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강자와 약자로 구분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여러 번 성공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을 강자로 여깁니다. 여러 번 실패를 경험한 사람은 자신을 약자로 여깁니다. 그러나 강자와 약자를 구분 짓는 기준 자체가 대부분 옳지 않습니다. 인간은 모두 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 약함을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강자로 비치기도 하고, 약자로 비치기도 합니다. 스스로 강자로 여기는 사람은 약함을 감추는 데 성공한 것이고, 스스로 약자라고 여기는 사람은 약함을 감추는 데 실패했을 뿐입니다. 인간의 죄성은 약자를 괴롭힘으로써 자신을 강자로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자신이 강자와 약자로 구분하는 기준을 세우고, 그 판단에 따라서 약자로 규정한 사람을 무시하고, 괴롭히며 자신이 강자임을 확인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믿음의 영역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정한 기준에 따라 강한 믿음과 약한 믿음을 규정하고, 믿음이 약한 자를 판단하고 무시합니다. 로마교회와 고린도교회에서도 이러한 문제들이 나타났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있었던 수많은 갈등은 강함과 약함의 기준을 스스로 만들고, 그것에 따라 서로를 판단하고 무시해서 생겼습니다. 로마교회에서는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를 규정해서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에서도 갈등이 전혀 없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에도 많은 갈등과 문제가 있었습니다. 신약성경의 서신서들이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한 제시라고 보면 됩니다.
믿음의 강함과 약함
‘음식 문제’
‘음식 문제’
바울은 로마교회에 나타난 문제를 복음으로 치유하고 해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거나 유혹에 쉽게 빠지는 미성숙한 성도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약함’은 특정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지나치게 엄격하거나 예민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문제 없는 양심의 자유를 누리는 영역에서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약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예수님에 대한 의심이 있고, 양심의 자유로 어떻게 해도 상관없는 부분을 자신이 엄격하게 규정하는 것을 ‘약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바울이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믿음의 강함과 약함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약한 자와 강한 자라고 표현한 이유는 당시 대다수 사람이 강한 자와 약한 자를 규정하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의 한 표현일뿐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들에게 교훈한 것을 보면 그들이 대다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교회에서 믿음이 강함과 약함을 구분하는 주제가 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음식 문제입니다. 로마교회의 어떤 성도들은 당시 시장에서 파는 고기가 우상숭배와 관련됐을 가능성이 크다며 채소만 먹었습니다. 그들은 아마 유대 그리스도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로마교회 성도 대부분 이교도였고, 이교도에서 개종한 사람들이었기에 우상숭배에 사용된 고기를 먹는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유대인이지만 구약의 정결법이 예수 그리스도 복음 안에서 모두 폐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경우에 모든 음식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바울은 신약 서신 전체에서 보면 “우상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우상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 자체도 우상이 먹은 것도 아니고, 실제 우상이 영향력을 준 것도 아니다. 고기는 고기일 뿐이다. 먹을 수 있다. 감사함으로 먹으면 버릴 것이 없다. 그것은 중립적이기에 신비한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러한 입장을 가리켜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라고 규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숭배와 관련된 것이기에 꺼림칙해서 “나는 먹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가리켜 ‘믿음이 약한 자들’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고기를 먹지 않음으로 “나는 우상숭배에 관련된 것을 끊겠다”는 이들을 믿음이 약하다고 규정한 사람들이 볼 때는 그들이 믿음이 강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반면 채소만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볼 때는 “우리가 더 믿음이 좋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기 먹는 사람들을 업신여겼을 것입니다. 각자 다른 기준을 가지고 서로를 판단하고 업신여겼습니다. 로마교회 대다수가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을 믿음이 강한 자라고 표현한 것뿐입니다. 바울이 복음 안에서 매우 공정하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판단하지 말고,
논쟁거리로 삼지 말라!”
