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더 깊이 사랑하고, 확신하며,
믿음 위에 굳게 서십시오. 복음이 아닌 것을 분별하십시오.”
복음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한 시대 사람들의 사상도 아니요, 어느 지혜자의 철학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시고, 그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의롭게 하시며, 성령께서 우리에게 부활의 생명을 주시는 복음은 사람이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의 뜻과 지혜가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름 받은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이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강조하며 서신을 시작합니다. 오직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은 것이요, 그분에게 직접 배운 것이요, 그분으로부터 받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진리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여러분, 복음 외에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배우고, 듣는 소식들은 누군가 말한 것을 보완하고, 개선하고, 반박하는 어떤 사상의 흐름 속 지류입니다. 흘러가는 근원적인 사상들이 있습니다. 동서양의 많은 철학과 사상에 기초해서 많은 것들을 배웁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부활의 복음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오는 생각에 기초한 것이라면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어떻게 사람을 바꿀 수 있고, 사람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생각도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오직 인간을 창조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를 용서하시며, 그분의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 하십니다. 성령님의 임재하심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기쁜 소식은 세상의 어떤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복음이고, 어떤 시대와 문화에 전해져도 변하지 않는 복음입니다.
세상의 종교들은 한 시대만 지나면 변질됩니다. 한 나라와 대륙만 거쳐도 변질됩니다. 누군가의 생각이 더해지고, 그 생각을 왜곡해서 발전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수많은 도전과 공격에도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짜 진리는 타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명확하게 깨닫는 것은 바울의 서신서들을 통해서입니다. 물론 베드로서나 요한 서신을 통해서도 복음을 깨닫는 구절이 있지만, 복음을 전체적, 종합적, 체계적, 논리적으로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바울의 서신들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어느 누구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오직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계시를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진짜 진리는 타협할 수 없습니다. 진짜 진리는 배타적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예배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분입니까? 아닙니 다.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협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이 사실이고, 진리이기에 타협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과학과 수학으로 증명된 법칙에는 일체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1+1=2입니다. 다른 답이 없습니다. 절대적 진리는 타협이 없습니다. 사실 사도들은 구약의 율법에 익숙해진 상태를 벗어 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에게 계시를 주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강렬한 계시를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체험을 주심으로 우리에게 복음의 계시를 전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전하는 것은 “다른 복음”이라고 강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성품이 배타적이거나 교만한 것과 상관없습니다.
“성경으로 세상을 봐야 바로 보입니다”
역사상 수많은 사람이 복음을 왜곡하려 했습니다. 갈라디아교회에 나타난 모습 이면에는 유대 율법에 익숙했던 유대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모세의 율법을 더해서 행위로써 믿음을 보완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런 시각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장 심하게 나타난 때가 중세 교회입니다. 로마 가톨릭도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오직 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행위와 선행으로 보완해야 한다면서 면죄부를 만들고, 연옥이라는 교리가 나온 것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함으로 왜곡된 교회의 암흑시대를 가져온 것입니다. 당시 중세 교회가 갈라디아서를 정확하게 읽었더라면 그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가 “나는 갈라디아서와 결혼했다”고 말할 정도로 이 말씀을 사랑한 것입니다. 복음을 변질시키 는 율법주의자들이 중세 교회를 장악한 것입니다.
이 시대에도 교회 스스로 만든 법칙, 규칙, 절차 등을 하나님 말씀보다 중요하게 여기면 또 다른 율법주의가 됩니다. 한국 교회에도 율법주의적인 신앙이 여전히 내려오고 있습니다. 복음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헬라시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던 사상들이 있었습니다. 이원론입니다. 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소위 영지주의입니다. 육을 악하다고 여기고, 영적인 지식을 선하다고 여기는 영지주의의 영향을 교회가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는 성육신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요한 서신에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마다 적그리스도다”라며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에 대항하며 요한 서신을 쓴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난과 기근에 허덕일 때 예수님이 수천 명을 먹이시고 병을 고쳐주신 측면만 복음이라고 전하고, 고통과 아픔 속에서 자신을 내려놓는 십자가의 희생을 간과한 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문제를 해결하는 측면만 강조하는 것을 ‘번영 복음’ 이라고 합니다. 마치 예수님을 요술 방망이처럼 이용하는 복음 또한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남미에서 시작된 해방신학은 예수님을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로 대표되는 기득권에 저항하며 사회 정치 혁명을 이룬 혁명가로 채색해서 세상의 계급 해방을 추구하는 분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받는 것은 사회 계층에 변화를 이루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구분해서 사회 혁명을 이루는 것으로 복음을 왜곡시킵니다. 복음을 사회 이론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복음을 요술 방망이 처럼 만드는 것입니다. 복음을 헬라 사상에 내어주는 것입니다. 복음을 율법주의에 내어 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른 복음, 변질된 복음입니다.
이러한 다른 복음들이 한국 기독교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역사 속에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율법주의, 헬라이원론주 의, 계급혁명적인 사회주의, 자기 문제를 해결하고 부를 가져다주는 번영주의 등에 복음이 오염되어서 예수님을 믿지만 순전한 복음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고, 그분의 부활하심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며, 성령님이 내 안에 임재하셔서 영원한 부활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는 순수한 복음으로 믿음을 세우는 일을 게을리하면 시대의 사상과 흐름에 휩쓸립니다.
