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죽음으로 우리 죄를 처리하셨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 옛사람이 죽었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생명이 되셨습니다.”
믿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열심이 아닙니다. 태도도 아닙니다. 내용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어떤 분인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내가 믿는 대상이 어떤 분이고, 그분과 내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살아계신 인격체로 존재하시는 그분을 믿습니다. 세상 어떤 종교가 그들이 믿는 종교 지도자가 살아있다고 주장합니까?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종교간의 차이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그분에게 우리를 내어드리고, 전인격적으로 의뢰하고, 신뢰하며,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삶을 내세만 준비하는 것으로 오해하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영과 혼과 육으로 살아가는 모든 것이 믿음의 영역입니다. 믿음은 일주일에 한 번 예배당에 올 때 입고 오는 옷이 아닙니다. 모든 일상에서 역사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 믿음은 하늘과 땅에 걸쳐있고, 모든 시간과 존재와 관련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삶이 무엇인지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연합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고,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함으로 연합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님과의 연합’ 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님과 우리를 연합시키는 것입니다.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믿을 것을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세 단계 믿음을 요청받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시며, 인정하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한 출발입니다. 사도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했습니다. 베드로의 위선에 대한 책망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고, 그것을 다른 유대인들이 지적할까봐 걱정했습니다. 바울이 그것을 공격했습니다. 베드로의 위선을 책망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믿음을 확실히 해야 한다고 교훈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것을 알기에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인정받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16절). 베드로조차 율법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그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유대인들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도구로 착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을 통해서 의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것이 한편으로는 이해됩니다. 왜냐하면 모세 시대 이스라엘 백성 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내용을 보면 당시 다른 세계와 민족의 어떤 법전도 따라올 수 없는 탁월한 윤리적 체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법전 체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탁월하고 초월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보면 그 안에 사랑이 담겨 있고, 정의가 담겨 있고, 공의가 담겨 있고, 공정과 상식이 담겨 있습니다. 당시 어떤 법전에도 없었던 하나님이 주신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유대인들이 만든 것처럼 착각했고, 그것을 유대 민족이라는 민족주의와 선민의식을 강화하면서 국가주의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유대인처럼 되어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율법을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에 그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 민족을 창대하게 해서 이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시려는 계획입니다. 하나님이 그 민족을 택한 이유는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시는 선교의 목적이었 습니다. 유대 민족을 탁월하게 하려고, 그 민족을 돋보이게 하려고, 그 민족에게 주목하게 하려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자랑했고, 민족주의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으로 의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유대민족이 먼저 율법 앞에 서 보고,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죄인인지 깨닫고, 다른 족속들에게 알리라는 것입니다. 장차 오시는 예수님으로만 우리가 의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민족으로 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죽음이 너희를 구속했다”
“율법이 말하는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이는 모든 입을 다물게 하고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육체가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입니다”(3:19~20). 율법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고 스스로 해결할 길이 없는 위기 앞에 있는 인간들에게 메 아가 보입니다. 구원자가 보입니다. 우리를 대속하러 오신 예수님의 은혜가 보입니다. 철저하게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소망이 보입니다. 깊은 계곡에 빠진 사람들이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비전이 보입니다. 우리가 빠져 있는 죄의 늪에서 구원의 소망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습니다”(롬 3:24). 여기서 ‘구속’ 이라는 단어는 감옥에 잡혀가는 의미가 아닙니다. 노예제도가 있던 시대에 경제적으로 채무를 다 갚지 못하면 일정 기간 노예 생활을 하면서 해결하는 것이 일상적이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하면 몸으로 빚을 해결하는 상태로 있어야 했습니다. 그때 가장 가까운 친족이 대신 값을 지불해서 다시 자유롭게 될 때 그것을 ‘ 구속(redemption)’ 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가 ‘구속’ 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너희를 구속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당시 사람들은 너무 잘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 “다 이루었다”는 ‘ 두 지불되었다’ 는 뜻입니다. 구속의 죽음이라는 선언 니다.
2000년 6월경 미국 버지니아주에 한 법원에서 판결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판사 앞에 선 피고인은 청각장애인 부부였습니다. 월세를 갚지 못해서 집주인에게 고소를 당해 재판정에 섰습니다. 법의 논리대로 하면 마땅히 지불해야 할 월세를 체납했기 때문에 유죄가 선고될 수밖에 없습니다. 판사가 선고 직전 잠시 휴정하고, 자기 사무실에서 지갑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고소인의 변호사에게 그 부부가 내지 못한 월세를 대신 지불했습니다. 고소의 근원을 직접 해결하고 무죄를 선고했 습니다. 청각장애인 부부가 판사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한 적도 없습니다. 기대한 적도 없습니다.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판사가 자신을 희생함으로 비용을 지불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구속의 한 그림자 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심판받아 마땅한 우리에게 무죄가 선언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우리가 치러야 할 죄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선언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 속에 이것이 늘 살아있어야 합니다. 이것 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 신앙생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올 바른 관계에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봉사하고 활동해도 첫 번째 믿음의 내용이 무너지면 신앙이 무너집니다. 그런데 교회 역사를 보면 이것을 무너뜨린 사례가 너무 많습니다. 중세 교회가 그것을 무너뜨렸습니다. 로마 가톨릭이 그것을 무너뜨렸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무너뜨렸습니다. 가톨릭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믿음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가 더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 은혜의 믿음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죽음과 함께 우리 옛사람이 함께 죽었다!”
