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갈라디아서 1:1~12)

새벽지기1 2021. 10. 17. 07:50

“복음 이외의 것이 무엇인지를 분석해 내고,

분별해 내고, 그것을 끊어내기를 바랍니다.”

 

사탄과 마귀가 교회를 공격할 때 언제나 양측면에서 공격합니다. 좌측에서는 교회를 핍박하고, 박해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대적하고, 악에 치우친 통치자일수록 교회를 핍박한 것이 역사 증거입니다. 우측에서의 공격은 복음을 변질시킴으로 교회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하는 전략입니다. 어느 시대든 주된 흐름이 있습니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창조질서를 거부하며, 인간이 주인이 되고 세상의 왕이 되려는 사상들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영지주의가 있었고, 이원론이 있었습니다. 또 진화론, 유물론 등 수많은 사상이 교묘하게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공격해 왔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하는 사람들, 심지어 신학자들과 목회자들까지 진화론적인 시각과 무신론적인 시각으로 성경을 바라보고, 세속주의적인 사상으로 복음을 왜곡하려는 흐름이 끊임없이 있었습니다.

 

사도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변질시키는 흐름이 세 가지 있었습니다. 첫째, ‘율법주의’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사도 시대 유대인들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고, 의롭게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의 오류를 지적하고 교정해 준 책이 ‘로마서’ 입니다. 둘째, ‘반율법주의’ 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임으로 어떻게 살든지 상관없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참된 자유가 아닌 방임으로 흐르게 하고, 쾌락주의에 빠지게 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의 문제를 지적해 준 서신이 ‘야고보서’ 입니다. 셋째, ‘갈라디아주의’ 입니다. 다른 말로는 신율법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인간의 행위, 노력, 선행으로 믿음을 보충해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유대인에게 그것은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교정하기 위해 주어진 말씀이 ‘ 갈라디아서’ 입니다.

 

복음 이외의 것에 대한 저항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1차 전도 여행 때 갈라디아 지역을 여행하면서 세워진 교회들을 교훈하기 위해 썼습니다. 갈라디아는 매우 넓은 지역이었습니다. 오늘날 터키 대부분 을 갈라디아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이 여행한 지역은 남부 갈라디아와 지중해 연안에 있는 로마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던 여러 도시입니다. 사도행전 13~14장을 보면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1차 전도 여행을 떠나서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비시디아에 있는 여러 도시에서 전도했습니다. 때로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고, 이방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나는 행적을 사도행전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받아서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면서 최초로 세워진 선 적 교회가 수리아 안디옥교회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로부터 소식이 왔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고, 율법 을 지켜야 하고, 믿음을 보충해야 한다”면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합해져서 구원을 이루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른바 갈라디아주의, 신율법주의가 태어난 것입니다.

 

이 시대에도 많은 교회를 휩쓸고 있는 신율법주의, 갈라디아주의는 예수님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첨가합니다. 유대 인들은 율법을 첨가했고, 이 시대 어떤 사람들은 선행을 첨가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또 다른 사상을 첨가해서 끊임없이 복음을 변질시키는 흐름이 존재합니다. 바울이 그 소식을 듣고 갈라디아서를 급한 마음으로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의 사역 초기에 쓰인 서신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 매우 격앙되었습니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복음의 변질을 가져오고, 훼손시키고, 다른 복음을 따르게 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깨닫게 되면 바울의 감정이 상당히 절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기원을 정확하게 밝힙니다.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된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거라고 기원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 정도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 서 그를 만나셔서 복음을 알려주셨기에 복음을 전하지 않고, 왜곡시키고,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첨가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분노가 마틴 루터에게서도 나타납니다. 마틴 루터는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선천적으로 싸우기를 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그는 비텐베르크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학자였습니다. 충실한 교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백성이 되기를 소원하는 경건한 수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말씀을 통해 성령 안에서 분명하게 깨달은 직후 로마가톨릭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천년 이상 교회를 지배해 왔던 로마가톨릭의 신학은 다른 복음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전한 이외의 것을 말하는 신학이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을 첨가함으로 복음을 변질시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는 상당히 절제된 반박문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독일 귀족들이나 여러 곳에 자신을 항변하면서 쓴 논문을 보면 교황을 가리켜 악마의 자식이라고 하고, 교황청을 가리켜 악마의 소굴이라고 하고, 지옥불에 떨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저주한 것은 점잖은 표현입니다. 로마 교황청의 심각한 부패와 신학적인 오염시키고, 복음을 변질시킨 것에 대해 저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개신교를 가리켜 ‘ 프로테스탄트(저항자들)’ 라고 합니다. 권력에 대한 저항이 아닙니다. 복음 이외의 것에 대한 저항입니다. 다른 복음에 대한 저항이 마틴 루터의 마음에 불타오른 것입니다. 진리에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 편에 서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진리 편에 서는 자를 붙들어 주심으로 마틴 루터에게서 시작된 저항의 불꽃이 유럽 전역에 불타올랐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 복음 외의 것을 전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말했던 것 같은 심령이 루터에게 있었습니다. 1천 년 이상 교회를 지배했던 것은 다른 복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은혜를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을 말하지만, 믿음 외에 인간의 행위와 선행을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토대 위에서 면죄부가 극에 달했습니다. 악한 열매의 극입니다. 인간의 죄를 돈 로 사해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면죄부입니다. 마틴 루터는 저항했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은 오직 인간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인간의 선한 행실은 따라오는 열매입니다. 야고보서의 관점에서 참된 삶의 변화가 없으면 믿음이 진정한 믿음인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진짜 믿음은 선한 행실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행위를 더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선한 행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 또다시 로마가톨릭 신앙으로 돌아가려는 흐름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오직 믿음과 은혜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너무나 중요한 복음의 진리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다른 원리에 의해서, 세속적인 가치관과 세계관과 자기 철학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 전해질 때 가장 큰 걸림돌은 율법에 익숙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율법도 함께 지켜야 한다고 주장함으로 복음을 변질시켰습니다. 이 시대에는 복음이 수많은 민족에게 전해질 때마다 다른 복음, 복음 이외의 것을 강조했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로마 교황청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그 이후에는 교회 역사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겉으로는 예수님을 믿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유교를 믿고 있고, 주자학을 믿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초기 교회 형태를 보면 남녀를 완전히 구분해서 ‘ㄱ자’ 교회가 있었습니다. ‘남녀칠세부동석’ 이라는 유교 사상에 의해서 남자와 여자가 한 공간에 있을 수 없도록 공간을 분리하고, 교회 내에 여전히 신분이 존재해서 양반과 종들이 존재했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그것과 싸워야 했습니다.

