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전체 맥락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로마서 12장부터 16장까지 말씀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들의 실천에 관한 교훈입니다. 전체 주제 말씀은 12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롬 12:1).
우리 몸을 영적 예배로 드리고,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모습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의 삶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1장부터 11장까지 말씀의 주제는 로마서 1장 16~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 돼 믿음으로부터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로마서 12장부터 16장까지 주제는 12장 1절의 “영적 예배자로 드려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에서 13장 전반부까지 말씀에 나오는 영적예배자의 삶이 무엇입니까? 거짓 없는 사랑으로 선한 일에 힘쓰는 삶,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 국가 일원으로서 올바른 시민으로 살아가는 삶 등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영적 예배로 드려지는 삶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삶’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애쓰지 마십시오”(14절).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는 게 복음적인 신앙의 본질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옷이 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형벌을 담당하셨을 때 그분을 믿는 모든 이들은 그분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함께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옛사람이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 있는 부활의 생명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그분의 의로움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단어로 표현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옷이 되신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롬 12:1).
우리 몸을 영적 예배로 드리고,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모습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의 삶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1장부터 11장까지 말씀의 주제는 로마서 1장 16~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 돼 믿음으로부터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로마서 12장부터 16장까지 주제는 12장 1절의 “영적 예배자로 드려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에서 13장 전반부까지 말씀에 나오는 영적예배자의 삶이 무엇입니까? 거짓 없는 사랑으로 선한 일에 힘쓰는 삶,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 국가 일원으로서 올바른 시민으로 살아가는 삶 등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영적 예배로 드려지는 삶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삶’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애쓰지 마십시오”(14절).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는 게 복음적인 신앙의 본질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옷이 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형벌을 담당하셨을 때 그분을 믿는 모든 이들은 그분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함께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옛사람이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 있는 부활의 생명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그분의 의로움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단어로 표현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옷이 되신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떤 옷을 입는다는 게 우리의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특징입니다. 지구상 그 어떤 존재가 옷을 만들어 입습니까? 어떤 동물이 제작된 옷을 입습니까? 모든 생물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하지만, 인간만이 옷을 만들어 입습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이 옷 아닙니까?
성경이 타락한 인간과 회복된 인간을 옷과 관련해서 표현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죄의 수치심과 두려움과 부끄러움 속에 있을 때 가장 먼저 제작한 것이 옷입니다. 무화과나무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옷이 필요했던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옷을 집어 던지고 나체주의로 살면 죄를 극복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옷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나뭇잎으로 만든 옷을 벗기시고, 가죽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무화과나무잎으로 만든 옷을 입은 그들에게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히신 것은 영구적으로 좋은 옷을 입히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가죽이 생기려면 한 생명이 죽어야 합니다. “생명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어야 내 앞에 합당하다”는 것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한 생명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옷이 바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덧입혀지는 예수 그리스도 의의 옷입니다.
성경이 타락한 인간과 회복된 인간을 옷과 관련해서 표현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죄의 수치심과 두려움과 부끄러움 속에 있을 때 가장 먼저 제작한 것이 옷입니다. 무화과나무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옷이 필요했던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옷을 집어 던지고 나체주의로 살면 죄를 극복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옷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나뭇잎으로 만든 옷을 벗기시고, 가죽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무화과나무잎으로 만든 옷을 입은 그들에게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히신 것은 영구적으로 좋은 옷을 입히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가죽이 생기려면 한 생명이 죽어야 합니다. “생명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어야 내 앞에 합당하다”는 것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한 생명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옷이 바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덧입혀지는 예수 그리스도 의의 옷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마지막 때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표현할 때 “흰옷을 입은 큰 무리들”이라고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백성들은 어린양의 피로 그 옷을 씻어 흰옷을 입은 이들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옷을 씻으면 빨갛게 물들지 어떻게 흰색이 되느냐?”고 따지면 안 됩니다.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어린양의 피로 죄를 씻음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서게 된 상태를 ‘흰옷을 입은 자’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옷이 필요합니다. 육체적인 옷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영적인 옷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반드시 옷이 필요한데,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가죽옷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고, 어린 양의 보혈이고, 죽음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의의 옷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받아들이기
<마태복음> 22장을 보면 왕이 초대한 결혼잔치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는 왕이 초대한 결혼잔치와 같다”고 말씀하시고 그 상황을 예로 들어주셨습니다.
왕이 결혼잔치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초대받은 사람들이 오지 않았습니다. 왕은 결혼잔치를 포기하지 않고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혼잔치에 온 사람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쫓아냈다는 비유입니다. 왜 왕은 그 사람이 옷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쫓아냈습니까? 이 비유는 당시 왕이 초대한 잔치에는 합당한 예복을 입는 습관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아무리 길거리에서 갑자기 초대를 받았을지라도 왕의 여는 잔치에서는 반드시 왕국이 정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왕의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이제 당신의 옷을 벗고 이 잔치에 합당한 옷을 입으라”고 할 때 “내가 왜 옷을 벗어야 합니까? 나는 결코 벗을 수 없습니다”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국가를 대표하는 지도자가 초청한 모임에서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 옷을 입어야 한다면 그 옷을 입는 게 일종의 기쁨이요 축하입니다. 그것이 예입니다. 왕이 초대한 사람 중에 옷을 갈아입는 것 자체를 거부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반항이요, 불순종입니다.
