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팬데믹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 (창세기 9:1~17)

새벽지기1 2021. 10. 2. 22:10

“생명을 존중하고 지키고, 생명이 번성하도록 하고,

생명을 돌보고, 창조세계 전체를 조화있게 하는

인간의 생명을 지키는 책임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언젠가 종식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혹독한 재난을 겪고도 아무런 유익과 변화를 얻지 못한 채로 그 이후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빨리 종식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동일하게 팬데믹 이후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각성과 깨달음,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 두 가지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첫째, 모든 사람은 동일한 DNA를 가진 생명체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팬데믹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고,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을 DNA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동일한 구조를 가진 생명체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둘째, 모든 사람의 생명이 너무나 소중합니다. 한 생명을 위해 우리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가치가 있습니다. 사회 경제가 붕괴돼도 생명을 지킬 수 있다면 대가를 기꺼이 치러야 합니다. 천하보다 생명이 소중하다는 하나님의 진리를 우리 모두 체험하고 있습니다. 셋째, 모든 사람의 생명은 자연생태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기원이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자연에서 기원한 것으로 본다면 기후 온난화나 기후환경 변화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팬데믹이 끝나고 그 이후 다가오는 또 다른 물결은 지구온난화와 같은 기후환경의 위기입니다. 생태계의 붕괴 등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위기가 찾아올지 모릅니다. 인간의 생명은 인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 중심의 시각이 결국 스스로의 생명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위기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체를 바라보며 인간의 올바른 위치를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팬데믹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대재난이 노아 홍수의 심판이었습니다. 세상은 그야말로 홍수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구분되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세상은 홍수 이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셨던 ‘보시기에 좋았더라’던 그 세상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대격변의 흔적 들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새로운 관계 설정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동물도 이제는 위협적이고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인간의 수명이 짧아졌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930세를 살았는데 1시대에 200년씩 수명이 감축되었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인간의 수명이 백 년대로 줄었습니다. 과학 기술 발전과 의학의 발전으로 100세 시대를 내다 본다고 하지만, 아직 평균수명이 백 세 미만입니다. 홍수 심판 이후 변화된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대 홍수로 인한 심판 이후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 하나님의 은혜로 생존하게 된 가 족들에게 주신 말씀이 팬데믹 이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홍수 심판 이후 생존한 여덟 명의 가족들에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말씀을 주셨는데 언약의 성격입니다. 그래서 ‘노아 언약’ 이라고 부르 기도 합니다. 노아 언약이 무시되는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부터 세상을 구원하는 구원자의 약속이 담겨 있어서 매우 중요하게 성경을 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홍수 심판 이후부터 장차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떠한 시각과 관계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하나님이 정해 주신 질서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팬데믹을 지나면서 이 질서를 다시 기억하고,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노아에게 주신 언약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시는 은혜 언약’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모든 시대, 모든 나라와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주시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든, 믿지 않든, 하나님을 경외하든, 하나님을 등지든, 모든 피조 세계까지 동일하게 적용되는 공통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라는 신학자는 이것을 ‘일반 은혜’ 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지구상 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세계에 적용되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은 일반 은혜로 세상을 대하신다는 것이고, 이 은혜 가운데 포함된 하나님의 명령과 창조질서를 우리가 잘 적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도 일반 은혜를 복음서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이 땅에 번성한다

 