둘째, 예수님 십자가 죽음과 함께 우리의 옛 사람이 함께 죽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20절). 우리는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 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 라는 단어로 빠져나갈 가능성이 큽니다. 제가 주일 학교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입교를 위한 문답 을 할 때 주기도문을 암송했는지, 사도신경을 암송했느냐는 기본이고,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 죽으셨나요?”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저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정답을 말한 것 같은데 틀렸다고 했습니다.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만의 죽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 죽음의 효력을 누리고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존 스토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는 혼자 죽으신 것이 아니다. 반대로 믿음(내적)과 세례(외적)를 통해 그분과 연합한 모든 사람들은 그분의 죽음에 동참했고 그분과 함께 죽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십자가 죽음을 ‘세례’라는 단어로 설명했습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교인이 되는 의식이 아닙니다. 세례는 예수님과 함께 나의 옛사람이 죽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살아 남을 믿는 예식입니다. 세례는 나의 옛사람의 장례식입니다. 세례는 영어로 ‘baptism’ , 헬라어 ‘βαπτίζω(밥티조)’ 입니다. 밥티조는 ‘물에 잠기다’ 는 뜻입니다. 물에 잠기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물에서 다시 나올 때 살아남을 의미 합니다. 미국의 어떤 침례교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는 것을 듣고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당신을 죽인다.” 끔찍하지만 성경적입니다. 세례는 옛사람의 죽음을 설명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으로 그분과 연합한 사람이 됐다면 분명히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같은 부활로도 그분과 연합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해져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이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압니다. 이는 죽은 사람은 이미 죄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롬 6:5~7). 우리 죄를 대신한 예수님의 죽음이 나에게 능력으로 발생하기 위해서 필요한 믿음은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나의 옛 사람이 죽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나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죄에 대해 단번에 죽으신 것이요, 그분이 사시는 것은 하나님께 대해 사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산 자로 여기십시오” (롬 6:10~11). 마지막 단어가 중요합니다. “여기십시오.” 이것은 거짓을 사실로 만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속이다’ 입니다. 여기는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옛사람을 함께 죽인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 것이 여기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사실을 사실대로 여기는 것입니다. 사실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옛사람의 죽음이라는 것을 믿고 여길 때 그 죽음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죄로부터 유혹을 받고, 세상의 시험이 오면 사도 바울처럼 “나의 옛사람은 십 가에서 죽었다”고 선포하십시오. 믿음의 선포를 하면 모든 유혹이 떠나갑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나는 죄에 대하여, 율법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죽은 자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만의 죽음이 아니라 나의 옛사람도 함께 죽은 죽음이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나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믿는 것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한 믿음,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세 번째 단계로 나아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십니다.”
셋째,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에 이르는 단계입니다. “…이제 더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육체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20절). 세 번째 단계의 믿음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심을 믿는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요, 우리가 믿는 삶의 정체입니다. 그리스도는 죄 가운데 거하실 수 없습니다. 죄가 처리되어야 합니다. 나의 옛사람에 머무실 수 없습니다. 옛 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죽음에서 살아나신 부활의 생명이 새 생명으로 태어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실 때 새사람, 새 생명 가운데 임하십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옛사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죽었다고 여기고, 선포하며, 내주하시는 예수님을 날마다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자아실현이 아닙니다. 세상은 자아실현이 목표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실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온전히 사시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이것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실제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돕 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성령의 세례란 우리 안에 거듭난 새 생명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충만하게 임재하시는 체험입니다. 성령의 충만이란 계속 그 상태로 머무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은 그리스도의 충만이요,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안에 충만히 거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거하게 하시기를 빕니다”(엡 3:17).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나의 주님으로, 나의 구세주로, 나의 왕으로 온전히 사시도록 내어드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누군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내 안에 온전히 사시도록 초청하고, 받아들이고, 나의 옛사람이 죽었다고 간주하고, 믿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도록 내어드리는 믿음으로 나갈 때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연합은 예수님을 믿는 삶입니다. 도덕적으로 흠이 있는 사람과 도덕적 로 흠이 없는 사람을 보면서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만 틀린 말입니다. 도덕적으로 흠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선한 행위 그 자체가 참된 믿음의 증거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담과 연합된 삶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으로 소속을 바꾸는 것입니다. 아담의 몸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아담에게 속한 사람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뿐입니다. 우리의 소속을 바꾸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담과 연합된 삶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으로 바꾸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죽음으로 우리의 죄를 처리하셨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 옛사람이 죽었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임재하시는 생명이 되셨습니다. 이 신비로운 믿음의 삶에 우리가 초대를 받았습니다. 날마다 예수님과 연합된 삶으로 나아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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