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스스로 신이 되려는 위기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나올 때 문제가 해결되고,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인류는 코로나19 바이러스와 전쟁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바이러스와 전쟁보다 근본적이고 심각한 기후위기에 직면하게 되고 대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영적인 시각에서 보면 더 근본적이고 심각한 위기가 있습니다. 이 시대는 과거의 어느 역사보다 스스로 신이 되려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물질문명과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더욱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합니다.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객관적 기준도 거부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생물학적 성별까지 자신의 의사에 따라 거부하고 스스로 성을 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개개인의 주관적 느낌을 신성시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시대 흐름에 편승한 영향력이 있다고 하는 인문학자들의 메시지가 일관됩니다. “자신에게 충실하라”,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자신의 느낌을 존중하라” 등입니다. 결국 개인의 느낌이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을 자신이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결정합니다. 자기가 좋다고 느끼는 것은 선이고, 자기가 나쁘다고 느끼는 것은 악입니다. 유발 하라리는 철저한 진화론자입니다. 그의 대표적인 책 <사피엔스>를 보면 반성경적이고, 가설에 불과한 것을 사실처럼 늘어놓았습니다. 그런데 결론 부분에 참 의미 있는 지적 한 가지가 있습니다. ‘ 인간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하고 있다’는 자성의 비판입니다. 인간의 의식과 정체성에 근본적인 변혁이 일어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우리 기술은 카누에서 우주왕복선으로 발전해 왔지만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력한 힘을 떨치고 있지만 이 힘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생각이 거의 없다. 이보다 더 나쁜 것은 인류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무책임하다는 점이다. 우리 친구라고는 물리법칙밖에 없는 상태로 스스로를 신으로 만들면서 아무에게도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의 친구인 동물들과 주위 생태계를 황폐하게 만든다. 오로지 자신의 안락함과 즐거움 이외에는 추구하는 것이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면서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하고, 무책임한 인간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우주까지 여행하는 능력을 보여 주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엄청난 과학기술의 발전이 고통을 줄이고 있습니까? 도리어 늘리고 있습니다. 인간이 더 위험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를 무시하고, 파괴하고, 생명윤리를 무너뜨리는 일들을 범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떠난 이들은 대개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열매를 따 먹은 이유도 스스로 신이 되고 싶어서였습니다.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선과 악의 기준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를 넘어가는 것이 악입니다. 하나님의 질서 안에 있는 것이 선임에도 불구하고 금지된 열매를 먹음으로써 불순종하고, 그것이 선과 악의 기준이 된 것입니다. 이 시대 자기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지가 선과 악의 기준이 되어버린 모습이 금지된 열매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의 유전인자가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근본적인 위기는 하나 님을 떠나서 자신을 의존하는 죄입니다. 모든 불행과 저주의 원인은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떠나고 자신을 의존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하는 삶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 람을 의지하고 육체를 그의 힘으로 삼는, 그래서 그 마음이 여호와를 떠나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서 좋은 일이 생겨도 보지 못하고 광야의 메마른 땅에서, 아무도 살지 않는 소금 땅에서 살 것이다’” (렘 17:5~6). 성경에서 말하는 악의 정의는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는 것이고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며, 결국 스스로 신이 되려는 것입니다. “깃딤 해변가로 건너가서 보고 게달에 사람을 보내 자세히 살피고 이와 같은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라. 어떤 민족이 자기 신들을 신이 아닌 것과 바꾸었느냐? 그런데 내 백성은 그들의 영광을 아무 유익이 없는 헛된 우상들과 바꾸었다. 하늘아, 이것으로 인해 소스라치게 놀라라. 몹시 두려워해 황폐해지라. 여호와의 말이다”(10~12절). 하늘이 소스라치게 놀라고 두려워해야 할 일이라고 고발하십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방 민족들도 그들의 신에 충성하는데, 하물며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헛된 우상으로 바꾸는 것을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 하나님을 떠나 우상에 빠지고 스스로 신이 되는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생각이 허망해졌고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은 어두워졌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지만 미련하게 돼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이나 새나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동물의 우상으로 바꾸었습니다”(롬 1:21~23). 추락의 과정, 타락의 과정,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꾸고 스스로 신이 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출발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을 때입니다. 생각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허망해 지고,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고, 결국 하나님 의 영광을 우상으로 바꾸어버리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계시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계속 추락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그 마음이 얼마나 어두워졌는지, 그 생각이 얼마나 허망한지 알지 못하고, 자신의 어리석음에 포로가 되어서 우상을 만들고, 스스로 신이 되는 것입니 다. 인간이 아무리 높다고 할지라도, 놀라운 기술을 발견한다고 할지라도, 탁월한 예술 작품을 만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영혼은 반드시 우상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많은 업적을 만들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규칙을 만들어서 잘 준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삶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할 때 가장 행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가장 영화롭게 되는 것과 우리가 가장 행복하게 되는 것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중간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하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고, 죄악의 습관에 빠진 우리를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깨닫고,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의존하는 삶을 사는 것이 참된 행복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의지하고 여호와를 신뢰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그는 물가에 심어서 시냇가에 뿌리를 내린 나무 같을 것이다. 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 잎이 항상 푸르다. 가뭄의 해에도 걱정이 없으며 그치지 않고 열매를 맺는다”(렘 17:7~8 ). 어떠한 환경에서도 푸르고 열매 맺을 수 있는 시냇가에 뿌리내린 나무와 같은 삶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하는 삶이 가장 복된 삶이요, 가장 안전한 삶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가장 복된 삶을 누리는 체험을 하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갈망하도록 창조되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저질렀다. 생명수의 원천인 나를 버리고 스스로 물 저장소를 파서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물을 담지 못하는 깨진 물 저장소였다”(13절).
