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복음의 진리대로 바르게(갈라디아서 2:1~14)

새벽지기1 2021. 10. 31. 07:15

“복음의 진리를 왜곡하는 어떤 것에도 저항해야 합니다.

진리를 바르게 믿는 ‘저항의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의 진리대로 바르게 믿고 살아가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은 복음이 주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자유가 아닙니다. 마땅히 살아가야 하는 모습대로, 하나님의 진리대로 살아가는 자유입니다. 죄 가운데 타락한 우리의 자유 의지는 선을 행하고 싶어도 행하지 못합니다. 죄와 육신의 종이 된 상태이기 때문에 자유의지조차 제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영혼의 자유 의지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의지로 변합니다. 참된 자유는 창조된 목적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아가는 자유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허무는 모든 것들을 거부하는 진리 안에 살아가는 자유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신 자유입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자유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성령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자유가 우리 안에 있는지가 복음의 진리대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기준입 니다. 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떠나고, 복음의 진리대로 믿지 않고, 믿음의 내용에 불순물이 섞이고, 복음의 진리가 왜곡될 때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또다시 죄의 종으로 돌아갑니다. 율법의 노예가 됩니다. 한 시대 사상의 희생자가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덧입혀 주시는 의가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갈라디아교회에 몰래 들어와서 복음을 변질시킨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했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구약시대부터 지켜온 율법을 본 적이 없기에 와닿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형태의 율법주의를 끊임없이 만듭니다. 복음 외에 무엇을 더하면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이 시대 주류 사상은 인본주의, 무신론, 유물론, 진화론, 과학주의 등입니다. 이 사상들은 하나님 복음의 진리를 대체하려고 하고, 훼손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복음이 주는 자유를 잃어버리고 다시 종으로 만들어버리는 흐 름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지, 과연 복음의 진리대로 바르게 믿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믿음의 방향이 중요 합니다. 복음이 나를 자유롭게 했고, 복음이 나를 살렸고, 나는 복음의 진리대로 살려고 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지켰던 것은 구약에 하나 님이 주신 율법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율법 해설서로 만든 규칙들이었습니다. 순수하게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아닙니다. 인간들의 생각과 해설과 첨가된 규칙들을 지키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의롭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익숙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때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조차 익숙한 것인지 아닌지로 결정합니다. 익숙하면 옳은 것이고, 익숙하지 않으면 틀린 것이 됩니다. 익숙한 것이 옳은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잘못된 믿음으로 흐를 위험성이 많습니다.

 

디도를 데리고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

 

사도 바울은 복음의 진리대로 바로 믿고 전하려는 열심이 가득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 장에서 세 가지 사건을 통해서 바울이 복음의 진리대로 바르게 믿고 전하려는 헌신을 전해 줍니다. 첫째, 바울이 헬라인 디도를 데리고 두 번째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바울이 첫 번째 예루살렘을 방문한 이후 14 년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다시 방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더라면 바울은 예루살렘을 별로 가고 싶어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바울에게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꿈을 꾸었습니다. 탁월한 율법 학자가 되려고 열심을 보였습니다. 그 열심이 대제사장의 명령을 받드는 중요한 위치에까지 오르게 했습니다. 바리새인으로서는 성공적인 길을 걷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은 복음을 가장 완강하게 저항하고, 자신을 죽이려 했던 유대인들로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방문하기 싫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을 다시 방문하라고 하신 이유는 바울이 이방을 다니며 전하는 복음을 예루살렘도 다시 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 등 여러 사도가 있었지만 익숙한 율법에 의해서 순전하고 온전한 복음을 진리대로 바르게 믿는 신앙생활이 어려웠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나온 율법주의적인 사람들이 바울이 세운 교회들을 다니면서 바울의 권위를 무너뜨리려 공격하고, 바울이 전한 복음을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유명하다는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만났습니다. ‘ 유명하다’는 것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분명하고, 바르게 다시 전했습니다.