이 시대를 뒤덮고 있는 가장 큰 왜곡된 사상은 진화론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듣고, 보고, 판단하고, 계획하고, 추진하는 모든 기능은 하나님께서 넣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더 완전한 인간을 만드시기 위해서 하등 피조물들을 인간의 통치 대상으로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심지어 진화론적 시각으로 성경을 봅니다. 구약은 덜 발전한 책이고, 신약은 더 발전한 책이라고 합 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열등한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진화된 더 성숙한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마저 진화하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을 ‘과정 신학’ 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세속화의 거센 물결, 인본주의, 유물론, 진화론 등으로 사상은 변하지만, 복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생각으로 성경을 보려고 하지 말고, 성경으로 세상을 봐야 바로 보입니 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사람에게서 배운 것 이 아니다”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 주제는 바울이 사람들에게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고, 순전한 하나님의 진리이기에 이 복음 위에 바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회심 이전에 어떤 상황이었는지, 회심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 이후 행적을 자세하게 소개함으로써 복음을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전해주려는 것입니다.
첫째, 사도 바울은 회심 이전에 박해자였습니다.
유대교에 심취해서 교회를 핍박하는 잘 못된 행위를 했습니다. 누구든지 지난날의 잘못을 말하는 것은 고통스럽고 반가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이 교회를 핍박하는 박해자요, 복음의 훼방자였다는 것을 말하는 이유는 자신 같은 박해자를 변화시켜서 증거자로 바꾸는 복음이야말로 사람이 만들어 낸 사상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어떤 사상이 그 사상을 반대하 고 핍박했던 사람을 증거자로 바꿉니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어떤 바리새인보다 열정적으로 교회를 핍박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할 때 사울의 이름이 나옵니다. ‘사울’은 히브리식 발음이고, ‘바울’ 은 헬라식 발음입니다. 필요에 따라 유대식 발음으로는 사울, 헬라식 발음으로는 바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바울은 스데반이 순교하게 만든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었기에 그 이름이 나왔습니다.
스데반 집사 순교 이후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흩어졌습니다. 바울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흩어진 사람들까지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메섹까지 쫓아가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250km, 일주일이나 가야하는 그 먼 거리를 쫓아가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주도적이었고 열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이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강렬한 빛과 함께 부인할 수 없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너는 나의 택한 그릇이다”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삶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바울을 왜 부르셨을까요? 그가 가 장 강력한 박해자였기 때문입니다. 가장 강력한 박해자마저 전도자로 바꾸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둘째, 바울이 회심할 때 상황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계시하시고 알려주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고 파괴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조상들의 전통에 대해서 열성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모태로부터 나 를 은혜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나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을 내 안에 나타내셨습니다”라 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을 내 안에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때 나는 사람들과 의논하지도 않았고”(16절). 하나님의 아들, 곧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 안에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강렬한 빛과 음성을 듣는 사건으로만 만난 것이 아니라 그 이후 바울 안에 부활하신 주님이 임재하셔서 알려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교훈해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어둠에서 빛이 비치라’ 고 명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셨기 때문입니다”(고후 4:6).
여러분, 복음을 세상적인 기준으로 이해하려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을 어떻게 과학으로 증명합니까? 죽음에서 부활한 사건을 어떻게 생명공학이 증명합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에게 임할 이 사건을 어떻게 환경공학이 설명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창조와 십자가, 부활과 영원한 생명, 세상에 대한 심판은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빛을 비춰 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임재하셔서 깨닫게 하심으로써 믿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그 역사를 지금도 이루고 계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복음을 깨달아 알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잘 나서 된 것이 아닙니다. 빛을 비춰 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임재해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 다.
“복음 외에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셋째, 사도 바울 회심 이후 여정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곧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되돌아갔습니다”(17절).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바울이 어디론가 갔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 누구와도 교제하지 않고 홀로 있었습니다. 3년 동안 바울은 깊은 묵상과 기도 속에서 주님에게 복음을 직접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구약의 모든 성취로써 오신 예수님. 역사의 중심 되시는 예수님. 하늘과 땅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데 얼마나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까? 3년 동안 바울은 예수님께 직접 일대일 제자양육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이 3년을 보내고 15 일 동안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3년 뒤 나는 게바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그와 함께 15일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 가운데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는 어느 누구도 만나지 않았습니다”(18~19절).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났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아마 만나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들이 아는 바울은 스데반 집사를 죽게 한 사람이고, 다메섹까지 쫓아가서 예수님 믿는 자를 끌어 오려고 한 핍박자이자 방해자였기 때문에 마음이 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을 받아들이지 않는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정통 유대인과 바리새인에게는 변절자, 성도들에게는 박해자가 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 후 나는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내 얼굴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21~22절). 바울이 유대 여러 회당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기에 정통 유대 바리새인들이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이사랴를 거쳐 다소로 가야 했습니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이방 도시입니다. 바나바가 데리러 올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유대 교회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배우지 않았고, 어떤 사람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에게 직접 계시를 받은 복음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을 기억하라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전한 복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위대하다는 것이 아니라 위대하신 주님이 직접 말씀하셨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은 순전합니다. 바울을 통해 주어진 복음을 더 깊이 묵상하고, 깨닫고, 주님께 질문하십시오. 이 진리를 확신하는 성도들에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더 깊이 사랑하기를 축원합니다. 복음을 확신하고 믿음 위에 굳게 서기를 축원합니다. 복음이 아닌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을 얻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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