 성도들은 감히 십자가를 공동체의 상징으로 사용하리라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끔찍한 사형틀, 죽음과 수치의 상징인 십자가를 어떻게 영광과 소망, 믿음의 공동체 상징으로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로마 외곽에 있는 지하 무덤이었던 카타콤에 가보면 곳곳에 물고기 문양이 남아있습니다. 초대교회, 1~2세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상징으로 물고기를 사용했습니다. 물고기는 헬라어로 ‘익투스(ΙΧΘΥΣ)’인데, 익투스의 헬라어 이니셜을 풀어서 설명하면 “이에수스 크리스토스 테우 휘오스, 소테르(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입니다. 이것을 약자로 한  물고기 문양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상징이었습니다. 

언제부터 십자가가 교회의 상징이 되었을까요? 터툴리안이라는 신학자에 의하면 아마 십자가 성호를 그리면서부터 십자가가 공동체의 상징으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 예언과 기적, 표적과 창조 세계를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셨지만, 히브리서 말씀에 ‘아들로 자신을 나타내셨다’라고 할 때 그 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은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이념과 상상에서 나온 대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설명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죽음과 수치의 상징이기에, 흉악한 죄인이 형벌을 받는 사형틀이기에 어떻게 하나님을 나타내는 상징이 될 수 있습니까? 역설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복음의 진리가 나타납니다. 

역설, 영어 패러독스(paradox)는 헬라어 ‘파라독스’를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진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우리의 경험과 상식으로는 모순인데, 그 모순이 진리를 나타내는 것을 가리켜 ‘역설’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진리, 바울 서신에 나타난 여러 영적 진리가 역설 형태로 주어졌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지는 것이다”. “자기 생명을 잃고자 하면 얻을 것이요, 얻고자 하면 잃을 것이다”. “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이다”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 파고드는 영적 진리의 중심에 십자가의 복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역설이기 때문에 우리가 적용해야 하는 모든 삶의 진리가 역설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역설
‘하나님의 어리석음’

 
십자가의 역설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원래 십자가로 돌아가야 합니다. 십자가가 얼마나 잔인하고, 야만적이고, 끔찍한 사형 방법이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 누구신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역설을 극적으로 표현한 단어가 오늘 본문 25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연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25절). 
하나님께 어떻게 ‘어리석음’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께 ‘약함’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문자 그대로 어리석고 약하신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 하신 일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결코 선택할 수 없는 어리석어 보이는 모습이요, 사람들의 눈에는 정말 연약한 모습임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지극히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요, 지극히 연약해 보이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는 선택을 했습니다.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내려놓고 사람이 되신 것은 끊임없이 높아지려는 권력욕을 가진 사람들이 볼 때 어리석은 것입니다. 불의한 인간이 치러야 할 대가를 의로운 분이 대신 감당하신 것은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 어리석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외면하는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고, 교제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신 것은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만 가려서 사귀는 성공지향적인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자신을 거부하고 배신하는 사람들을 인내와 사랑, 용서로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배신에 분노와 저주로 대하는 일이 익숙한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이 하나님의 선택이며, 하나님은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 놀라우신 지혜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곧 하나님의 지혜
 
세상의 지혜로 볼 때 어리석어 보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곧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유대 사람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이것이 유대 사람에게는 마음에 걸리는 일이며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이든 그리스 사람이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22~24). 
사람들이 십자가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표적을 구하고, 세상의 지혜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초월적인 표적을 기대하고, 초월적인 능력이 나타나면 그것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둘러싼 상황에서 초월성이 나타났지만, 예수님은 창과 칼에 찔려 무참히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무도한 자들의 창과 채찍을 초월로 이기지 않으시고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세상의 지혜로 가득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기 어렵습니다. 세상의 방식과 문화에서 발달된 지식과 지혜가 십자가를 어리석어 보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당시 고린도라는 도시는 지식적, 문화적으로 가장 앞서 있다고 여겨지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적 수준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문화적인 수준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그리스 로마 시대 유적들을 보면 고린도의 화려함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들의 지식과 문화, 지혜가 힘과 영향력을 가져왔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구세주라는 것이 어리석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 단순한 십자가, 거침없는 십자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지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당시 헬라 사람들이 원하는 화려한 수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리한 말로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현대 교회의 모든 메시지가 화려해지면서 십자가의 단순함, 십자가를 거치는 것, 십자가의 끔찍함을 외면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세상의 교양과 문화, 지식과 우리의 기호와 생각을 달콤하게 하는 이야기에 만족하는지 모릅니다. 매주 예배당에 모여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무슨 생각으로 우리 마음과 생각을 가득 채워야 합니까? 온통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것 밖에 다른 주제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게 없다고 했습니다. 그가 가진 모든 지식을 배설물처럼 여겼다는 것은 우리 삶에 세상의 지식과 지혜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적용할 영역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배움이 필요하고,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세상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
어떤 철학자가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사용하시지 않고 그냥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없습니까?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인데 아무것도 없는 데서 세상을 구원하실 수는 없습니까?” 유식한 질문 같지만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 질문입니다. 어째서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로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로 인간을 구원하셨습니까?  