왕이 결혼잔치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초대받은 사람들이 오지 않았습니다. 왕은 결혼잔치를 포기하지 않고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혼잔치에 온 사람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쫓아냈다는 비유입니다. 왜 왕은 그 사람이 옷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쫓아냈습니까? 이 비유는 당시 왕이 초대한 잔치에는 합당한 예복을 입는 습관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아무리 길거리에서 갑자기 초대를 받았을지라도 왕의 여는 잔치에서는 반드시 왕국이 정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왕의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이제 당신의 옷을 벗고 이 잔치에 합당한 옷을 입으라”고 할 때 “내가 왜 옷을 벗어야 합니까? 나는 결코 벗을 수 없습니다”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국가를 대표하는 지도자가 초청한 모임에서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 옷을 입어야 한다면 그 옷을 입는 게 일종의 기쁨이요 축하입니다. 그것이 예입니다. 왕이 초대한 사람 중에 옷을 갈아입는 것 자체를 거부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반항이요,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천국으로 초대하실 때 단 한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의의 옷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준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우리의 옛 옷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잎으로 만든 옷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드신 의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은 고통이 아닙니다.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과 능력인지를 아는 사람은 육신의 일을 도모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욕을 추구함으로 얻게 되는 즐거움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 즐거움, 축복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빚진 자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으로 옷을 입고 살면서 새롭게 빚어지면 두 가지 성품이 나타납니다. 첫째, 사랑의 빚진 자로 살아갑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누구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8절).
사랑을 갚아야 할 ‘빚’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이 말씀에 비춰보면 “서로 빚을 갚으라”는 의미가 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는 ‘사랑은 갚아야 할 빚이고, 아무리 갚아도 갚을 수 없는 빚’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빚은 결코 끝나는 날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사랑할 만큼 했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더이상 사랑할 의무가 없어”라고 말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 “나는 할 만큼 다 했어. 더는 사랑이 없어. 더는 줄 사랑은 없어”라고 말하는 부모가 있다면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모습은 빚진 사람 같습니다. 주고 또 주고도 또 못 줘서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의무감이 아니라 주고 또 줘도 더 주고 싶은 빚과 같은 마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에게는 사랑의 빚진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십자가를 통해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것은 아무리 갚아도 깊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진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누구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8절).
사랑을 갚아야 할 ‘빚’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이 말씀에 비춰보면 “서로 빚을 갚으라”는 의미가 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는 ‘사랑은 갚아야 할 빚이고, 아무리 갚아도 갚을 수 없는 빚’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빚은 결코 끝나는 날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사랑할 만큼 했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더이상 사랑할 의무가 없어”라고 말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 “나는 할 만큼 다 했어. 더는 사랑이 없어. 더는 줄 사랑은 없어”라고 말하는 부모가 있다면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모습은 빚진 사람 같습니다. 주고 또 주고도 또 못 줘서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의무감이 아니라 주고 또 줘도 더 주고 싶은 빚과 같은 마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에게는 사랑의 빚진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십자가를 통해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것은 아무리 갚아도 깊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진 것입니다.
여러분, 죄는 세상에서 가장 비쌉니다. 죄가 고귀하고 가치 있다는 게 아닙니다. 그 대가가 예수님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들의 죽음이기에 죄가 가장 비쌉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그 대가를 스스로 지불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빚을 지었습니다. 죄를 범했다면 형벌을 내리고 끝내면 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 죽으셔야 할 의무가 없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마땅히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 마땅히 죽어야 하는 건 우리입니다. 죽을 의무가 없는 분이 왜 죽으셨습니까? 빚진 마음입니다. 그 빚진 마음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사랑에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슨 빚을 졌습니까? 사랑하셔서 창조하셨는데 배신하고 불순종한 이들에게 하나님이 무슨 빚을 지셨기에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십니까? 빚진 마음입니다. 참된 사랑은 빚진 마음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주고 또 주고도 더 주고 싶은 강렬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순간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는 순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집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으로 옷 입은 사람들은 늘 사랑의 빚진 자로 살아갑니다. 자기 자녀, 가까운 사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심지어 원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때로 예수님 믿는 삶이 고통스럽습니다. 예수님 안 믿는 사람들은 원수는 안 보면 되고, 복수하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용서에 대한 마음이 사랑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힘듭니다. 용서해야 하는 사랑의 빚진 마음이 원수 앞에서도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용서하지 못해서 괴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빚진 마음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빚으로 살아갑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8b, 10b).
왜 사랑의 빚진 자가 되어 살아갈 때 율법을 완성하는 것일까요? 율법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무엇인가로 채워져야 합니다. 사랑만이 그것을 채웁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라고 하는 계명과 그 밖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이 모든 계명들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이 말씀 가운데 다 요약돼 있습니다”(9절).