 

여러분, 오랜 시간 신앙생활 하면서 “복음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초신자나 듣는 것”이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조차 빌립보서에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하려 한다. 그 능력을 체험하려고 한다. 나는 아직 붙잡은 것이 아니다. 붙잡으려고 쫓아간다”고 말했습니다. 복음이 불확실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지식으로 깨 닫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삶을 체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 예배, 봉사에 익숙해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교회 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느냐가 신앙을 보증해 주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 바울이 다시 가서 복음을 전해야 했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내가 믿는 복음이 무엇인지 기도하면서 체험하고, 확신하고, 누리고, 전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바울이 헬라인 디도를 데리고 갔습니다. 매우 의도적입니다. 디도는 바울이 전도해서 회심한 사람입니다.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라 불렸습니다. 바울의 모든 여행에서 중요한 동역자 역할을 했습니다. 디도는 이방인이었습니다. 할례받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할례를 강요하거나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에게 유대인처럼 되는 것을 권유할 리 없습니다. 문제는 예루살렘교회가 디도를 어떻게 받아들였느냐입니다. “나와 함께 있는 디도는 그리스 사람이었지만 억지로 할례를 받도록 강요하지 않았습니다”(3절). 바울이 전한 복음이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 잘 전달되었습니다. 그런데 억지로 강요하지 않았다는 단어의 이면에는 억지로 강요하지 않았지만, 할례를 받겠다면 굳이 말리지도 않겠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례로 바울의 또 다른 영적 아들 디모데는 할례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막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받으라고 강요한 것은 아니지만, 받겠다는 것을 막지 않고 허용해 주었습니다. 디모데가 마음이 유약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변 사람에게 불필요한 눈총을 받고 스트레스를 받느니 할례를 받아서 그것을 없애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할례를 받은 상태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할례의 흔적을 지워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일부러 할례를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할례를 받았든지 안 받았든지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고전 7:18~19). 이 말씀이 디도에게는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고, 디모데에게는 할례받는 것을 허용한 이유입니다.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수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수단이 아니라 인간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통로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이 그 율법을 지키는 과정을 거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양심이라는 기구도 있기 때문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수준이라면 그것을 행하면 죄이고, 저주 받아 마땅 한 것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균형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디도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은 것은 바울이 예루살렘을 다시 방문해서 전한 복음의 승리였습니다. 이것이 갈라디아교 회에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줬습니까? 그들은 마치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할례도 행하고,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이방인들에게 왜곡하고 있는데 그것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올바른 신앙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주요 사도들과 교제의 악수

 

둘째, 예루살렘을 두 번째 방문했을 때 주요 사도들과 교제의 악수를 나눴습니다. “기둥같이 여김받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정하고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청했습니다. 우리는 이방 사람에게로, 그들은 할례받은 사람 에게로 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다만 그들은 우리에게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 달라고 당부했는데 이것은 나 또한 힘써 행해 오던 일입니다”(9~10절). 예루살렘교회에서 기둥같이 여김을 받았던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입니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은 기둥 같은 지도자였습니다. 이 세 사람이 바울과 함께 간 바나바, 디도와 교제의 악수를 나눴습니다. ‘교제의 악수’ 는 일종의 관용어구입니다. 서로 토론과 대화, 심도 있는 의논을 통해서 긍정적인 합의에 이르렀을 때 ‘교제의 악수를 했다’ 고 부릅니다. 당시 긍정적인 합의가 이루어지면 오른손으로 악수하고, 부정적인 결말을 하면 왼손으로 악수했던 습관에 기초한 것입니다. 어떤 합의와 인정에 이르렀다는 뜻입 니다.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에게, 바울과 바나바와 디도가 이방인들에게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서로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유대인은 상종하지 않고, 베드로는 이방인을 상종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했을 때 언제나 회당에 먼저 갔습니다. 그 회당에 나오는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습니다. 구약의 역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대상은 주로 이방 세계였습니다. 그러므로 게바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루살렘을 거의 떠나지 않고 그 반경 내에서 주로 활동했습니다. 다닌 것은 주로 바울과 바나바, 디도였습니다. ‘교제 의 악수’는 바울과 바나바도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직접 권위를 부여받은 동등한 사도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갈라디아교회에 바울의 사도권을 공격하는 이들이 등장했습니다. 끊임없이 바울의 사도 권위를 무너뜨리고, 바울이 전한 복음을 훼손하려는 이들이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합의를 이루고 서로의 권위를 인정하는 ‘교제의 악수’를 행한 것이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것 또한 복음 전도의 효율성을 위해서 영역을 나누고, 업무를 분담함으로써 복음화에 힘쓰려고 했던 이들의 노력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왔던 선교사님들은 지역을 나눴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들이 마을 곳곳, 산속 깊은 곳까지 들어가서 중복되지 않게 효과적으로 사역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베드로의 위선을 책망

