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왜 다툼과 분열의 늪에서 벗어 나지 못하는지 그 이유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있습니다. 감리교 선교사 스탠리 존스의 말입니다.
“당신이 ‘무엇을’ 믿는지 말하라. 그러면 불화가 생길 것이다. 당신이 ‘누구를’ 믿는지 말하라. 그러면 하나 됨을 경험할 것이다.”
무엇을 믿는지를 말하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의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벗어나 부수적인 문제에 맞춰질 때 불화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 믿음의 내용과 교리적인 지식까지 포함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 계시고, 인격으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무엇을 믿는가를 논하는 것조차 서로 다른 해석을 하고 다른 길을 갑니다. 서로 다른 해석에 근거해서 다른 제도와 문화를 이룹니다. 결국 하나 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 이릅니다.
“당신이 ‘무엇을’ 믿는지 말하라. 그러면 불화가 생길 것이다. 당신이 ‘누구를’ 믿는지 말하라. 그러면 하나 됨을 경험할 것이다.”
무엇을 믿는지를 말하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의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벗어나 부수적인 문제에 맞춰질 때 불화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 믿음의 내용과 교리적인 지식까지 포함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 계시고, 인격으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무엇을 믿는가를 논하는 것조차 서로 다른 해석을 하고 다른 길을 갑니다. 서로 다른 해석에 근거해서 다른 제도와 문화를 이룹니다. 결국 하나 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 이릅니다.
어느 지역사회에서 두 블록 정도 떨어진 교회들이 서로 합병해서 섬기기로 결의했습니다. 합병에 대한 결의 이후 구체적인 협의를 했는데, 결론은 합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이유는 주기도문의 번역 문구를 서로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교회는 주기도문을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번역을 사용했는데, 다른 한 교회는 헬라어로 ‘죄’라는 단어를 ‘빚’이라는 단어와 같이 쓰기에 “우리 빚을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번역을 고집했습니다. 주기도문의 번역 문구에 대한 시각 차이로 합병이 깨졌습니다. 지역 신문에서 실패한 두 교회의 합병 계획을 다루면서 이렇게 기사를 썼습니다.
“한 교회는 그들의 죄로 돌아갔고, 한 교회는 그들의 빚으로 돌아갔다.”
우리 믿음의 대상이요,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벗어난 모든 주변 문제들은 교리적인 문제일지라도 다툼과 분열을 일으킬 소지가 됩니다. 이단적인 교리가 아닌데도 서로 해석의 차이를 용납하지 못함으로 다툼과 분열로 얼룩지는 게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 역사가 흐를수록 대부분 이런 함정과 늪에 빠집니다. 늪에 빠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 로마교회는 적어도 25년 이상 흐른 시점이었습니다. 한 교회의 역사가 25년이 흘렀다면 이런 늪에 빠지기에 충분히 긴 시간입니다.
“한 교회는 그들의 죄로 돌아갔고, 한 교회는 그들의 빚으로 돌아갔다.”
우리 믿음의 대상이요,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벗어난 모든 주변 문제들은 교리적인 문제일지라도 다툼과 분열을 일으킬 소지가 됩니다. 이단적인 교리가 아닌데도 서로 해석의 차이를 용납하지 못함으로 다툼과 분열로 얼룩지는 게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 역사가 흐를수록 대부분 이런 함정과 늪에 빠집니다. 늪에 빠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 로마교회는 적어도 25년 이상 흐른 시점이었습니다. 한 교회의 역사가 25년이 흘렀다면 이런 늪에 빠지기에 충분히 긴 시간입니다.
지난 주 두 가지 분열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하나는 음식의 문제요, 다른 하나는 절기의 문제였습니다. 두 가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별개로 볼 수 있는 주변적인 문제입니다. 그들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분을 예배하고, 그분을 섬기기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조차 누구를 믿는가에 초점을 두지 않고 무엇을 믿는가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면서 서로 판단하고 무시하고 분열의 늪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지난주 내용을 다시 한번 살펴보면, 우상 숭배와 관련될 수 있는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믿음이 강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그 고기를 먹지 못하거나 먹지 않는 성도들은 믿음이 약한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문제였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주로 유대 그리스도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오랫동안 구약을 근거로 살았던 성도들이 복음 안에서 자유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습관대로 신앙생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먹지 않게 되어 있는 음식을 먹는 사람들을 판단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조차 오랫동안 이어온 익숙한 습관에서 벗어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또 구약의 절기를 지키며 살아온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지만, 여전히 어떤 날이 돌아오면 절기의 습관에 묶여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 또한 ‘믿음이 연약한 자’로 평가받았습니다.
