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우리에게 세례를 주시는 분입니다
성령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십시오.”
사도 바울이 거짓된 가르침에 미혹된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책망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복음을 알면서도 복음에 합당하지 않게 행동하는 위선에 대해서도 책망했습니다. 바울이 스스로 재판자이자 심판자가 되어서 형제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통해서 전해진 순전한 복음이 초기교회부터 왜곡되어 전달되는 것에 대한 깊은 안타까움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훼손하는 사람과 그 이면에 있는 거짓된 영의 공격에 대한 단호한 책망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변질시키는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도록 교훈을 줌과 동시에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자신이 전한 복음이 무엇인지 상기시켜서 순전한 복음을 다시 기억하게 했습니다.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고 하신다는 소식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 도의 죽음과 함께 우리 옛사람이 죽음으로 죄, 율법, 세상에 대해 자유롭게 된다는 소식입니다. 복음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임재하셔서 우리 안에서 사시는 연합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으로 연결되고, 내 안에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는 사건은 오직 믿음과 은혜를 통해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믿음은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조차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깨닫지 못하고,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믿음 외에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행위를 자꾸 더하려고 합니다.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야만 믿을 수 있고, 그 보상으로 얻는 것이 믿음이라는 생각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 누린다는 것을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사단은 그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인간의 종교적 심성, 인간의 자기의를 추구하는 교만을 부추겨서 복음을 왜곡해서 받아들이도록 합니다. 바울이 그것을 단호하게 책망하고 교훈합니다.
율법의 행위를 지킴으로써입니까?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써입니까?
“오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여러분의 눈앞에 분명히 드러나 있는데 누가 여러분을 미혹했습니까? 여러분에게 한 가지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단 말입니까?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이제 와서 육체로 마치려고 합니까? 여러분은 그렇게 많은 고난을 헛되이 경험했단 말입니까? 정말 헛된 일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 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것이 여러분이 율법을 행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기 때문입니까?”(1~5절). 전체를 포괄하는 말씀이 3절입니다. “여러분이 성령을 체험한 것은 율법의 행위를 지킴으로써입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써입니까?”라고 질문합니다. 갈라디아교회가 생길 때 성령님의 뚜렷한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왜 육체로 끝내려고 하는가?”라고 묻습 니다. 여기서 ‘육체’ 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과 혼에 붙어 있는 타락한 본성을 바울은 ‘육체’ 라고 규정했습니다. 오직 믿음만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를 더해야 한다는 주장과 가르침은 육체에 속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육체는 성령을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이 육체는 두 가지 모습으로 성령님을 대적합니다. 첫째, 분명하게 죄를 짓게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서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죄를 범하게 함으로써 성령님을 대적하게 합니다. 둘째, 교묘합니다. 육체가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는 것으로 성령님을 대적합니다. 육체의 타락한 본성이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면 안타깝게도 죄의 세력이 됩니다. 성령의 임재하심 없이 육체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면 자기의를 추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이 아닌 쪽으로 흐르게 됩니다. 육체는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고, 하나님을 참 되게 예배할 수 없고,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도리어 자기 의와 위선과 교만과 자만에 빠집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임재와 인도하심이 아니라 스스로의 육체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면 그 열정이 우리를 삼켜버립니다. 이것을 ‘독이 있는 믿음’ 이라고 합니다. 분명히 열심을 가지고 헌신하고, 섬기는데 열심을 낼수록 관계를 깨뜨리고, 교회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죄의 세력이 되는 모순이 나타납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아이디어를 잘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봉사하고, 예배하고, 성령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를 때만 진실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육체 스스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육체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속이는 것은 사단의 전략입니다. 갈라디아교회와 성도들을 잘못 가르쳤던 이들이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고, 그들의 모습이 교회 역사에서 일어났습니다. 종교개혁 대상이었던 로마 가톨릭이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로마가톨릭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 인간의 행위와 공로를 더하려고 했습니다. 육체로 하나님을 섬기려 했기에 중세 교회에 비참하고 어두운 역사가 찾아왔습니다. 종교개혁은 매우 단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더하여 만들어 온 수많은 인간의 공로와 행위를 제하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말씀만 남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서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살아나셔서 높임을 받으셨고, 그분이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두 가지 중요한 단어로 소개했습니다. 첫째,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대속하시고, 구속하시는 주님으로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둘째,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입니다. 이 두 가지 소개가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입니다. 이 사이에 부활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그때까지 성령을 주시지 않았던 것은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요 7:39). 요한복음에서 ‘ 광을 받는다’는 단어는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성령을 주시지 않은 이유가 아직 영광을 받지 않아서라는 말을 뒤집으면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을 통과해야만, 죽음에서 부활하셔야만 성령을 주시는 분이 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증거한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영광 받으시고, 부활하셔서 높임을 받으신 그분이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 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의 믿음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끊깁니다. 