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세상의 지혜, 하나님의 지혜 (고린도전서 1:18~25)

새벽지기1 2021. 8. 29. 11:23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의존하고, 승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드러내십니다. 인간의 모든 지식과 지혜, 과학 기술과 문명이 작고 작은 바이러스 하나를 이겨내지 못하는 모습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향한 경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을 꿈꾸며 인간의 지혜를 자랑하고 의지하는 교만을 꺾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고, 이 고난을 이겨내며 살아야 합니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와 매우 친숙해졌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장식물로도 사용하고, 예배당마다 걸려 있는 교회와 기독교의 상징으로도 사용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와 친숙해지면서 잊어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본래 친숙할 수 없는 끔찍한 도구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사형틀이었습니다. 아주 흉악해서 사회가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죄인들에게만 집행하는 사형틀이었습니다. 그 사형틀에서 집행된 사형수의 시신은 골짜기에 버리거나 들짐승의 먹이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라는 말 자체를 꺼내는 것도 꺼렸습니다. 1세기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신앙과 교회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여전히 십자가가 처형 방법으로 집행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상징은 물고기였습니다. 로마 시대 지하 무덤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모였던 장소에 가보면 곳곳에 물고기 형상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물고기’ 를 말하는 단어는 ‘익투스’ 인데 익투스의 앞의 이니셜을 풀어보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라는 단어를 모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물고기가 당시 신앙인들과 공동체의 상징이었습니다. 2~3세기를 지나면서 십자가를 이마에 긋는 습관이 생겨났습니다. ‘터툴리안’ 이라는 학자에 의하면 누군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스며드는 것처럼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 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인지를 증거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가장 중요한 상징으로 받아들이게 했다고 믿습니다. 이 고난의 시대 우리가 세상의 뉴스에 마음이 무너지고 휩쓸리고 절망하고 안타까워하며 살아가기보다는 십자가를 바라보 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다루셨는지를 묵상할 때 다시 소망의 복음을 붙잡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십자가가 어떤 도구였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가 보여준 역설

 

십자가는 역설을 만들어 냈습니다. 오늘 본문에 두 가지 역설이 나타납니다. 한 가지는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나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18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모습은 가장 연약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연약함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역 설입니다.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는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의 메시아였습니다. 모세처럼 많은 기적과 표적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면서 로마로부터 구원하고, 그들이 꿈꾸는 행복한 나라를 만들어 주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 초기에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배고픈 자들을 먹이시는 기적을 보이셨을 때 그들이 환호했습니다. 능력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고, 무기력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을 보고는 실망했고, 절망했고, 떠났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연약한 모습은 메시아와 어 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연약한 모습으로 죽으신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의 지혜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군중들과 군병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며 “네가 만일 메시아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외쳤습니다. 능력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능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실 능력이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는 능력을 보였더라면, 자신을 조롱하고, 못 박고, 십자가에 매달은 이들을 벌주시는 능력을 보이셨다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수치와 조롱, 비참한 고통과 고난을 친히 인내하시고 담당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23절을 보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걸린다’ 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스칸달론’ 입니다. 여기서 영어의 ‘스캔들’ 이 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걸림돌’ 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라는 단어는 성립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의 예언서, 특히 이사야를 통해서 장차 올 구원자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아는 고난받는 종의 모습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같이 연약하고 고난받는 모습으로 메시아가 올 거라고 이미 말씀하셨지만, 구약을 제대로 읽지 않았던 사람들 혹은 읽었지만 잘못 해석한 사람들은 메시아는 능력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표적과 기적으로 세상을 통치한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연약한 모습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리석어 보이는 하나님의 지혜 또 다른 십자가의 역설은 이 세상의 지혜로 볼 때 어리석어 보이는 모습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유대 사람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이것이 유대 사람에게는 마음에 걸리는 일이며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이든 그리스 사람이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22~24절). 사람들이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의 지혜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받은 교육일 수도 있고, 학교에서 받은 교육일 수도 있고, 세상에서 주입된 문화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지혜롭다는 것은 한 마디로 가장 적은 희생으로 가장 큰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의 지혜는 인간 안에 있는 무서운 죄의 실체를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괜찮다고 여깁니다. 죄가 인간을 얼마나 무섭게 망가뜨리는지를 망각합니다. 죄는 묻어두고 인간 안에 있는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만 발굴하고 개발하는 것을 지혜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인간 안에 있는 죄성을 다룰 수 없습니다. 법과 문화, 교육 제도로 근본적 인 인간의 죄성을 다룰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인간의 죄성을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죄를 포장하고 죄인이 아닌 것처럼 만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지혜로 볼 때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의 몸이 되시고, 죽기까지 낮아지셔서 자신을 희생하신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낮아짐과 겸손과 희생과 헌신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어떻게 하면 내가 희생하지 않고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를 내려놓고, 자기를 대속제물로 내어줌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때로 세상이 바라볼 때 어리석어 보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어리석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을까요? 이 세상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 때문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며, 불의가 조금도 없으신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죄를 용납할 수 없고, 어둠은 조금도 견딜 수 없고, 모든 불의를 반드시 벌해야만 하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동시에 그분은 사랑이 무한하신 분입니다. 용서하기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과 사랑의 성품은 세상의 지혜로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관점을 보면 공의의 관점은 공의의 관점만을 바라보고, 사랑의 관점은 사랑의 관점만 바라봅니다. 그래서 사회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서로 싸웁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공의와 사랑을 융합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 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공의든지 사랑이든지 한 면만 붙잡고 이념을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의 마음에 일어나는 갈등을 보십시오. 자녀가 잘못하면 징계하고, 잘못을 지적하고, 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한한 용서가 일어납니다. 마음 한편에는 징계가, 또 다른 한편에는 사랑과 용서가 있습니다. 부모 안에 일어나는 사랑과 공의의 갈등을 세상의 지혜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이 두 가지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은혜는 결코 진리를 왜곡하거나 무시하거나 진리의 기준을 낮추지 않습니다. 도리어 진리의 요구를 맞춰 줍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죄에 대한 엄중한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진리,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진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충족시킴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충족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한없는 용서와 은혜를 베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모습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십시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초청하 십시오. 하나님의 지혜가 여러분의 삶에 임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창조 계획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사건