바울을 통해 가르쳐 주신 복음의 진리는 모든 음식과 절기에 대해 자유를 허락합니다. 구약의 모든 율법의 의식법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그분을 미리 보여주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로 말미암아 더는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여전히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오랜 습관이 배어있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어떠한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를 교훈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 스스로 부정하게 여기는 것 자체가 부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유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복음 안에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스스로 제한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자유보다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연약함을 판단하는 것보다 연약함을 배려해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사랑이 더 중요한 신앙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연약한 자들을 판단하므로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게 하고 장애물을 놓는 게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연약함을 배려함으로 자기 자신을 제한하고, 그들의 신앙이 세워줄 수 있는 디딤돌 같은 신앙이 되어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누군가에게 걸림돌입니까? 장애물입니까? 누군가의 신앙이 주께 더 나가게 하는 디딤돌입니까? 믿음이 연약한 자를 판단하지 말고, 그들을 배려하고, 자유를 스스로 제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주어진 자유를 완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첫째, 연약한 자들이 금지된 일을 행하는 잘못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자유를 완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속도로에 제한속도가 있습니다. 그 속도를 넘어서지 않지만 충분한 속도로 운전하며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있고, 그 속도에 훨씬 못 미치는 속도로 운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는데 그것을 먹지 못하거나 먹지 않는 것은 금지된 것을 넘어서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는 것을 못 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을 ‘연약함’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은 잘못이지만, 할 수 있는데 도달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연약함이기에 판단보다는 사랑으로 품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을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어 주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역사 속 논쟁과 분쟁 가운데 언제나 지침이 됐던 문장이 있습니다. 멜데니우스라는 분이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질적인 것들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들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서 사랑을”
우리는 비본질적인 것에 자유를 허용하지 않고 그것을 일치시키려 하다가 다툼과 분열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첫째, 연약한 자들이 금지된 일을 행하는 잘못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자유를 완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속도로에 제한속도가 있습니다. 그 속도를 넘어서지 않지만 충분한 속도로 운전하며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있고, 그 속도에 훨씬 못 미치는 속도로 운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는데 그것을 먹지 못하거나 먹지 않는 것은 금지된 것을 넘어서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는 것을 못 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을 ‘연약함’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은 잘못이지만, 할 수 있는데 도달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연약함이기에 판단보다는 사랑으로 품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을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어 주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역사 속 논쟁과 분쟁 가운데 언제나 지침이 됐던 문장이 있습니다. 멜데니우스라는 분이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질적인 것들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들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서 사랑을”
우리는 비본질적인 것에 자유를 허용하지 않고 그것을 일치시키려 하다가 다툼과 분열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판단할 자유는 예수님에게만
둘째, 우리의 주인은 예수님이시고, 다른 종을 판단할 자유가 우리에게 없고, 주인 되신 예수님에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주인 되신 예수님이 대신 죽으셔서 살리신 이들을 종의 신분인 우리가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들을 근심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권한이 아닙니다.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한 분밖에 없습다. 우리는 그들을 믿음이 연약한 자로 보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는 다른 판단이 있을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속 신앙을 우리가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받아 주셨기에
셋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렇게 받아 주셨기에 우리도 서로 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받아 주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받으십시오”(7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은혜로 나를 받아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하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의 어떠한 죄와 허물도 완전히 사해 주셨음을 강하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다른 이들을 대하는 게 다릅니다. 어떤 믿음이 진짜 강한 믿음입니까? 누군가를 판단하는 능력은 강한 믿음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받아 주고 세워주는 게 강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받아 주셨듯이, 예수님이 그 사람을 바라보시는 것처럼 대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대하듯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그 사람을 보시는 것처럼 바라본다면 그 또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디딤돌이 되는 신앙이 됩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는 마땅한 것이고, 다른 사람이 은혜받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는 것은 죄의 증상입니다.