 

셋째, 안디옥에서 바울이 베드로의 위선을 책망합니다. “그러나 게바가 안디옥에 왔을 때 그에게 책망할 일이 있어서 얼굴을 마주 대하고 그를 책망했습니다. 게바는 야고보가 보낸 몇몇 사람들이 오기 전에 이방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오자 그는 할례받은 사람들을 두려워해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러자 다른 유대 사람들도 게바와 함께 위선을 행했고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휩쓸렸습니다.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대로 바르게 행하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게바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으로서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방 사람에게 유대 사람처럼 살라고 강요합니까?’ ”(11~14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왔습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있는 이방 사람들과 음식대접을 했을 것입니다. 식사하던 중에 예루살렘에서 야고보가 보낸 유대 그리스도 인들이 왔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슬그머니 일어났습니다. 율법적으로 살아가는 유대인들은 아무하고 식사 교제를 하지 않습니다. 교만입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처럼 되어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사람들이 예루 살렘교회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누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슬그머니 일어난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베드로와 함께 온 유대 사람들도 일어나고, 바나바까지 휩쓸려 위선을 행했습니다. 바울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베드로를 책망합니다. 복음을 진리대로 바르게 행하지 않는 것을 책망했습니다.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제자 중의 제자요, 사도 중의 사도요, 예루살렘교회의 기둥같은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사람이 교회에서 가지는 위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진리대로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가 더 중요했습니다. 베드로가 미칠 영향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지 못하고, 식사 자리를 슬그머니 피하는 베드로의 비겁한 모습이 복음에 합당하지 않다고 여긴 것입니다. 아마 갈라디아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엄청나게 놀랐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과 열정이 필요합니다. 바울의 열정이 나타난 사람이 마틴 루터입니다. 마틴 루터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고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규합해서 로마 교황청에 대항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로마 가톨릭에 철저히 순응하는 독일의 수사이자 성경 학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신약성경을 연구하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읽어보니 교황청의 모든 지침과 제도가 틀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복음의 진리대로 바르게 가르치기를 원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교황청에서 내려온 지침들을 보면서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틀린 가르침을 더이상 참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복음의 진리를 왜곡하는 교황청에 반박문을 내걸었습니다. 교황청은 발끈했고, 취소하라고 요구했고, 죽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이단으로 정죄하려 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복음의 진리만을 붙잡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당시 인쇄술이 발전했고, 루터의 글들이 인쇄술을 통해서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루터를 돕는 많은 이들도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의 진리만을 붙잡았을 때 하나님이 반드시 함께하셔서 한 시대를 새롭게 하고, 역사의 물꼬를 바꾸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바울이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율법주의적인 사람들에게 받은 공격과 비교할 수 없는 공격을 마틴 루터가 받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진리대로 바르게 믿고 살아가려는 루터가 승리해서 기독교가 새로워졌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을 ‘프로테스탄트’ (저항자들)라고 합니다. 복음의 진리에 바르지 않은 것에 대한 저항입니다. 이 저항 정신을 우리가 잃어버렸습니다. 복음의 진리대로 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저항이 있어야 합니다. 옛사람에 대 한 저항이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 사상에 대한 저항이 있어야 합니다. 마틴 루터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 반역적이고 완고한 것처럼 보인다 해도 기쁘다. 사랑은 양보한다. 그러나 믿음은 양보하지 않는다. 믿음에 대하여는 무적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 할 수 있으면 철강석보다 더 단단해야 한다.” 이 시대는 믿음을 너무 쉽게 세상에 내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양보하면 안 됩니다. 방송에 나온다고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잡한 공식을 가지고 책을 출판한다고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진리에는 양보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왜곡하는 어떤 것에도 우리는 저항해야 합니다. 첫 번째 프로테스탄트는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지키는 저항을 가르친 사람이 마틴 루터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바르게 믿고 전하려는 저항정신을 잃어버렸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상과 생각들이 복음을 무너뜨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바르게 믿는 ‘저항의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