논쟁거리로 삼지 말라!”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사람을 받아들이되 그의 견해를 논쟁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모든 음식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으나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채소만 먹습니다. 먹는 사람은 먹지 못하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1~3절).
“서로 판단하지 말고, 서로의 견해를 논쟁거리로 삼지 말라”고 교훈합니다.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먹으면 되고, 먹지 못하겠다고 하면 안 먹으면 됩니다. 그것이 서로를 판단하는 논쟁거리가 되고, 그것으로 인해 갈등이 생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갈등이 생길 게 아니라 각자의 자율에 맡겨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이유가 믿음의 강약이 될 수 없습니다. 각자 양심의 자유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비본질적인 문제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비본질적인 영역에서 많은 논쟁이 있었고, 종교개혁자들은 비본질적인 것은 각자 신앙 양심의 자유에 따를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서로 남을 판단하지 맙시다. 형제 앞에 걸림돌이나 장애물을 두지 않기로 결심하십시오”(13절).
나는 모든 것을 먹을 수 있으나 내가 먹는 것으로 인하여 누군가 양심에 거리낌이 되고 불편하다면 그를 위해서 먹지 않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먹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도 이와 유사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에 대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음식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워 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먹지 않는다 해도 해로울 것이 없고 먹는다 해도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이 자유가 연약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고전 8:8~9).
“연약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것은 먹을 수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정결법이 더는 적용되지 않기에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먹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교훈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없고 다만 부정하다고 여기는 그 사람에게만 부정한 것입니다”(롬 14:14).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는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부정한 것이 되므로 확신하고 부정하지 않다고 여기라고 권면합니다.
“그들은 결혼을 못하게 하고 어떤 음식들을 피하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음식은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과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 감사함으로 받게 하려고 창조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모두 선하므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딤전 4:3~4).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가족이 있다면 상심하는 그 영혼이 더 큰 문제입니다. 스스로 제한함으로써 부정하다고 여기고, 정결하다고 여기는 것이 올바른 신앙은 아닙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서로 판단하지 말고, 서로의 견해를 논쟁거리로 삼지 말라”고 교훈합니다.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먹으면 되고, 먹지 못하겠다고 하면 안 먹으면 됩니다. 그것이 서로를 판단하는 논쟁거리가 되고, 그것으로 인해 갈등이 생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갈등이 생길 게 아니라 각자의 자율에 맡겨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이유가 믿음의 강약이 될 수 없습니다. 각자 양심의 자유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비본질적인 문제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비본질적인 영역에서 많은 논쟁이 있었고, 종교개혁자들은 비본질적인 것은 각자 신앙 양심의 자유에 따를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서로 남을 판단하지 맙시다. 형제 앞에 걸림돌이나 장애물을 두지 않기로 결심하십시오”(13절).
나는 모든 것을 먹을 수 있으나 내가 먹는 것으로 인하여 누군가 양심에 거리낌이 되고 불편하다면 그를 위해서 먹지 않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먹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도 이와 유사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에 대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음식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워 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먹지 않는다 해도 해로울 것이 없고 먹는다 해도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이 자유가 연약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고전 8:8~9).
“연약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것은 먹을 수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정결법이 더는 적용되지 않기에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먹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교훈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없고 다만 부정하다고 여기는 그 사람에게만 부정한 것입니다”(롬 14:14).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는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부정한 것이 되므로 확신하고 부정하지 않다고 여기라고 권면합니다.