 

십자가는 하나님 창조 계획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죄를 범해서 타락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랴부랴 구원의 계획을 마련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타락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타락을 변화시켜서 구원하고, 타락 이전보다 하나님을 아는 존재로 변화시킬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스스로 사단과 동류가 되어 버렸습니다.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사단과 한 무리가 되어서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역사를 행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일어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바라보고 믿을 때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함께 못 박은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전체가 그 메시지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해 져 우리가 더이상 죄의 종이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압니다. 이는 죽은 사람은 이미 죄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 것을 믿습니다”(롬 6:6~8). 여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가 사단과 연락하고, 동행하고, 동류가 되고, 동역하고, 심지어 종이 된 옛사람을 죽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옛사람을 개발시키고, 발전시키고, 부추기고, 격려해서 변화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옛사람을 죽입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공의와 사랑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혀 죽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 안에 예수님의 부활하신 생명이 임하고, 성령님께서 새 생명 가운데 임하셔서 사단에게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입니다. 우리 삶에 많은 문제가 있고, 갈등이 있습니다. 그 문제의 근본을 따져 들어가면 죄의 문제입니다. 서로 불신하는 문제입니다. 서로 미워하는 문제입니다. 서로 속이고, 거짓을 행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명 가운데 살면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며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 ‘십자가의 도’

 

이 세상의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 가의 도’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궁극적으로 이생을 강조합니다. 죽음을 멀리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영생을 사랑하게 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가 아무리 발전하고, 과학 기술이 발전해도 궁극적으로 이생을 강조하기 때문에 어리석습니다. 전도자가 이미 “그 시대의 모든 지혜를 동원하고, 모든 개발을 해도 결국 헛되다”고 고백했습니다.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무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만이 가치 있는 것임을, 참으로 지혜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신앙을 처음 접하고, 기독교를 처음 대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죽음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른 종교나 위대한 위인들의 강조를 보면 모두 살아 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살아 있을 때의 업적과 교훈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죽음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3년 동안의 공생애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예수님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유일성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라는 증거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꺼려하고, 피하고 싶은 죽음을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의 문이 되게 하셨습니다. 죽음이 새로운 출발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죽음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삽니다. 우리는 죽어도 삽니다. 우리는 영원히 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임을 깨닫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교리적인 지식이 되어서 교회 안에 갇 혀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을,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체득해야 합니다. 우리의 많은 문제가 나의 옛사람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선포하고 끊어내는 일이 일어나야 합 니다. 동시에 죽음으로부터 다가오는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고, 이 세상에 집착해서 살아가게 하는 세상의 지혜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열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의존하고, 승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됨을 체험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