 

놀랍게도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해졌을 때 유교 사상과 신분, 여러 구습이 하나씩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조덕삼 장로님은 자신의 마부인 이자익이라는 청년과 함께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장로 투표를 했는데 이자익이 장로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조덕삼은 그를 장로님으로 모시고 섬기며 신분을 뛰어넘었습니다. 이자익 장로는 후에 신학을 공부하고 그 교회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조덕삼 장로님은 그 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종과 주인 이 함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인도의 견고한 신분제가 뚫지 못한 것을 복음으로 뚫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신분 철폐가 빨리 되었던 것입니다. 복음이 이 나라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인도나 다른 나라처럼 여전히 신분이나 남녀차별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을 것입니다. 수많은 차별이 존재했을 것입니다. 복음이 들어와서 이 모든 것을 깨뜨린 것입니 다. 때로 복음이 한 사회에 들어가면 타협을 합니다. 복음 이외의 것을 말합니다. 가톨릭이 이런 타협을 많이 했습니다. 

 

결국은 복음 이외의 것이 복음을 제한하고 훼손시키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지금도 오직 믿음이 아닌 행위가 더해 짐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 기본 신앙입니다. 종교개혁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은혜, 믿음 이전에 ‘ 직 (sola)’ 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들어 온 교사들에게 흥분하는 이유는 오직이 아니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해서 이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것은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 5:1). 복음은 우리를 반드시 자유케 합니다. 그러나 복음이 아닌 것은 우리를 종으로 얽매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려고 우리 죄를 대신해 자신의 몸을 내주셨습니다”(4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분은 죽임을 당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것만이 아닙니다. 죽음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버킷리스트는 오직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사상, 철학, 교육, 문화, 교양, 법과 제도는 죄를 제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죽음이요, 더 나아가 우리를 의롭게 하는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 전가(imputation)

 

복음의 진리를 로마서 시각에서 한 단어로 이해한다면 ‘전가(imputation)’ 입니다. 세 가지 전가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첫째,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그 죄가 전가되어 우리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으로부터 모든 인류를 생산하시고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죄의 유전이 있습니다.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었기에 아담 안에서 죄인 된 상태가 된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이 죄를 인간의 노력이나 문화, 교육이나 교양으로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화가 발전해서도 그렇습니다. ‘문화(culture)’ 라는 단어의 기원은 ‘덮는다’ 는 뜻이 있습니다. 인간의 문화는 인간의 죄성을 덮는 차원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성을 덮는 것이 문화의 발전입니다. 그 래서 사람들이 죄를 점점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지를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예 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할 만큼 우리의 죄가 심각하고 무겁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는 것입니다.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성령 안에서 주시는 생명으로 그분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전가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만을 용서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빛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거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을 덧입혀 주시는 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 다른 것을 더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어떤 사상, 철학도 여기에 첨가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어떤 행위, 공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에 더해 질 수 없습니다. 그것을 더하라고 요구한다면 다른 복음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다른 복음을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더 인정받기 위해서 더 열심히 노력해야지’ 라는 열심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더 열심히 해야 의롭다고 하십니까? 아닙니다. 내가 열심을 내지 않아도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내가 더 착한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원수 되었을 때 그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행실을 고치지 않았을 때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처절한 절망의 상태에서 출발합니다. 우리에게서 만일 선한 행실이 나온다면 그것은 값없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 죄를 예수님께 전가하시고, 예수님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변화된 것뿐입니다. 복음 외에 모세의 율법을 지켜서 완성해야 한다는 신율법주의, 갈라디아주의에 대해 바울은 분노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한 마디로 “무엇인가를 하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죄값이 모두 처리되었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의로움이 성령 안에서 주어졌습니다.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기에 사람들이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정말 가치 있는 것들을 한 번 보십시오. 다 거저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산속 깊은 곳 깨끗한 물은 공짜입니다. 가장 맑은 공기도 공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짜 은혜는 모두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도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되려면 오직 믿음으로만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것을 가미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안 됩니다. 은혜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를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 안에 복음 이외의 것이 무엇인지를 분석해 내고, 분별해 내고, 그것을 끊어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