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인생의 짐을 새롭게 지는 쉼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지고 그분과 동행하는 인생을 사십시오.”
오늘 본문에 두 가지 인격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고, 또 다른 인격은 그들을 초청하시는 예수님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초청이 아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초청입니다. 이 초청을 할 수 있는 분은 단순히 훌륭한 인격자일 수만은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인격자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도움을 요청하면 그 사람들을 만나기가 꺼려지고, 주저하게 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사람들은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시는 분이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면 어떻게 절대적인 초청을 할 수 있겠습니까? ‘수고한다’는 것은 자신이 능동적으로 살아가면서 만들어지는 짐을 뜻합니다. 발전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도 마음의 짐이 될 수 있고, 자신의 죄와 정욕으로 인해 만들어진 짐을 뜻하기도 합니다. ‘무거운 짐’ 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불가피하게 환경과 상황에 의한 짐을 의미합니다. 어떠한 짐이든지 간에 인생의 짐을 피하는 길은 없습니다. 인생의 짐을 지고 힘들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려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염려와 공포로 잠 못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죄의 굴레에 매여서 끊임없는 후회와 갈등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에 힘이 없어서 무기력과 우울증으로 삶의 소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상에 왜 중독이 만연할까요? 마음의 짐, 인생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영혼들이 스스로 탈출구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탈출구가 아니라 미로일 뿐입니다. 그 길을 걸어갈수록 인생의 짐이 무거워질 뿐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28 절). 예수님의 교훈을 들으라거나 어떤 예식에 참여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살아계신 예수님께 나오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도움도, 개입도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중보자가 요구되지 않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 앞에 개개인의 인격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부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중보자 되신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중보자 되신 예수님께 나아갈 때는 그 어떤 중보자도 요구되지 않습니다. 종교개혁 신앙의 원리는 단순합니다. 개개인이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개개인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나주신다는 것이 종교개혁의 핵심 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신 것은 있는 모습 그대로 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지금보다 나은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오기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하고 고통스럽고 아파하는 모습 그대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아프고, 힘들 때 우리가 의사 선생님을 찾듯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 눌려 힘겨운 인생을 살아갈 때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나아갈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단순한 초청입니다. 우리가 성경 지식을 보유하고, 교회 경험이 있고, 봉사 이력이 있어야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초청에 응답하는 모든 영혼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약속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초청하시고, 쉼을 주십니다. 우리 인생의 짐을 없애 주는 쉼이 아니라 그 짐을 감당할 수 있는 쉼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안식 가운데 들어가면 인생의 모든 무거운 짐을 벗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인생의 짐을 벗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인생의 짐을 쉽게 이겨낼 수 있는 쉼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쉼을 얻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의 마취와 마비를 가져올 뿐입니다. 인생의 짐이 주는 무게를 온전히 이길 수 없습니다.
죄로부터의 자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쉼이 무엇입니까? 첫째,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인생의 짐이 힘겹게 여겨지는 것은 육체적 피로만이 아닙니다. 물론 육체적 피로로 힘겨워지는 인생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육체의 피로 너머에 있는 마음의 죄가 가져다주는 무게와 고통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초청은 누구에게 오라는 것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로 오라는 것이며, 십자가에서 함께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주어지는 새로운 삶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쉼은 우리 옛사람을 북돋아 주고, 격려해 주고, 위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옛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우리 옛사람을 함께 못 박아 죽게 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영원한 나라에 합당한 새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쉼은 단순히 짐을 잠시 풀어서 쉬게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끊임없이 죄의 짐을 만들어내고, 죄와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해서 죄에서 자유롭게 함으로써 인생의 짐을 가볍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로부터 자유를 경험하셨습니까?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는 경험을 하셨습니까? “내게로 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초청은 십자가에서 옛사람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죄에서 자유롭게 될 때 인생의 짐을 새롭게 질 수 있습니다.
양심의 평화
둘째, 양심의 평화입니다. 우리 마음에 쉼이 없는 것은 끊임없는 양심의 공격과 자극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정당한 양심의 자극이 있습니다. 타락했지만 우리의 양심은 나름대로 기능을 하고 있고,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양심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반적 은혜입니다. 때로 사람들은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고, 묻어버리는 것으로 마음의 평화를 찾습니다. 수많은 악을 행하면서도 마음에 갈등이 없는 것은 양심을 잠재우기 때문입니다. 또 잘못된 양심의 소리, 죄로 인하여 왜곡된 양심의 소리가 우리를 공격하기도 합니다. 우리를 자책감에 사로잡히게 하고, 불필요한 책임감에 빠지게 해서 정죄하고 공격합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하면서 끊임없이 우리의 잘못을 공격하고, 무가치하며, 유익이 되지 않는 인생이라는 정죄와 자책감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죄에서 자유로운 영혼은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는 십자가의 은혜때문입니다. 타락한 양심이 더는 우리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정당한 양심의 소리는 듣지만, 부당한 양심의 자극과 공격을 이겨낼 수 있는 마음의 평화, 양심의 평화가 쉼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비난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진정 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 양심의 평화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임재 그 자체
셋째, 예수님의 임재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그분의 임재 그 자체입니다. 죄가 예수님의 임재를 가로막았고, 우리의 타락한 양심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가로막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모든 장애물이 제거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임재가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는 인격적인 연합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참된 쉼의 비결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인생의 짐에 눌려 힘겨울 때 내 마음을 이해해 줄 수 있는 누군가가 곁에 있어 주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와 쉼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임재 아래 있는 인격을 만날 때 우리의 영혼이 쉼을 얻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임재가 있다면 그것이 최고의 쉼입니다. 천국은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천국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 때문에 축복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는 내 멍에를 메고 내게서 배우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메기 쉽고 내 짐은 가볍다”(29~30절). 예수님께서는 인생의 짐을 제거해 주신다고 약속하지 않고, 인생의 짐을 쉽고 가볍게 만들어줄 수 있는 장비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멍에입니다. “멍에를 지라”고 말씀하셨 습니다. 멍에는 두 마리 소의 어깨를 연결해서 함께 수레를 끌게 하거나 밭을 갈게 하고, 짐을 지우는 도구입니다. 대개 힘 있고 경험 많은 소 옆에 힘없고 경험 없는 소를 붙여서 경험 없는 소가 밭을 갈고, 짐을 감당하는 방법 등을 배우도록 고안한 장치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멍에를 메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어깨를 맞추고, 속도와 방향, 같은 마음으로 동행하자는 말씀입니다. 우리 스스로 멍에를 질 때 얼마나 곤비했습니까? 스스로 짐을 감당하려고 했을 때 얼마나 고됐습니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해서 불편한 것 같지만 예수님 임재 아래 머물면서 그분의 능력과 지혜, 마음으로 인생의 짐을 질 때 그 짐이 가벼워집니다.