오늘 본문은 일반 은혜마저 거부하는 인생이 되는 모습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가족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가졌던 목적은 복을 주시는 것이고, 그 복의 중심이 인간이고,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이 세상 속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생명이 땅에 번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 자녀를 많이 낳고 번성해 땅에 가득하라’”(1절). “너희는 자녀를 많이 낳아 번성하라. 땅에서 수가 불어나 땅에서 번성하라”(7절).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창세기 1장 28절 말씀을 다시 반복해서 노아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진 이후에도 창조 목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들의 생명이 어떤 생물보다 번성하고 가득한 것 입니다. 기근과 가난이 심각한 지역에서는 산아제한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를 낳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기에 그보다 심각한 문제에 집중 해야 합니다. 자녀를 낳아 키울 수 있는 능력과 환경이 됨에도 불구하고 잉태된 생명을 태어나지 못하게 가로막고, 죽게 하는 것은 이 명령의 정반대되는 행동입니다. 이른바 ‘낙태’ 라 불리는 것입니다. 또한 태어난 생명을 유기하고 돌보지 않는 죄악들입니다. 우리나라는 저출산 위기 가운데 있습니다. 어떤 지도자도 저출산 위기가 가장 심각한 위기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출산 위기는 위원회를 만든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정치 공약으로 세운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지난 15년 이상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었지만, 출산율이 더 낮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에 태어날 수 있고, 마땅히 태어날 권리가 있는 생명을 태어나지도 못하게 하고, 죽게 합니다. 그 생명의 숫자가 전 세계 코로나19 희생 자보다 비교할 수 없이 많다는 것은 모순 아닙니까? 명백한 모순이자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성인의 자기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연약할수록 더 권리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생명이 태어나고 번성하게 해야 한다는 말씀을 존중한다면, 낙태가 건강한 방향으로 심장이 박동한 이후에는 낙태를 근 할 수 있도록 한다면 저출산 위기를 금방 극복할 수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인식을 다시 바꿔야 합니다. NGO 더멋진세상을 비롯 한 여러 NGO들이 어린 생명들을 살리기 위해서 해외 곳곳에 후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수많은 생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모순 아닙니까? 노아와 그 가족들에게 주신 이 명령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공통으로 주신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 필요한 명령입니다.

 

동물들이 인간을 두려워하게 하셨다

 

둘째,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돌보시기 위해서 동물들이 인간을 두려워하게 하셨습니다. “땅의 모든 짐승들과 공중의 모든 새들과 땅에 기는 모든 것들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들이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것이다. 이것들을 너희 손에 준다. 살아 있어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푸른 채소와 같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었다. 그러나 고기를 피가 있는 채로 먹어서는 안 된다. 피에는 생명이 있다”(2~4절). 노아와 그 가족들은 홍수 심판 이후 엄청난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덟 명만 살아남고 모두 죽임당한 처참한 심판 이후 이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두려움이 있었겠습니까? 특히 동물들에게 받는 위협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두려움 을 이길 수 있도록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인간들에게 지혜와 창의력을 주셔서 야생동물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 다. 또 다른 하나는 동물들에게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무서운 야생 동물도 인간들이 오면 일단 피합니다.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갑니다. 무조건 싸우지 않습니다. 동물들은 일단 인간들이 다가가면 피합니다. 인간들이 공격하면 공격하겠지만, 인간들이 나타나면 일단 피합니다. 하나님이 동물들에게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주신 것입니다. 힘으로 붙으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동물들이 인간들을 피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닮은 존재로 만들었고, 동물은 인간을 닮은 형상 일부를 넣어 주셨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이것을 거꾸로 해석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짓고, 인간의 형상 일부를 동물의 세계에 넣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동물들을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동물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동물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동 물들이 인간을 두려워하고, 인간은 동물들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노아의 홍수 심판 이후 여덟 명밖에 남지 않았지만, 동물들의 위협으로부터 생존했을 뿐만 아니라 번성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있는 동물을 인 간에게 양식으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채로 먹지 말라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같은 하나님의 형상은 아닐지라도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속한 것이기에 생명이 완전히 죽어 있는 상태로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주신 까닭은 아마 홍수 심판 이전의 인간들이 생으로 자주 식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또한 생명에 대한 존중입니다. 동물 상호 간에는 살아 있는 채로 먹지 만,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생명에도 위협이 되는 위험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동물을 살아 있는 채로 먹지 말라는 말씀을 어긴 것이 수인 감염 질병이 일어난 원인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땅 가운데 베풀어 주신 은혜를 스스로 거부하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셋째, 인간은 타인의 생명을 서로 지켜 주는 공동체로 살도록 하셨습니다. “너희가 생명의 피를 흘리면 반드시 값을 치를 것이다. 그것이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 그 피에 대해 값을 치를 것이며 사람이 같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면 그 사람에게도 그 피에 대해 값을 치를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에게 피 흘림을 당할 것이다”(5~6절). 하나님은 타인의 생명을 해치는 살인에 대해 매우 엄격하게 대가를 치르게 하셨습니다. 동물의 생명도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에 존중하도록 만드셨는데 하물며 인간의 생명을 얼마나 존중하셨겠습니까? 타인의 생명을 해치는 것은 하나님이 제정해 놓은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진리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에서도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살인은 살인자의 마음에는 엄청난 두려움과 죄책 감을 가져오게 합니다. 그 자체가 형벌입니다. 때로 법에는 걸리지 않고 사람들에게는 들키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이 아 시기에 세상에서는 어떤 형벌이 주어지지 않았어도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하게 될 것입니다.