첫째, 세상의 지혜로는 모두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우리가 모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성품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방법은 하나님의 성품에 완전히 만족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죄를 범한 인간에게 형벌만을 가하신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만족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아무런 형벌이 가해지지 않고 용서하신다면 사랑은 만족하겠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결코 허락될 수 없습니다.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을 어떻게 만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 두 가지 성품에 대한 충돌을 자녀에 대한 부모의 마음에서 맛볼 수 있습니다. 자녀가 잘못할 때 부모는 꾸짖어야 합니다. 꾸짖으면 꾸짖을수록 사랑이 더 일어납니다.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그냥 넘어가고 싶지만 넘어갈 수 없습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떻게 너를 포기하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떻게 너를 넘겨주겠느냐? 내가 어떻게 너를 아드마처럼 하겠느냐? 내가 어떻게 너를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내 마음이 바뀌어 내 긍휼이 뜨겁게 솟아오른다. 내가 내 진노를 쏟지 않고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고 사람이 아니며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신이기 때문이다. 내가 진노함으로 오지 않을 것이다”(호 11:8~9). 
‘내가 어떻게’라는 표현이 네 번 반복됩니다.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하셔야 하는 일과 사랑 때문에 하실 수 없는 일이 계속 충돌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 하나님의 성품을 완전히 만족시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완전히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결코 만들어낼 수 없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며,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이루시는 지혜요, 능력입니다. 세상에서는 연약해 보이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계획을 완성하려고
둘째, 왜 하나님은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로 인간을 구원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창조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인데 일격에 사탄의 권세를 제거해 버릴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죄 가운데 타락한 영혼들, 죄 가운데 파괴된 창조질서를 회복시키는 일 없이 그렇게 하신다면 하나님의 창조 계획이 사탄에 의해서 무너진 것 아니겠습니까? 인간은 패배자로 끝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창조가 불완전한 창조로 끝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은 타락한 인간이 죄로부터 구원을 받고, 사탄의 모든 시험과 유혹을 이기고 승리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계획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완전히 하나님의 창조 계획이 이루어질 것을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 구원과 승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한 사탄은 결코 놀라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종교적 상징으로만 존재한다면 사탄은 결코 교회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시대의 문화로만 존재한다면 사탄은 결코 당황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세상을 통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고,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승리하면 하나님의 창조계획이 완성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창조 계획을 완성해 가고 계십니다.
진정 지혜 있는 사람으로 살도록 
    
셋째, 하나님이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로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진정 지혜 있는 사람으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만일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 되십시오. 그렇게 해야 진정 지혜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 보시기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기록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사람들을 자기 꾀에 넘어지게 하시는 분이십니다’라고 하고”(고전 3:18~19). 
“누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 되십시오”라는 문장에 나오는 어리석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십자가의 역설적인 어리석음입니다. 세상에서 분별력 없이 어리석은 자로 행동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가졌음에도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는 삶을 삽니다. 세상의 지혜가 왜 어리석습니까? 이생만 바라보게 하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혜가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결론이 무엇입니까? 이생에 집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가 왜 어리석습니까? 자기의 많은 꾀가 지혜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혜가 왜 어리석습니까? 모든 것을 자기 거라고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자기 꾀가 많은 사람은 항상 자기 꾀에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우직하게 바라보며 십자가를 따르는 삶에는 지혜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왜 우리가 참된 지혜를 따라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을 이루어가고 있고,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세 가지 시제를 놓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때부터 구원을 받아서 나는 완전한 사람이 되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받은 우리의 상태 때문입니다. 바다에 배가 침몰해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을 구명보트가 구출합니다. 그러면 구명보트에 구출된 것입니다. 살아난 것입니다. 구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구출된 것은 아닙니다. 구명보트를 타고 육지로 가는 것은 구원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육지에 도착해야 완전히 구출된 것입니다. 우리의 상태는 어떤 상태입니까? 예수님을 믿을 때 십자가를 통해 멸망의 바다에서 건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구명보트에 탄 것입니다. 지금 안전한 육지를 향해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안전한 도착을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구출되고 있는 중이고, 완전한 구원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로 살아가야 합니다. 온전한 구원에 이를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풀리지 않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개인의 문제든, 공동체의 문제든, 나라와 민족의 문제든지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바라볼 때 우리는 그 문제로부터 건짐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 문제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적이었고, 무서운 장벽이었던 죽음이 영생에 이르는 문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의 문제를 새로운 기회로 바꿀 수 없겠습니까? 그것이 진정한 지혜입니다. 문제 속에 답이 있다는 말은 진리입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문제 이면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지하고, 진정한 지혜 되신 십자가를 향해 나간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 진정한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시대마다 십자가를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시대의 소망이 되고, 그 시대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민족시인 윤동주 선생님의 ‘십자가’라는 시를 읽겠습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때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민족의 아픔을 끌어안고 피 흘리기까지 십자가를 바라보며 괴로움 속에 행복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 시대의 아픔을 끌어 않고 살았던 믿음의 선배들이 있습니다. 시대 상황 속에서 십자가의 역설을 하나님의 지혜로 날마다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끔찍한 십자가를 
죽음과 수치의 상징을 
생명과 소망과 영광의 상징으로 바꾸신 하나님, 
삶과 죽음을 영원한 생명의 문으로 바꾸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능력과 지혜로 임하여 주옵소서. 
십자가의 도를 깨닫고,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이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게 보는 믿음의 선택,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선택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저희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