멍에는 다른 의미에서 비유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유대 사회에서 율법을 읽는 랍비들의 방식을 가르칠 때 사용되는 표현이 멍에입니다. 모든 랍비가 자신만의 멍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만의 율법을 가르치는 방식을 멍에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전반부에 바리새인과 율법 학자들의 잘못된 멍에로 인해 일어나는 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의 멍에는 참된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의를 가르쳐 주지 못했습니다. 자기 의에 빠지게 하는 멍에였습니다. 쥘수록 더 힘겹고, 더 고되고, 더 죄에 얽매이게 하고, 짐을 더 지우는 멍에였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하면서 인생의 짐이 가볍게 느껴지지 않고 더 무거워지고, 마음이 더 곤비해진다면 분명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마음이 점점 강퍅해진다면 잘못된 멍에를 진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추구했던 종교적 멍에를 지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나의 멍에를 메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복음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우리 옛사람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처리해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성령 안에 새로운 생명을 주시며, 자유와 평안을 주십니다. 왜 인생의 짐이 가볍고 쉽습니까? 오직 믿음으로 예수님과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믿음으로 거룩하게 되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동행에 가장 필요한 것이 믿음인데 그 믿음이 죄로 말미암아 파괴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멍에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는 끊임없이 우리의 죄를 처리해줍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끊임없이 처리할 때 믿음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지고 동행하는 믿음입니다. 죄가 믿음을 파괴했는데 십자가 은혜로 다시 회복됩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의 걸음과 방향, 지혜와 마음을 따라가면 인생의 짐이 가벼워집니다. 능히 감당하게 됩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 삶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동행하는 삶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동행하면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마리 소가 함께 멍에를 지고 가면서 배우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를 지면 반드시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은 반드시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만일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지 못했다면, 마음에 온유와 겸손이 형성되지 않았다면 예수님과 동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에 얼마나 오래 출석했고, 얼마나 많은 봉사를 했고, 어떤 타이틀이 있는지는 본질이 아닙니다. 예수님 동행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예수님과 동행했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지 못하면 동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함께 지고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지 못 할 때가 많습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만 해도 마음이 평안할 텐데 왜 갑자기 분노가 일어납니까? 왜 질투가 일어납 까? 누군가가 잘 되는 것이 왜 불편합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온유하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때로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할 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교만해서 그렇습니다. 온유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짐들은 사실 스스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상황과 환경이 주는 마음의 짐도 있지만,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그 모진 고통을 감당하면서도 온유하고 겸손하셨습니다. 수많은 군중의 조롱과 채찍과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면서도 온유하고 겸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노하지 않으시고, 미워하지 않으시고, 저주하지 않으신 이유는 온유하고 겸손하시 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마음이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짐을 무겁게 여기지 않으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면 십자가와 같은 고통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주권 아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주인으로 계시고, 우리는 종으로 그분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희생하고 이루신 것이 구세주로서의 사역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세주가 되신 것은 우리의 주님이 되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임재하셔서 우리의 옛사람을 처리하신 것이 구세주로서의 사역이라면, 내 안에 새 사람과 새 생명을 주셔서 동행하게 하시는 것은 주님으로서의 사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우리의 주님이셔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구세주로서의 예수님은 받아들이면서, 주 으로서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로버트 멍어의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이라는 소책자를 보면 예수님께서 내 마음의 집에 들어오십니다. 함께 거주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 은밀한 벽장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벽장을 열려고 하니까 이렇게 반응합니다. “예수님, 프라이버시를 지켜 주십시오. 거긴 안 됩니다. 자꾸 이러시면 같이 못 삽니다.” 예수님이 주님이 아니라 거주자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동행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주인이고, 내가 종으로 동행하며 모든 삶과 마음을 숨김없이 내어드리고, 그분의 주권을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삶을 살면 인생 짐이 가벼워집니다. 예수님의 임재가 있으면 그 어떤 인생의 짐도 우리를 짓누르지 못합니다.“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짐을 새롭게 지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짐을 없애주지 않습니다. 인생의 짐을 벗게 하시지 않습니다. 짐이 없는 인생을 약속하지 않으 셨습니다. 짐을 새롭게 지는 쉼을 약속하셨습니다. 많은 짐을 지고 있지만 그 짐을 능히 감당하는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멍에를 지고 동행하는 삶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품에 기대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동행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님과 동행할 수 있는 공간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멍에를 지고 그분과 동행하는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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