“그들은 결혼을 못하게 하고 어떤 음식들을 피하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음식은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과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 감사함으로 받게 하려고 창조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모두 선하므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딤전 4:3~4).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가족이 있다면 상심하는 그 영혼이 더 큰 문제입니다. 스스로 제한함으로써 부정하다고 여기고, 정결하다고 여기는 것이 올바른 신앙은 아닙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개인이 소중하게 여기는 그 자체를 정죄하면 안 됩니다. 초점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자유롭게 정하고 신앙생활 하는 것을 소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일반적인 규칙으로 만들면 안 됩니다. 믿음의 강약은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실 영역입니다. 개인이 꺼림칙해서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됩니다. 판단하는 게 문제입니다. 개인의 신앙 자유에 속한 것이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거나 따르도록 규정함으로써 믿음이 강한 거라고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그것이 믿음의 강약을 판단하는 주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강함과 약함
‘절기 문제’
‘절기 문제’
둘째, 절기 문제입니다. 유대 그리스도인 중에서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구약의 절기들이 있었기에 그 습관이 남아 있습니다. 안식일 규례 등 여러 규례가 있었는데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폐기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습관대로 몸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을 기뻐하고 예배하는 날이 아니라 절기의 중요성 때문에 그날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절기 습관에서 왜 벗어나지 못하는지 정죄하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무엇이 더 믿음이 좋고, 무엇이 더 믿음이 강한지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날을 저 날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이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각자 자기 마음에 확신을 가지십시오”(5절).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행할 것을 명하거나 금지한 것이 아닌 비본질적인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양심에 따라 확신하고 행동하면 됩니다.
온누리교회는 토요일에도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전통의 천 년 이상 내려왔습니다. 원래 인류 역사에 공휴일이 없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로마 제국에 휴일을 선포한 것이 휴일의 등장입니다. 그전에 종들은 항상 일하고, 주인들은 항상 쉬는 날이었습니다. 그때는 예배를 어떻게 드렸을까요? 초기 유대인들은 토요일 저녁에 모였습니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식사부터 토요일 저녁 식사 전까지가 안식일입니다. 유대인의 시간 개념은 저녁부터 그다음 날 오후까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날을 저 날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이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각자 자기 마음에 확신을 가지십시오”(5절).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행할 것을 명하거나 금지한 것이 아닌 비본질적인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양심에 따라 확신하고 행동하면 됩니다.
온누리교회는 토요일에도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전통의 천 년 이상 내려왔습니다. 원래 인류 역사에 공휴일이 없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로마 제국에 휴일을 선포한 것이 휴일의 등장입니다. 그전에 종들은 항상 일하고, 주인들은 항상 쉬는 날이었습니다. 그때는 예배를 어떻게 드렸을까요? 초기 유대인들은 토요일 저녁에 모였습니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식사부터 토요일 저녁 식사 전까지가 안식일입니다. 유대인의 시간 개념은 저녁부터 그다음 날 오후까지입니다.
여러분, 주일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날이지 그 시간을 기념하는 게 아닙니다. 시간에 초점을 둔 게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초점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모든 절기를 깨뜨리신 역사를 보여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초기 유대인들은 사도행전 역사에서 안식일이 지난 토요일 저녁이나 일요일 새벽에 모였습니다. 당시에는 저녁에 모이느냐, 새벽에 모이느냐를 논쟁했습니다. 아침이 되면 일하러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모일 수 있는 시간이 토요일 심야와 일요일 새벽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선호했고, 이방인들은 일요일 새벽을 선호했습니다. 이 시대에는 안 모이는 시간입니다. 법정공휴일이기 때문입니다. 법정공휴일이 없었던 당시에는 토요일 저녁이냐 일요일 새벽에 모였습니다. 그러다 공휴일이 지정되고 다 함께 모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주5일 근무제 등 공휴일이 다양화되고, 나뉘면서 어떤 사람은 월요일이 공휴일이고, 어떤 사람은 수요일이 공휴일입니다. 이슬람권은 금요일이 공휴일이라서 모든 교회가 금요일에 모입니다. 바리카 원전이 있는 곳은 목요일이 공휴일입니다. 목요일이 쉬는 날이기에 목요일에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일요일만 주일로 지키는 것은 인간의 습관일 뿐입니다. 칼벵의 <기독교 강요>에 의하면 일주일에 하루, 공휴일, 쉬는 날 함께 모일 수 있는 날을 정하면 됩니다. 온누리교회가 토요일에 주일예배를 드린다고 문제를 제기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을 우리가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해를 시킬 필요는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행하는가?”
