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교회가 계속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도전하고,
그 사명을 완수하는 일에 헌신하기를 축원합니다.”
교회의 생명력을 가로막은 장벽은 내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것은 전통에 대한 고정 관념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 중심의 율법적인 습관과 경험에 갇혀 있는 세계관이었습니다.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초대교회에 가장 힘든 장벽이었습니다. 율법을 넘어 복음의 역사로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 역사의 걸림돌은 완악한 이방인들의 불신과 문화가 아니었습니다. 율법에 익숙하게 살아 왔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고정관념과 율법에 대한 집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 왜곡된 사상으로 복음을 오염시킨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더 큰 위기였습니다. 교회 스스로 만드는 두 가지 장벽이 늘 존재 합니다. 하나는 역사가 오래되면서 생기는 장벽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교회 공동체 규모가 커지면서 생기는 장벽입니다. 규모가 크든 작든 역사가 오래되면서 생기는 장벽이 있고, 역사와 상관없이 규모가 커지면서 생기는 문제가 있습니다. 규모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은 어렵지 않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교회 안에 일어 나는 장벽이 있습니다. 역사가 흐르면서 경험과 습관에 묶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임재와 말씀의 비전에 묶이는 것이 아니라 과거 습관과 경험에 묶임으로 인해서 교회가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의 모습에서 그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초대교회는 그 장벽을 뛰어넘어 교회 생명력이 더욱 충만해졌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를 시작으로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원하지 않는 이별을 해야 했습니다. 정들었던 공동체를 떠나야 했습니다.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페니키아, 키프로스, 안디옥에 이르기까지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흩어져야만 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고, 함께 성령으로 충만했던 이들이 흩어져야만 했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다른 한편으로는 예루살렘교회에 성령이 임해서 믿는 이들이 수천 명씩 증가했습니다. 그래서 제도가 필요했고, 조직화하는 일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점점 잊어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그들에게 세례를 주 고,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제자 삼으라”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의 출발은 ‘가는 것’ 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발적으로 가기에는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의 공동체가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발적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생각해 볼 때 핍박이라는 외부의 환경은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비자발적이지만 흩어져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말씀이 전파되도록 하는 선교적 교회로 변화시키는 요인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가 다 이해 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일로 복음이 확산하도록 역사하십니다. 이 시대 많은 교회가 왜 교회다움을 잃어버렸습니까? 아무런 핍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핍박이 교회를 더욱 강하게 합니다. 외부의 핍박은 교회를 더욱 강하게 만들 뿐입니다. 문제는 내부의 장벽들입니다.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흩어져 지상명령에 순종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하는데 가로막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도들간의 사랑입니다. 교회공동체를 통해 얻는 안정감, 축복, 행복, 기쁨입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계획에 예루살렘교회가 온전히 순종하지 못할 때 외부적인 핍박을 통해서 그들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소수의 성도들과 안디옥교회
“그 무렵 스데반의 일로 인해 핍박을 받아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은 페니키아, 키프로스 그리고 안디옥까지 건너가 유대 사람들에게만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19절). 내부적인 장벽이 일어났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물론 언어와 문화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 역사를 통해서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이민자들의 교회에서도 나타납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역사가 오래되어서 이제 그 나라 말도 이해하고, 그 나라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같은 종족만 만나서 신앙생활 하려고 하는 것은 성경적인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이주민 250만 명이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나라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감소율을 대입해보면 10년 후에는 4백만 명, 20년 후에는 500만 명 정도 늘어날지도 모릅니다. 우리나라가 예루살렘처럼 유대인들만 모인 사회가 아니라 키프로스와 안디옥처럼 수많은 사람이 모인 지역이 되는 것입니다. 당시 안디옥은 50만 명 인구의 국제도시였습니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 장 많은 사람이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 사람들에게만 말씀을 전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그때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소수의 성도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키프로스와 구레네 출신인 몇 사람은 안디옥으로 들어가 그리스사람 들에게도 주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셔서 많은 수의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왔습니다”(20~21 절).
유대인만이 아니라 그리스와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시작한 것이 사도행전의 중요한 터닝포인트입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예루살렘교회가 흩어져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며 유대인 방식대로 존재했을텐데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함으로 세워진 안디옥 교회를 통하여 이방 세계에 복음이 확산하는 중요한 캠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안디옥교회는 흩어진 유대인들 가운데 소수의 몇 사람,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킹덤 파이오니어’ 입니다. 한국 교회도 여전히 한국 사람들끼리의 교회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온누리 교회 체질 자체가 다민족, 다문화를 포용할 수 있는 구조가 되어야 합니다. 안디옥교회가 그런 일을 했을 때 주의 손이 함께 하셨습니다. ‘ 주의 손’ 이라는 것은 주님의 능력과 임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셨던 일이기에 능력을 주셔서 안디옥에 믿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 아닙니다. 다민족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종말의 때가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주하는 원인은 여러가지 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복음을 온 세상에 확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예루살렘교회를 넘어 안디옥교회로!
“이 소식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전해지자 그들은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 도착해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온 마음을 다해 주께 끝까지 충성하라고 그들 모두를 격려했습니다. 그는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주께 나오게 됐습니다”(22~24절). 하나님께서 제2, 제3의 바나바를 키우시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데려왔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사도행전 역사의 주역이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전통에 묶였지만, 안디 교회는 그럴 시간이 없었습니다. 복음이 온 세상에 증거될 때 회심한 이들을 어떻게 양육하고, 어떻게 그들에게 복음을 적용할지 연구하는 데 바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의 모습이 세계 선교에 쓰입니다. 바나바와 바울 모두가 다양한 문화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한인 디아스포라가 800만입니다. 하나님께서 타민족을 이해하고, 타민족에 대한 공감과 감수성이 뛰어난 그들을 통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만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사울을 찾으러 다소로 가서 그를 만나 안디옥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하여 바나바와 사울은 1년 내내 그곳 교회에 머물면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에서 제자들은 처음으로 ‘ 그리스도의 사람’ 이라고 불리게 됐습니다”(25~ 26절). 바울과 바나바의 동료 관계를 보십시오. 팀워크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적 교회, 킹덤 파이오니어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는 나보다 사역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사역에 쓰임 받을 수 있도록 격려하고, 세우고, 동역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인격적인 신뢰와 동역이 참된 그리스도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그 결과 안디옥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사람’ 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 스스로 만든 명칭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인정하는 단어입니다. 온누리교회에는 킹덤 파이오니어, 하나님 나라 개척자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레슬리 뉴비긴이라는 유명한 신학자이자 인도에 수 십 년 동안 사역하신 선교사님이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교회가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두 가지 증거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교회와 선교회를 다른 공동체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둘째, 선교회의 사명을 교회 내부적인 필요를 채운 다음 여력으로 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선교에 최우선 순위를 가지는 교회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교회의 본질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주어진 사명에 충성하는 교회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교회가 예루살렘교회를 넘어 안디옥교회로 확장되어가는 모습에서 교회와 선교, 공동체와 선교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 되었습니다. 성도를 돌보는 일과 복음을 전하는 일이 동시적입니다. 안디옥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사람 ’ 이라고 불렸던 교회의 모습이 온누리교회가 창립 36주년을 맞이하면서 킹덤 파이오니어 스피릿을 다시 새롭게 하는 성경적 근거가 된다고 믿습니다. 온누리교회가 킹덤 파이오니어로서 계속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도전하고, 그 사명을 완수하는 일에 모든 것을 헌신하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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