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들 (요한복음 4:19~24)

새벽지기1 2021. 8. 22. 07:13

“지혜롭게 영과 진리로 있는 곳에서 예배하며

참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예배자가 되십시오.”

 

코로나19 재난은 시험의 기간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참된 예배자인지를 시험하는 기간입니다. 모이는 예배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모든 삶 속에서 참된 예배자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시험하는 기간입니다. 우리는 모이는 예배를 깊이 사모합니다만 이사야 말씀대로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조차 마당만 밟는 예배입니다. 참된 예배자인지 하나님 앞에서 깊이 돌이키고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예배에 대한 교훈을 주신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신약성경에서 헬라어로 ‘예배’ 라는 단어가 13번 사용되었는데, 그중에서 10번이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우물가에서 어느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께서 나누는 대화에서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삶 전체를 알고 계시고, 현재의 삶과 마음의 중심까지 아시자 그 여인이 매우 당황했습니다. 자신의 영혼까지 벌거벗겨진 것 같은 예수님의 임재 앞에서 두려웠고, 도망가고 싶었고, 감추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대화 주제를 다른 것으로 바꾸려고 했는데 오히려 그 대화 주제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우물가 여인과 같이 목마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참된 해갈을 어디서 얻을 수 있습니까? 인생의 목마름에 대한 해갈은 어디서 올까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예배 속에서 인 의 목마름이 해결됩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이 대화 주제를 피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정곡을 찔리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예배 장소에 대한 질문을 던진 배경이 있습니다. 당시 사마 리아인들은 조상 때부터 모세오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모세오경 중에서 신명기 1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나안 땅에 백성이 들어갈 때 그리심 산에서는 축복을 선언하고, 에발 산에서는 저주를 선포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또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이 그리심 산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 예배했던 것을 근거로 그리심 산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장소라고 주장하며 고집했습니다. 페르시아 시대에는 성전까지 지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주전 128년 유대인들에 의해서 무너졌지만, 여전히 그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할 것을 집착했습니다. 반면 유대인들은 모세오경 이후 역사서, 예언서, 시편 등 모든 구약의 나머지 부분을 받아 들였기에 예루살렘을 주목했습니다. 유대인 들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예배할 것을 명하시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 갈등이 예수님 시대에 표면으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 유대인으로서 “예루살렘”이라고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그리심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고, 제3의 장소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소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가 온다고 하셨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패러다임 시프트’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이 임재하시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하는 때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 셨습니다. 어디에서 예배하는가에 집중했던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상관없이 그들은 본질에서 한참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본질은  무엇입니까? 누구에게 예배하는지를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분명히 깨닫는 것입니다. 이방 종교 혹은 미신에 가까운 종교일수록 자기가 섬기는 대상이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는 성경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분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장 분명하게 계시 된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어디에서 예배드릴지, 어떤 방법과 모양으로 할지는 본질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예배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성막도 만들라고 하시고, 성전과 율법을 통해서 여러 제사법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기 전에는 어쩔 수 없이 부분적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 은 한 시대 혹은 자기가 원하는 시대 역사를 토막내서 자기가 원하는 방법으로 고착하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 산에 고착된 것처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집착하고 고착되어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신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신약성경의 풍성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이나 유대인이나 똑같다고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루시는 구원, 새로운 시대, 놀라운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심을 알고”

 

“이제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오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한다”(23~24절). 당위성을 말씀하신 세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첫째,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 “거듭나야 한다”(요 3:7)입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인자가 들려야 한다”(요 3:14)입니다. 예수님 죽음의 필연성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죄악을 대속하는 대속제물이 필요해서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필연적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셋째, “예배드려야 한다”(요 4:24)입니다. 이 세 가지 절대적인 당위성은 서로 연결됩니다. 거듭남, 십자가의 복음, 참된 예배는 연결되고, 한 문장으로도 만들어집니다. 십자가의 복음으로 거듭난 영혼은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으로 거듭난 영혼만이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배할 것입니까?

첫째,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심을 알고 드리는 예배여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하나님은 아버지라고 예수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구약에 하나님의 많은 이름이 나오는데 예수님께 서 그 모든 이름을 합해서 한 단어로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 의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대속하셔서 하나님께 지음 받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마음에 와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라는 단어를 거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완강하게 거부하거나 하나님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건강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좋지 않은 이미지가 ‘하나님 아버지’ 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예배하는 아버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떤 관계에 있든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반드시 이 아버지의 이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버지를 배반하고, 아버지를 모욕하고, 아버지에게 상처 준 아들이 허랑방탕 한 죄악 가운데 살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먼저 달려가 끌어안고, 이미 용서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얼룩진 아들이 큰 업적을 남기고 돌아온 것처럼 축제를 벌여 줄 정도로 사랑이 충만한 아버지가 바로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한하고, 완전한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할 때 비로소 용서하시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이미 용서하시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회개한 시점에 용서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미 용서하고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아버지께 나아가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이든, 어떤 때든 아버지는 우리를 끌어안고 환영하고 기뻐하고 함께 축제를 나누십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에 타락한 양심이지만 양심이 있어서 “아버지, 저는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기에 그저 종으로 여겨도 됩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 양심이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양심이 작동해야 할 때는 작동을 안하고, 불필요할 때 작동을 하는 것입니다. 진짜 양심이 있으면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어야 합니다. 아버지를 떠날 때는 양심을 무시하고, 아버지께 돌아와서는 양심이 살아나서 가로막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예배와 상관없이 산 사람이 ‘ 내가 양심이 있지 어떻게 오랜만에 예배에 나가?’ 라고 생각한다면 양심을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그동안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멀리했는지를 기준으로 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사랑이 충만하시고, 용서하기를 기뻐하시고, 우리를 끌어 앉으시는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우리에게 참으로 기쁜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둘째,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합니 다.

