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줄기를 어떻게 사용하시는가를 보여주신다. 오늘 말씀 말씀 역시 본문의 일차적이 가르침과 본문에 스며있는 가르침을 살펴 볼 수 있다.
첫째는 비인격적인 삶은 반드시 후회한다는 것이다.
아아수에르 왕은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하여 생각하기에 이르른다. 즉 자신의 경솔한 행동에 대하여 후회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비인격적이고 주도권 싸움에 얽매인 삶은 반드시 후회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비록 왕의 권한으로 하였지만 그것은 경솔한 짓이었다. 그러므로 생각할수록 후회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만든 이들에 대한 원망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왕의 태도에 대하여 신하들은 두려워하고 기회를 반전시키고자 새로운 왕비 간택을 간청한 것이다.
둘째는 모르드개의 사욕이다.
모르드개는 베냐민 지파 기스의 중손이다. 모르드개는 그의 중손인 기스때에 이곳으로 잡혀왔다. 그러나 모르드개의 집안은 고레스의 칙령으로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이곳에서 살은 것이다. 그것은 바벨론의 삶이 더욱 좋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은 그가 수도인 수산성에 살았고, 또한 그의 이름은 바벨론식 이름으로 개명되었고, 또한 에스더가 왕비로 간택될 때 자기 민족의 이름을 말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에스더를 이방의 왕비로 보내는 일과 왕궁에서 주는 것에 대한 적극적인 사용에 대하여 금하지 않은데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볼 때 모르드개의 사욕이 얼마나 대단하가를 볼 수 있다. 모르드게는 일종의 유대 민족의 지도자로 보는 것보다는 오히려 일개의 권력에 집착한 인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는 늘 왕궁 가까이에 있었다.[11절] 결국 모르드개의 사욕은 민족의 큰 환난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세째는 에스더의 준비이다.
에스더는 고아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길러준 모르드개는 친척이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자기의 딸 같이 양육하였다. 모든 면에서 열악하였던 에스더는 왕의 칙령으로 수산궁에 가게 된 것이다. 모든 처녀들을 불러서 왕후 간택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스더는 자연스럽게 이러한 상황에 따라 수산궁으로 간 것이다. 그러나 후궁을 관리는 헤개의 눈에 에스더는 들게 된 것이다. 고아인 에스더가 왕비로 준비 된 것이다.
이러한 본문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은 분명하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누구하나 불필요한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이다. 인간의 생각을 넘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둘째는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시다.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으로 일하지만 하나님은 각자의 일을 통하여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아하수에로의 후회와 이를 만회하기 위한 신하들의 계책과 그리고 모르드개의 사욕까지도 들어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오늘도 동일하게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환경이 좌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과 사람의 일함이 다른 것은 환경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에스더는 식민지 백성이며, 고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환경을 보지 않고 들어서 사용합니다. 에스더의 성품은 그의 순종과 또한 정결한 모습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앞에 어떻게 서있는가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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