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누가복음 1:67~79)

새벽지기1 2021. 9. 23. 07:33

“생명의 빛으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십시오.

어둠과 죽음에 속한 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기다림입니다.”

 

우리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동물은 순간만을 살지만, 인간은 늘 미래를 생각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성인이 되기를 기다립니다. 성인이 되면 배우자를 기다리고, 결혼을 기다리고, 자녀를 기다리고, 자녀의 결혼을 기다리고, 자녀의 자녀를 기다립니다. 학생은 졸업을 기다리고, 졸업 후에는 취업을 기다리고, 첫 월급을 기다리고, 승진을 기다립니다. 군인은 제대를 기다립니다. 예술가들은 작품의 완성을 기다립니다. 요즘은 코로나19 팬데믹의 종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간은 늘 더 나은 미래를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만일 우리에게 기다림이 없다면 삶의 종점에 이르렀다는 뜻일 것입니다. 아무것도 기다리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곧 죽음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면 좋은 것만 있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중요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고도’를 기다리며

 

196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 는 아일랜드 출신 프랑스 소설가이자 작가인 사무엘 베케트의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는 두 주인공이 나옵니다. 두 주인공은 ‘고도’ 라는 인물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또 언제 어떻게 올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막연하게 기다립니다. 한 주인공은 고도가 나타나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을 믿고 “계속해서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다른 주인공은 기다림에 지쳐서 “이제는 떠나자”고 주장하며 갈등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결국 고도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소년 전령을 통해 “오늘은 못 오고 꼭 내일 올 것”이라는 전갈만 보냈습니다. 끝내 고도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습니다. 작가조차 “고도가 누구냐”는 질문에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에 썼을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집니다. 한 주인공의 대사가 이 기다림과 싸우는 이들의 고민을 잘 말해줍니다.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가 문제야. 그리고 우리는 그 대답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축복을 받은 거야. 이 무서운 혼란 가운데서도 한 가지만은 확실하네. 우리는 고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것은 확실하다.” 그들은 누구인지도 모르고 언제 올지도 모르는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 해도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현대인들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 책에 가장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논평을 뽑아 보았습니다. 그것은 ‘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 또 언제 올지도 모르면서 계속 기다려야 하는 본능을 가진 인간의 실존’ 입니다. 그 실존을 이처럼 감동적으로 묘사한 작품이 없다는 평가입니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인간의 본질과 본능이 어디서 온 것일까요? ‘ 도’ 라는 단어의 원제목을 보면 스펠링이 다섯 알파벳(Godot)으로 되어 있는데, 뒤에 알파벳 두 개를 빼면 하나님(God)이 됩니다. 저자는 아일랜드 개신교 계통의 학교에서 공부했다고 합니다. 충분히 신앙적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미국식 발음으로는 ‘갓’ 이지만 영국식 발음은 ‘곳’ 입니다. 저는 고도라는 단어로 사람들이 막연히 기다리는 대상을 묘사한 것은 암시를 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누구인지도 모르고, 언제 올지도 모르면서 계속 기다려야 하고, 그가 와서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기다림의 대상은 곧 하나님입니다. 언제 올지도 모르면서 만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포기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지게 만드는 고도는 곧 하나님이십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죽음의 그늘 아래 생명을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기다립니다. 행복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 행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합니다. 좋은 일은 기다리지만, 그 좋은 일을 주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 세상이 어둡고 죽음의 그늘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어둠에 처해있고, 죽음의 그늘 아래 앉아 있게 되었습 니다. 이 어둠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빛과 어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어둠은 우리에게 축복과 회복을 줍니다. 우리는 밤에 깊은 잠을 자면서 회복을 누립니다. 우리가 밤에 쉬어야 하는 것은 어둠 속에서 회복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어둠은 죄로 말미암아 빛이신 하나님을 떠남으로 찾아온 것이기에 우리를 방황하게 하고, 갈 바를 알지 못하게 하고, 대낮에도 어디로 가야할지,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 알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를 혼돈과 방황에 빠지게 만드는 어둠입니다. 어둠 속에 있는 자들은 빛을 기다립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무엇인가 확실해지기를 바랍니다. 분명해지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어둠 속에 있어서 왜 불법과 폭력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이들이 있을까? 왜 무고한 생명이 그처럼 죽어갈 수 있을까? 왜 아프리카 대륙에는 기근이 계속되어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것일까?’ 와 같은 질문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의 가족들이 명확한 원인과 해명을 원할 때가 많습니다. 많은 보상을 줘도 정확한 해명이 되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어둠 속에 있기 때문에 분명하지 않고, 확실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빛입니다. 모든 것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려 주는 빛을 기다립니다. 이 세상은 죽음의 그늘 아래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모든 기다림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성인이 되기 원하고, 배우자를 만나기 원하고, 자녀를 원하고, 행복을 원하고, 발전하기를 원하지만, 죽음 앞에 도달하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집니다. 그동안 기다리고 성취했던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안개처럼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게 만드는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의 그늘이 모든 것을 허무하게 합니다.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생명입니다. 이 시간에도 가장 많은 재원과 에너지와 노력이 투자되는 것이 아마 생명공학일 것입니다.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는 일일 것입니다. 죽음을 극복하는 일이 가능한 꿈을 가지고 그 기술과 신약을 발견하기를 많은 사람이 기다릴 것입니다. 죽음의 그늘 아래 있기 때문에 생명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기다리고, 죽음의 그늘 아래 생명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78~79절). 죽음의 그늘 아래 있는 자들이 생명을 기다리는데 생명의 빛이 되는 해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해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그 해가 아닙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아래 있는 자들에게 빛과 생명을 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출생을 성경에서는 해와 빛을 발하는 별로 많이 비유했습니다. 말라기 4장 2절에서는 “의로운 해가 떠오를 것이다”라고 했고, 베드로후 서 1장 19절에서는 “샛별이 떠오를 것”이라 고 예언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6절에서는 “빛나는 새벽별”이라고 표현했고,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사람들에게 “나는 생명의 빛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어둠 속에 빛을, 죽음 가운데 생명을 주시는 돋는 해로 우리에게 임하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이 좋은 일만 기다리며 사는 것 같지만,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구원자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에 ‘고도’ 라는 인물을 기다리는 것처럼,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자가 어떤 모습으로 오실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진정 기다려야 할 예수 그리스도!