두 가지 악을 지적하십니다. 첫째, 생명수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물로 비유하셨습니다. 엄청난 기근 속에서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홍수가 나도 물이 필요합니다. 물은 우리 생명의 가장 중요한 원천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둘째, 물을 담지 못하는 웅덩이를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깨끗한 생명수가 솟아나는 샘물을 외면하는 것과 터진 웅덩이를 스스로 만드는 것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인생을 사는 것입 니다. 스스로 자신을 위한 신을 만들고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있는 갈망은 무엇으로든 채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채스터 턴의 유명한 문장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그칠 때 우리는 아무도 경배하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을 경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고 믿지 않을 때 우리는 다른 것을 의존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지 않을 때 다른 어떤 것을 반드시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업적을 이루고 부와 권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만 신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이 하나 님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갈망을 스스로 해결하고자 신이 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인간 안에는 단순한 물질이나 어떤 관계로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갈망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갈망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존하고, 사랑하고, 동행하고, 그분을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물고기가 물을 갈망하듯, 육지 생물이 달리는 땅을 갈망하듯, 새가 창공을 갈망하듯, 본질적인 갈망, 근본적인 갈망이 있습니다. 배고픔과 목마름 정도의 갈망이 아닙니다. 인간다워지는 갈망입니다. 인간으로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갈망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해결할 수 있는 갈망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근본적인 갈망은 첫째, ‘의미’에 대한 갈망입니다. 사람들은 의미 없는 일을 싫어합니다. 의미를 발견하면 어떤 위험한 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의미를 스스로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또한 인간에게는 ‘영광’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인간이 영광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영원’ 에 대한 갈망도 있습니다. 영원을 믿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영원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삶의 모든 갈증은 영원에 대한 갈망 때문입니다. 이 근본적인 갈망들은 실재가 존재하기 때문에 있습니다. 의미를 갈망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영광을 갈망하는 것은 영광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배고픔이 있다는 것은 배고픔을 해결할 음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목마름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해결할 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갈망하는 모든 것은 그 대상이 존재합니다. 인간에게 영원에 대한 갈망이 있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도록 창조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그분을 의존할 때만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참된 영 광을 발견하고, 영원한 실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죄는 갈망을 하나님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게 하고, 인간 스스로 해결하도록 만듭니다. 의미에 대한 갈망을 재미로 바꿔버리려고 합니다. 의미를 잃어버리게 하는 재미는 위험합니다. 또한 영광에 대한 갈망을 ‘성취욕’ 혹은 ‘우월의식’ 으로 대체하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앞서는 것에서 자신의 존재 의식을 깨닫습니다. 영광에 대한 갈망을 해결합니다. 다른 나라보다 앞서고, 다른 사람보다 앞서면 그 영광에 도취합니다. 그것은 영광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월의식은 언제든지 무너지고, 그런 성취는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영광의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자체로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 이룬 업적을 이루지 못했을지라도, 이 세상의 어떤 성취를 맛보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되어 있으면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스스로 신이 되려는 사람은 이생에 대한 집착으로 그 갈망 을 대체하려 합니다. 고대 이집트 문명에서는 피라미드를 만들었습니다. 무덤입니다. 시체를 미라로 만들어서 썩지 않도록 오랫동안 보관한다고 영원이 오지 않습니다. 영혼에 대한 갈망을 이생에 대한 집착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진짜 영원을 믿는다면 이 세상의 것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전통 유교에서도 오랫동안 제사를 지냅니다. 가문의 전통이 깊을수록 오랫동안 제사를 지냅니다. 저 세상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입는 옷을 입어야 하고, 이 땅에서 먹는 음식을 계속 준비해야 하는 이유는 이생에 대한 집착입니다. 영원에 대한 갈망을 이생에 대한 집착으로 바꾸면서 스스로 신을 만드는 것입니다. 재미에 휩쓸리고, 성취욕과 우월의식에 휩쓸리고, 이생에 대한 집착에 휩쓸리는 모습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샘물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만난 한 여인은 스스로 신이 되려고 했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인생의 갈망을 여러 남편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지만 여전히 남편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있었던 갈망은 이 세상에 속한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또 다른 우물이 필요했습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 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2~3, 개역개정).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갈망이 해갈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부활의 생명은 우리에게 구원의 우물이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의 우물로 초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 이 물을 마시는 사람마다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계속 솟아올라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요 4:13~14).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영원에 대한 갈망입니다. 인생의 모든 목마름이 해갈되는 샘물은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약속도 아닙니다. 스스로 신이 되려는 노력을 내려놓고 진정한 하나님이신 그분 앞에 나올 때 구원의 우물되신 그분이 주시는 영원한 샘물입니다. 스스로 신이 되려는 이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대신해 죽게 하셨습니다. 스스로 신이 되려는 우리의 옛 자아는 죽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갈망하는 새 영을 창조해 주셨습니다. 영원에 이를 수 있는 새 마음, 영원한 나라에 거할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에 이르는 길을 깨닫게 하셨고, 의미를 깨닫는 진리를 허락하셨고, 영광을 누리는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스스로 신이 되려는 위기를 내려놓고, 우리의 주인이시며 왕이신 하나님께 나올 때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하고, 하나님을 온전 히 의존하는 인생으로 변해가는 재난의 기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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