여러분, 두 가지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주님을 위해서 행하는가’입니다.
“어떤 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주를 위해 중요하게 생각하고 먹는 사람도 주를 위해 먹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께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먹지 않는 사람도 주를 위해 먹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없고 자기만을 위해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습니다. 그러므로 죽든지 살든지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이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주가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6~9절).
‘주를 위해’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시고, 다시 사심으로 우리가 주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먹는 자나 먹지 않는 자나 어떤 날을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내가 정한 규범이나 규칙을 지키면 주의 날이 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마음과 태도로 주님을 예배해야 주의 날이 됩니다. 형제를 판단하고 정죄해야 주의 날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먹는 자는 먹지 못하는 자를,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주의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다.
여러분, 두 가지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주님을 위해서 행하는가’입니다.
“어떤 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주를 위해 중요하게 생각하고 먹는 사람도 주를 위해 먹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께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먹지 않는 사람도 주를 위해 먹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없고 자기만을 위해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습니다. 그러므로 죽든지 살든지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이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주가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6~9절).
‘주를 위해’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시고, 다시 사심으로 우리가 주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먹는 자나 먹지 않는 자나 어떤 날을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내가 정한 규범이나 규칙을 지키면 주의 날이 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마음과 태도로 주님을 예배해야 주의 날이 됩니다. 형제를 판단하고 정죄해야 주의 날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먹는 자는 먹지 못하는 자를,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주의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다.
“사랑을 따라 행하는가?”
둘째, ‘사랑을 따라 행하는가’입니다.
“만일 음식 문제로 여러분의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그대는 더이상 사랑을 따라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해 죽으신 그 형제를 음식 문제로 망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15~16절).
사랑을 따라 행하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도 동일한 맥락입니다.
“이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지식이 있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모두를 이롭게 합니다”(고전 8:1).
“이와 같이 여러분이 형제들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에 상처를 주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넘어지게 한다면 나는 내 형제를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을 것입니다”(고전 8:12~13).
분명한 처방을 내렸습니다. 누군가를 판단하는 지식은 교만이지만, 형제의 양심에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사랑이 있다면 모두를 이롭게 합니다.
우리 모두 주의 것입니다. 주께서 대신 죽으신 형제들을 사랑하는 삶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나의 자유가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 자유를 스스로 내려놓는 사랑이 더 큰 원리입니다. 우리는 판단을 따라 사는 인생이 아니라 사랑을 따라 사는 인생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먹거나 먹지 않거나 이날이냐 저 날이냐가 아니라 사랑으로 행하는가입니다. 바로 이것이 삶의 기준이 되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입니다.
“만일 음식 문제로 여러분의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그대는 더이상 사랑을 따라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해 죽으신 그 형제를 음식 문제로 망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15~16절).
사랑을 따라 행하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도 동일한 맥락입니다.
“이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지식이 있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모두를 이롭게 합니다”(고전 8:1).
“이와 같이 여러분이 형제들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에 상처를 주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넘어지게 한다면 나는 내 형제를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을 것입니다”(고전 8:12~13).
분명한 처방을 내렸습니다. 누군가를 판단하는 지식은 교만이지만, 형제의 양심에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사랑이 있다면 모두를 이롭게 합니다.
우리 모두 주의 것입니다. 주께서 대신 죽으신 형제들을 사랑하는 삶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나의 자유가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 자유를 스스로 내려놓는 사랑이 더 큰 원리입니다. 우리는 판단을 따라 사는 인생이 아니라 사랑을 따라 사는 인생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먹거나 먹지 않거나 이날이냐 저 날이냐가 아니라 사랑으로 행하는가입니다. 바로 이것이 삶의 기준이 되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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