나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만 믿는 믿음으로 충분하다고 가르치고, 인간의 행위와 공로를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육체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려 고 하기 때문에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빠졌던 문제에 빠지고, 종교개혁의 대상이 되었던 로마가톨릭의 문제에 빠집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에 빠지고, 이 시대 무기력한 교회 모습에 빠집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능력과 확신이 없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데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나타나지 않고, 사랑으로 하나 되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고, 다툼과 분열이 나타납니다. 인간 스스로 만든 규칙을 하나님 말씀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중세 교회처럼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기억하고 예루살렘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때 바람처럼 불처럼 임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사건이 나타났습니다. 오순절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높이 올리셔서 그 분의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높임 받으신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 우리에게 부어 주셨는데 지금 여러분이 보고 듣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행 2:33).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하나님께서 높이 올리셔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히시고, 그 높임 받은 예수께서 하시는 일은 약속하신 성령을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의롭다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십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 그리스도를 믿으면 성령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서 끝나면 안 됩니다. 그 믿음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어 져야 합니다. 우리가 약속된 성령을 받는 체험과 능력 가운데 거할 때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라는 단어에 대한 기억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그리스도’ 라는 단어 중에 어느 기억이 더 많습니까? 압도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일 것입니다. 교리적, 신학적 편견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높임 받으셔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 주시는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율법적인 신앙에 빠지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지 않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을 깨닫게 하려고 아브라함을 예로 듭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구약 역사에 나타난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을 설명합니다. 하나님 이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택하시고 섭리하신 사람이 아브라함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부터 이방 민족이 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을 말씀하셨고, 아들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온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온전히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과연 우리가 아들을 낳을 수 있을까?”라 고 생각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밖으로 불러내셔서 하늘의 수많은 별을 보여주시면서 “너의 자손이 이 별과 같이 많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창세기 15장 6 절에 처음 나옵니다.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는 말씀이 처음 나옵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믿음이 완성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시작일 뿐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믿음에서 출발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어디까지 인도하셨습니까? 창세기 22장에서 독자 이삭을 죽음에 넘기라고 하셨습니다. 이것 또한 받아들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계시와 기적으로 역사하신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자라서 독자 이삭을 죽음에 넘기로 순종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도 살리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비유로 말하자면 그는 이삭을 죽은 사람들로부터 돌려받은 것입니다”(히 11:19). 아브라함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습니다. 비유와 같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예표입니다. 우리 옛사람이 죽음에 넘겨질 때 하나님 이 우리를 다시 살리는 생명으로 임하신다는 것을 비유하시 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생애가 비유와 같은 사건입니다. 실제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믿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믿음의 단계라면 창세기 22장 믿음은 우리 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임재하셔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도록 허락하는 믿음입니다. 내어드리는 믿음입니다. 우리 옛사람을 온전히 십자가에 못 박고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가도록 자신을 죽음에 넘기며 살아가는 믿음 입니다. 성령님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
믿음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는 복
아브라함과 함께 우리가 받는 복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입니다. 둘째, 믿음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는 복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은 우리 옛 사람을 죽음에 넘기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임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복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고 우리도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14절). ‘성령의 약속’ 은 히브리어적인 표현입니다. 약속된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약속된 성령을 받는 믿음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삭을 내어드리는 믿음으로 연결된 것과 같은 믿음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 강조한 나머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끝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만 자랑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고,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그리스도의 충만한 능력을 덧입는 삶을 살게 하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끊으면 우리 육체는 끊임없이 성령을 대적하게 됩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합니다. 율법의 행위를 강조합니다. 그러면 율법의 저주 아래 다시 들어갑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율법의 저주 아래로 들어가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우리 신앙이 왜 능력이 없고, 율법적이 되고, 교회가 왜 능력을 잃어버립니까?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 믿고, 그분이 부활하셔서 높임 받으시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온누리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그리스도이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입니다.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성령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며, 그리스도와 연합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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