수십 년 전 일입니다. 제가 대학 시절 기독동아리 수련회를 할 때였습니다. 어느 자매가 집회가 끝났는데 매우 심각하고 무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받아 주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받으십시오”(7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은혜로 나를 받아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하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의 어떠한 죄와 허물도 완전히 사해 주셨음을 강하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다른 이들을 대하는 게 다릅니다. 어떤 믿음이 진짜 강한 믿음입니까? 누군가를 판단하는 능력은 강한 믿음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받아 주고 세워주는 게 강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받아 주셨듯이, 예수님이 그 사람을 바라보시는 것처럼 대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대하듯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그 사람을 보시는 것처럼 바라본다면 그 또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디딤돌이 되는 신앙이 됩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는 마땅한 것이고, 다른 사람이 은혜받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는 것은 죄의 증상입니다.
수십 년 전 일입니다. 제가 대학 시절 기독동아리 수련회를 할 때였습니다. 어느 자매가 집회가 끝났는데 매우 심각하고 무
엇인가 불편한 얼굴이었습니다. 리더십들은 그 친구가 깊이 회개해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후에 고백하기를 그 수련회에 자신이 너무 싫어하는 친구가 왔는데, 그 친구가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용납이 안 되었습니다. 그 좋으신 예수님을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친구가 만났다는 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된 태도라는 것을 알기에 괴로웠던 것입니다. 그 자매를 정죄하기 어려운 것은 우리 마음에도 그런 마음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수처럼 여기는 누군가를 예수님이 받아 주신다면 말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예수님, 그 친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받아 주시는 대상을 적어 드리고 싶습니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가 서로 받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기쁨입니다. 그리스도를 이렇게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화평을 이루고 서로 세워주는 일에 힘씁시다”(17~19절).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사단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 간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 나라 대사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사단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 간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 나라 대사관입니다.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기쁨
교회가 다툼과 분열의 늪에 빠지는 가장 명확한 이유는 예수님에게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문제나 절기를 어떻게 지키는 주변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본질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기쁨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바로 믿고 있는지는 어떤 규칙, 문화, 관습을 얼마나 지키고 있는지가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기쁨이 넘치고 있는가입니다.
성령 안에서 의와 기쁨과 평강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14장 17절과 병행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절에서 3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분으로 인해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기뻐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합니다. 이는 환난은 인내를”(롬 5:1~3).
순서를 보시면 1절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고, 그 이후 화평을 누리고, 환란 가운데서 기뻐하는 기쁨이 나옵니다. 신약에서 화평, 평강, 평화는 전부 같은 단어로 사용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이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누군가와 화평을 누리게 되고, 그 결과가 기쁨입니다. 의의 열매가 화평이요, 화평의 절정이 기쁨입니다. 그래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릴 뿐만 아니라 주변 관계에서도 화평을 누립니다.
“그리스도는 오셔서 먼 데 있는 여러분에게 화평을 전하셨을 뿐 아니라 가까운 데 있는 사람들에게도 화평을 전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엡 2:17~18).
‘먼 데 있는 사람들’, ‘가까운 데 있는 사람들’은 모든 우리 영역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을 두 가지 종류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삶에도 가까운 사람이 있고, 먼 사람이 있습니다. 왜 가까운 사람이 생겼고, 먼 사람이 생겼습니까? 가까운 사람은 나와 잘 맞는 사람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 등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먼 사람이나 혹은 멀리 있기를 바라는 사람은 나와 무엇인가 안 맞는 이들입니다. 생각도 다르고, 말하는 습관도 다릅니다. 물리적 거리는 가깝지만, 마음의 거리는 멀리 있는 사람입니다.
먼 데 있는 사람이나 가까이 있는 사람 모두 한 성령 가운데서 화평 가운데로 나아가게 된다는 말씀은 <이사야서> 57장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먼 데 있는 사람과 가까운 데 있는 사람에게 화평을 전한 것은 <이사야> 57장 19절 말씀이 성취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57장 20절 이후를 보면 정반대로 악인을 설명합니다. 의인은 화평을 누리고 더 나아가 기쁨을 누립니다. 그러나 악인은 평화(평강)가 없습니다.
“‘그러나 악인들은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와 같아서 잠잠할 줄 모르고 진창과 진흙을 토해낼 뿐이다. 악인들에게는 평화(평강)가 없다’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사 57:20~21).
악인은 평화(평강)가 없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평화(평강)이 있습니다. 의의 길로 가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 평화(평강)이 흩어지지 않습니다. 그 결과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기쁨은 평화(평강)의 절정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누리고 있다는 것은 평화(평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쁨이 무엇입니까? 의롭게 된 자가 하나님과 관계에서 평화(평강)을 누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진정한 기쁨이 찾아옵니다.