율법은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돼 있습니다. 왜 해야 하고, 왜 하지 말아야 합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왜 간음하지 말아야 합니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의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도둑질하지 말고, 왜 탐내지 말아야 합니까? 그것이 이웃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이웃에게 거짓을 증거 할 리가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할 리가 없습니다. “하라”와 “하지 말라”는 율법의 내용을 모두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하나님의 사랑의 빚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율법을 결코 어기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로서 사랑의 빚진 마음이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8b, 10b).
왜 사랑의 빚진 자가 되어 살아갈 때 율법을 완성하는 것일까요? 율법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무엇인가로 채워져야 합니다. 사랑만이 그것을 채웁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라고 하는 계명과 그 밖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이 모든 계명들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이 말씀 가운데 다 요약돼 있습니다”(9절).
율법은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돼 있습니다. 왜 해야 하고, 왜 하지 말아야 합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왜 간음하지 말아야 합니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의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도둑질하지 말고, 왜 탐내지 말아야 합니까? 그것이 이웃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이웃에게 거짓을 증거 할 리가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할 리가 없습니다. “하라”와 “하지 말라”는 율법의 내용을 모두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하나님의 사랑의 빚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율법을 결코 어기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로서 사랑의 빚진 마음이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옷을 입고 삽니다”
둘째, 그리스도 옷 입은 자들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옷을 입고 삽니다.
“여러분이 이 시기를 알고 있는 것처럼 벌써 잠에서 깨어야 할 때가 됐습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11절).
구원의 세 가지 시제 중에서 마지막 단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의롭게 되었고, 거룩하게 되어가고 있고,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와 연결이 되어 있고, 그것을 ‘낮이 가까이 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대의 악함이 어둠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가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잠자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범하고, 어둠의 일들을 행하는 것은 밝은 빛이 임할 때가 올 것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나쁜 짓을 불 꺼놓고 하고, 어둠 속에서 하지 않습니까? 어둠 속에서 많은 은밀한 나쁜 일들이 일어납니다. 어둠이 계속될 거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어둠의 일들을 계속하도록 잠들게 만든 것입니다.
구약의 예를 보면 요나가 불순종해서 니느웨로 가라는 말씀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풍랑을 일으키셨는데, 그 배 속에서 요나는 잠자고 있었습니다. 그 잠은 정말 피곤해서 자는 잠이 아닙니다. 불순종한 영혼이 하나님이 주시는 경고를 무시할 때 드는 잠입니다. 이 시대 수많은 잠자는 영혼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코로나19 팬데믹, 전쟁의 위협, 지진의 발생 등 여러 종말의 징조로 풍랑을 일으키셔서 돌아오라고 외치고 계시는데 잠자고 있습니다. 이 시대 악한 세력들이 사람들이 잠자게 하고 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의 일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동합시다.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고 음행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애쓰지 마십시오”(12~14절).
그냥 옷이 아닙니다. 갑옷입니다.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야 하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냥 옷이 아니라 전투복입니다. 악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우리는 기상나팔 소리를 듣고, 군사들이 전투에 출정할 때처럼 무기를 챙기고,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전쟁이 났는데 잠옷 입고 나가 싸우는 군사는 없습니다. 전쟁터에 나가서 “전투화가 너무 무겁습니다, 소총이 너무 무겁습니다, 전투복이 너무 무겁습니다”라고 불평하는 군사는 없습니다. 군사는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빛의 갑옷을 입지 않으면 우리는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이 시대 엄청난 문화를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빛의 갑옷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보시기 원하시는 것만 보는 것이요, 듣기 원하시는 것만 듣는 것이요, 예수님이 말하기 원하시는 것만 말하는 것이요, 예수님이 생각하기 원하는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함께 깨어 기도하자”고 요청했는데 제자들은 잠들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긴박하게 깨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잠들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두려워 도망했고, 엉뚱한 짓을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신학자요 지도자였던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말씀이 변화시켰습니다. 그의 고백록을 보면 노래가 반복되는데 그 내용은 ‘톨레 레게(들고 읽어라)’입니다. 저런 노래가 있었나 생각하다가 그것은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성경을 펴서 가장 처음 읽은 말씀이 로마서 13장 13~14절입니다.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고 음행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애쓰지 마십시오.”
이 말씀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임해서 그가 변화되었습니다. 교회 지도자가 되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독교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아구스티누스에게 임했던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랑의 빚진 자로 살아가고, 빛의 갑옷을 입고, 사랑과 거룩의 옷을 입고, 마지막 때에 잠자는 성도가 아니라 깨어 있는 성도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의 옷이 되게 하셨음을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사랑의 옷을 입고, 거룩의 옷을 입고,
마지막 때 승리하는 우리 모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살아계신 하나님,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의 옷이 되게 하셨음을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사랑의 옷을 입고, 거룩의 옷을 입고,
마지막 때 승리하는 우리 모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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