 

팬데믹 기간 동안 우리는 이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살인에 대해 회개를 해야 합니다. 생명을 존중하고, 지키고, 살인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가족 간의 살인, 형제 간에 살인, 자녀를 죽이고, 부모를 죽이는 살인이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살인에 대한 엄격한 경계와 회개와 변화가 필요합니다. 무고한 피에 대한 대가를 하나님이 물으신다고 했습니다. 인권이 유린되고 있는 아프간이나 여러 나라에 하나님이 그 피의 대가를 물으실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존중의 의식이 회복되지 않으면 이 땅은 점점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 계십니다.

 

홍수로는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겠다

 

넷째, 하나님은 다시는 홍수로는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홍수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홍수를 통해서 세상을 멸하시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는 물이 가득합니다. 사실 이 물로도 세상이 뒤덮힐 수 있습니다. 일부 지진이나 해일 피해가 있지만, 지구 전체 물의 요동침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일반 은혜로 붙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왜 죄악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붙잡아 주십니까? 왜 일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때까지 그분을 영접하고, 받아들이고, 구원받는 특별한 은혜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이 은혜의 증표로 무지개를 구름 위에 두셨다고 했습니다. 무지개가 처음 나타났는지, 아니면 자주 나타났던 무지개를 증표로 삼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루터주의자들은 이때 처음 나타났다고 주장하고, 칼뱅은 이미 있던 무지개를 증표로 택하신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빛이 굴절해서 여러 빛깔을 내는 것은 이미 존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무지개 출현은 이때 처음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 나타났느냐가 아니라 무지개가 하나님 일반 은혜의 징표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은 일반 은혜로 붙들어 주시지만, 마지막 심판이 다가올 것입니다. 물의 심판은 더이상 이루어지지 않지만, 불의 심판으로 세상 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무지개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이 땅을 붙잡고 계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무지개는 폭풍과 햇빛의 결합입니다. 비 온 뒤에 무지개가 나오는 이유는 폭풍과 햇빛이 조화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인한 재앙과 하나님 은혜의 조합으로 무지개가 발생합니다.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은혜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무지개가 요즘 어떤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까? 동성애자들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은혜의 징표를 엉뚱한 곳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을 꿈꾸는 인간 들의 권리를 상징하는 징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하나님이 악한 세상에도 공통의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심판을 연기시키고, 마땅히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스스로 가로막고, 거부하고, 등을 돌리면 하나님의 불의 심판을 향하여 나아가게 됩니다. 팬데믹 이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입니까? 노아와 그 후손들에게 주신 법칙, 생명을 존중하고 지키고, 생명이 번성하도록 하고, 생명을 돌보도록 하고, 창조세계 전체를 조화있게 하는 인간의 생명을 지키는 책임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반 은혜 가운데 복을 더 주시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바르게 지키고, 세계 어떤 나라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질서 있는 나라가 되어서 복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지킬 수 있는 지도자를 택할 수 있는 국민이 되어야 합니다. 인본주의와 유물론, 진화론에 사로잡힌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깨닫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고, 창조질서를 지킬 수 있는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