성령 안에서 의와 기쁨과 평강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14장 17절과 병행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절에서 3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분으로 인해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기뻐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합니다. 이는 환난은 인내를”(롬 5:1~3).
순서를 보시면 1절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고, 그 이후 화평을 누리고, 환란 가운데서 기뻐하는 기쁨이 나옵니다. 신약에서 화평, 평강, 평화는 전부 같은 단어로 사용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이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누군가와 화평을 누리게 되고, 그 결과가 기쁨입니다. 의의 열매가 화평이요, 화평의 절정이 기쁨입니다. 그래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릴 뿐만 아니라 주변 관계에서도 화평을 누립니다.
“그리스도는 오셔서 먼 데 있는 여러분에게 화평을 전하셨을 뿐 아니라 가까운 데 있는 사람들에게도 화평을 전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엡 2:17~18).
‘먼 데 있는 사람들’, ‘가까운 데 있는 사람들’은 모든 우리 영역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을 두 가지 종류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삶에도 가까운 사람이 있고, 먼 사람이 있습니다. 왜 가까운 사람이 생겼고, 먼 사람이 생겼습니까? 가까운 사람은 나와 잘 맞는 사람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 등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먼 사람이나 혹은 멀리 있기를 바라는 사람은 나와 무엇인가 안 맞는 이들입니다. 생각도 다르고, 말하는 습관도 다릅니다. 물리적 거리는 가깝지만, 마음의 거리는 멀리 있는 사람입니다.
먼 데 있는 사람이나 가까이 있는 사람 모두 한 성령 가운데서 화평 가운데로 나아가게 된다는 말씀은 <이사야서> 57장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먼 데 있는 사람과 가까운 데 있는 사람에게 화평을 전한 것은 <이사야> 57장 19절 말씀이 성취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57장 20절 이후를 보면 정반대로 악인을 설명합니다. 의인은 화평을 누리고 더 나아가 기쁨을 누립니다. 그러나 악인은 평화(평강)가 없습니다.
“‘그러나 악인들은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와 같아서 잠잠할 줄 모르고 진창과 진흙을 토해낼 뿐이다. 악인들에게는 평화(평강)가 없다’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사 57:20~21).
악인은 평화(평강)가 없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평화(평강)이 있습니다. 의의 길로 가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 평화(평강)이 흩어지지 않습니다. 그 결과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기쁨은 평화(평강)의 절정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누리고 있다는 것은 평화(평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쁨이 무엇입니까? 의롭게 된 자가 하나님과 관계에서 평화(평강)을 누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진정한 기쁨이 찾아옵니다.
기쁨의 완성 예수님,
다른 사람, 나
“그리스도를 이렇게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롬 14:18).“우리 강한 사람들은 마땅히 연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감싸 주고 자기가 기뻐하는 대로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각 사람은 이웃을 기쁘게 해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록되기를 ‘주를 욕하는 사람들의 그 욕이 내게 미쳤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롬 15 1~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 다음 이웃을 기쁘게 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는 기쁨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조이선교회’가 기쁨에 대한 명확한 해설을 알려줍니다. 영어로 조이(Joy)를 해설하면 ‘Jesus First, Other Second, You Third’입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다른 사람이고, 나를 가장 마지막에 둘 때 기쁨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이웃을 기쁘게 할 때 나의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디딤돌이 되는 신앙은 언제나 기쁨이 충만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연약함을 기다려 주시고 인내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강하게 세워질 수 있도록 위로하고 격려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모퉁이 돌이 되심으로 우리의 디딤돌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에게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같은 뜻을 품게 하시고 한마음과 한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롬 15:5~6).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걸림돌이라 아니라 디딤돌이 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 다음 이웃을 기쁘게 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는 기쁨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조이선교회’가 기쁨에 대한 명확한 해설을 알려줍니다. 영어로 조이(Joy)를 해설하면 ‘Jesus First, Other Second, You Third’입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다른 사람이고, 나를 가장 마지막에 둘 때 기쁨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이웃을 기쁘게 할 때 나의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디딤돌이 되는 신앙은 언제나 기쁨이 충만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연약함을 기다려 주시고 인내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강하게 세워질 수 있도록 위로하고 격려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모퉁이 돌이 되심으로 우리의 디딤돌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에게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같은 뜻을 품게 하시고 한마음과 한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롬 15:5~6).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걸림돌이라 아니라 디딤돌이 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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