하나님께서 영이라는 것은 보이는 세상보다 우선하는 것이 영적 세계라는 의미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라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보이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기에 우리 눈으로 보는 모든 세상을 통치하고, 지배하고, 영향을 미치는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천사도 존재하고, 악령도 존재하고, 보이는 물질세계 위에서 영의 세계가 보이는 세계를 통 치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영과 혼과 육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영이신 하나님과 인간의 영이 교통함으로 우리의 혼과 육이 영을 따라가도록 지으셨습니다. 영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의 정신이 온전하게 되고, 우리의 육이 경건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말씀에 불순종하면 우리의 영이 죽게 되고, 우리 혼은 혼미하게 되고, 우리의 육은 타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이 육을 끌어가는 인생이 아니라 육이 영을 끌고 가는 인생이 됩니다. 육이 혼을 끌고 가고, 혼이 영을 끌고 갑니다. 영이 죽었기 때문에 육적 인간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지었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눈과 귀와 코와 손과 발이 있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보시고, 판단하시고, 결정하시고, 행동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만드신 하나님을 우리가 알고, 하나님과 교통하도록 우리에게 그 기능을 넣어 주신 것입니다. 시편 94편 9절에서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 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눈으로 우리 자녀들을 살피시고, 역사를 살피시며, 그 강하신 팔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이 인격적인 분이라는 말은 어폐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보고, 듣고, 판단하고, 행동하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영의 기능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상상할 수 있어서 하나님이 인격적인 분이라고 표현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가 거듭난 영혼으로, 영이 살아난 영혼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고, 그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은 우리의 육체적 죽음이 존재의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영원하신 분이며, 인간에게도 영이 있기에 인간의 영은 영원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죄로 말미암아 영과 분리 되어 흙으로 돌아가지만, 우리의 영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신학자 중에 인간의 영혼도 소멸한다는 이들이 있습니다. 매우 위험한 주장입니다. 매우 잘못된 신앙입니다. 우리의 영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부활의 영원한 몸을 입을 때까지 우리는 영원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죽음이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을 알고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 예배는 영원히 지속되는 예배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셋째,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드립니다.

여기서 영이란 인간의 영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을 의미하고,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영혼으로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할 수 없기에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가 왜 모여야 합니까? 우리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기 위해서 배워야 하고, 함께 기도해야 하고, 함께 찬양해야 하고, 성령의 임재 가운데 거하는 성도들의 기도와 찬양과 중보기도에 함께 함으로 우리가 성령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양육을 통해서 말씀을 배우고,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전해주는 성도들의 도움을 통해서 우리가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기 때문에 함께 모여 예배해야 하고, 흩어져서도 함께 예배해야 합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교회 역사에서 예배가 형식화되고, 의식화되고, 건물을 화려하게 하고, 건물 자체를 중요시 하면서 예배의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중세 교회는 극에 달했었습니다.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신명기에서 분명히 말씀했는데 중세 교회는 수많은 형상, 아이콘, 심지어 예배당 안에 성인들의 형상까지 만들어 붙였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했건만 건물이 중요해지고, 의식이 중요해지고, 의복이 중요해지고, 화려한 복장을 해야만 훌륭한 예배인 것처럼 했습니다. 그것은 거짓입니다. 어떤 형식을 지켜야만 예배인 것처럼 여기는 것도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온전한 예배형식이 있다면 그것은 형식이 전혀 의식되지 않는 것입니다. 형식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순서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영이신 아버지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예배의 유일한 형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홀로 예배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성도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여 드리고,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고, 격려받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모여야 합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예배자

 

예수님께서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아직도 예배가 없는 수많은 영혼과 지역이 있어서 그들도 예배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선교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가 있도록 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선교는 이 땅에 존재하는 시간 동안만 가능합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인 목표는 예배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선교란 예배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다시 함께 모여 예배드릴지 모르지만, 장소는 본질은 아닙니다. 다 함께 모여 예배드리든 흩어져 예배드리든 어느 곳이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영이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양극단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지혜롭게 영과 진리로 있는 곳에서 예배하며 회복의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참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예배자로 변화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