 

사가랴는 자녀를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자녀를 주신다”고 했을 때 믿지 못했습니다. 그 불신의 대가로 아이가 출생할 때까지 사가랴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기다리던 아이가 출생하자 사가랴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예언한 내용이 오늘 말씀입니다. 세 가지 특이한 내용이 발견됩니다. 첫째, 사가랴의 기다림에 대한 성취는 자신의 아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다른 아이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는 예수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아이를 주신다는 약속을 받고 잠시 말을 못하다가 이제 입이 열려서 찬양하게 되면 기다림에 대한 성취에 감격해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텐데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가랴는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 예수님의 출생에 대해서 찬양했습니다. 자신의 자녀에 관한 이야기는 딱 한 줄 “내 아이 는 그분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나옵니다. 둘째,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구원을 이루는 메시아의 출생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기다리는 민족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고도를 기다리는 것처럼 누구를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언제 올지도 모르면서 막연하게 기다리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약속을 주셨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일한 민족으로 부르셨습니다. 메시아가 어디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오셔서 어떤 일을 이루 실지에 대한 정보를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고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헤롯 왕이 율법학자들 에게 “메시아가 어디로 올 것이냐?”라고 물 었을 때 “베들레헴입니다”라고 대답하지 않 습니까?

 

그들은 기다리는 민족이었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메시아가 어떤 모습으로 어디로 오고, 어떤 일을 하실지를 알고 기다렸습니다. 사가랴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가랴는 제 사장으로서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이었고, 백성들에게 메시아를 기다리라고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가 기다렸던 것은 자신의 자녀였습니다.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습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것을 죄악시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복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미래에 좋은 일 이 있기를 기다리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진정 기다려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가랴는 메시아의 출생으로 기다리던 구원이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였다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사가랴의 찬양과 예언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모두 과거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부정과거시제입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인데 왜 과거형으로 표현했을까요? 헬라어에는 독특한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이지만 너무 확실하기에 과거처럼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실 것이지만 이미 오셨고, 장차 오실 것이지만 우리 가운데 온전히 임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돋는 해가 위로부터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아래 있는 자들에게 비추어 주신다’고 표현했습 니다.

 

하나님께서는 빛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빛이 되어 주시고, 생명을 기다리는 자에게 생명이 되어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높은 하늘에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아래 있는 자들에게 직접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기다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먼저 약속을 주시고 기다리게 하시고, 갈망하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그 기다림이 우리에게도 임했습니다. 무엇을 기다리는지 모르고,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갈망하며 방황하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가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지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기다리고, 온전한 구원을 기다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생명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더 나은 것만을 기다리는 인생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구원을 기다리고,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을 기다리는 영혼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셨습니다. 최근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성도들이 기도제목을 교계에 보내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우리는 예전처럼 동일하게 모여 예배드리고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탈레반은 우리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발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순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차 다가올 죽음을 기다린다는 고백은 자포자기의 기다림이 아닙니다. 절망의 기다림이 아닙니다. 머지않아 죽임을 당할 것이지만,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은 죽음이 아니라 부활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더 나은 부활, 영광스러운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 아래 앉은 인생이 아니라 생명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에 핍박과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본회퍼가 나치 치하 감옥에서 약혼녀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글 일부를 발췌해서 만든 찬송이 있습니다. 머지않아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며 약혼녀에게 보낸 고백 속에 담겨 있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생명을 기다리는 영혼의 고백입니다. “선한 능력으로 언제나 고요하게 둘러싸여서 보호받고 위로받는 이 놀라움 속에 여러분과 함께 오늘을 살기 원합니 다.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고 싶습니다. 옛것이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어두운 날들의 무거운 짐은 여전히 우리를 짓누르지만, 오 주여 내몰려 버린 우리의 영혼에게 당신께서 준비해 주신 구원을 주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고통으로 꽉 채워진 쓰고 무거운 잔을 주실지라도 우리는 선하시고 사랑하는 주님의 손에서 그 잔을 망설이지 않고 감사하게 받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과 태양 아래서 우리에게 다시 한번 기쁨을 주시기 원하신다면 과거를 회상하고 우리의 삶을 주님께 완전히 드립니다. 선한 능력으로 우리는 너무 잘 보고받고 있으며 믿음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이나 아침이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또한 매일의 새로운 날에 함께 하십니다.” 이 고백은 고통스러운 감옥과 임박한 죽음 앞에서 하나님  구원을 기다리는 내용입니다. 풀려날 것을 기다리는 것 이 아니라 주께서 쓰고 무거운 잔을 주셔도 감사히 받겠다는 기다림입니다. 생명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지금은 어두운 터널을 지나지만, 빛 되신 주님의 길로 걸어가는 믿음의 발걸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기다리는 이유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생명의 빛으로 우리에게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십시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십시오. 그 분이 우리에게 줄 영원한 나라를 기다리십시오. 어둠과 죽음에 속한 모든 위협과 두려움과 압박을 이기고 승리하는 기다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