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십자가에 못 박힌 가정 (누가복음 14:25~27)

새벽지기1 2021. 6. 6. 21:19

“가정을 십자가에 못 받고, 십자가 길을 걸어가는 공동체가 되면

비로소 가족이 교회가 되고, 교회가 가정이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게 오면서 자기 부모와 아내와 자식과 형제 혹은 자매와 자기 생명일지라도 나보다 더 사랑하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6~27절). 어느 불순한 사람이 이 구절만 뽑아서 예수님이 인륜을 거스른다고 잘못 소개할 수 있을 정도로 두렵고 떨리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C.S. 루이스는 “하나님 아버지를 미워하는 사람은 이 구절을 읽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말씀을 읽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한 사람은 이 구절을 이용해서 자신의 잘못된 감정을 합리화할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으면 예수님이 다른 가르침과 상충하는 듯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마태복음 10장에서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아버지와 딸이 그 어머니와 며느리가 그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 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가정의 화목을 깨뜨리고, 서로 원수로 만드는 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인 것처럼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이단들이 이 구절을 자주 이용합니다. 가족과 불화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아닌 것처럼 하려고 이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는 놀라운 하나님 나라 임재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진리가 가정에 임할 때때로 받아들이지 않는 가족들과 분리되는 불가피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때 때로 가족에게 원수처럼 취급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와 형제들 앞에서 더욱 충격적인 말씀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고 계실 때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습니다. 당시 형제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여기고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공생애를 방해하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누가 내 어머니요 형제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보라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이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요? 예수님이 가족도 외면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가족에게 오해를 받았고, 가족이 예수님  공생애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이 가족 간에 있어야 할 자연인 사랑을 부정한 것일까요? 가정을 파괴하는 것을 기뻐하는 분일까요? 예수님은 십자가의 마지막 고통 속에서도 어머니를 염려하셨고,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신 효자셨습니다. 5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행하신 분입니다. 어린 시절 예수님에 대한 기록의 핵심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정에 있어야 할 참된 사랑을 부정하거나 파괴하는 분이 아닙니다. 가정이 깨어지고, 상처 입고, 가족 간에 불화하는 것을 지적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가족만 최고고, 우리 가족만 잘 살아야 하고, 우리 가족만을 위해 살아가는 왜곡된 우선순위가 가정을 참 행복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정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회복되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가정을 못 박히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누릴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때로 가정에 고통이 임하는 까닭은 우상이 깨어지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결혼하면 행복하기를 기대하고, 가정에 대한 많은 꿈을 꿉니다.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꿈을 하나님 안에서 이루지 않고, 우리의 본능적인 사랑으로만 이루려고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부모가 자식을 최선을 다해 길러도 자녀는 부모가 원하는 곳으로 가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했고, 자녀가 최우선이라고 여겼던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란 자녀들이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이웃을 배려할 줄 모르고, 범죄인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녀가 우상이 될 때 자녀가 더욱 더 위험해 지는 것입니다. 가족에게 우선적으로 있어야 할 것이 있지 않고, 가족에 대한 본능적인 사랑만 있을 때 자녀가 축복을 잃어버리는 모습을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가정이 제자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도의 핵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자도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십자가에서 옛사람을 죽음으로 새 생명으로 살 수 있는 것처럼, 가족도 십자가에서 죽어야 가정이 살아납니다. 여러분, 자신을 어떻게 발견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을 때 발견합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잃어버릴 때 비로소 나를 되찾는 것처럼, 가정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 가정이 예수님을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로 여길 때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이 되지 않는 가정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예쁜 아이들을 키우는 어머니들의 마음 한편에 분노가 가득 차 있습니다. 가장 희생적인 사랑을 주는 어머니의 마음 한편에 분노가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 사랑의 한계입니다. 따라서 가정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 가정 중심으로만 살아가면 도리어 가정에서 깊은 상처와 절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족을 나보다 더 사랑하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 개역개정). ‘ 미워하지 아니하면’을 우리말성경에서는 ‘ 나보다 더 사랑하면’ 이라고 해석했습니다. ‘ 미워하다’ 는 것은 셈족언어의 과장법인데,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지극히 큰 나머지 가족에 대한 사랑이 도리어 미움처럼 여겨질 정도로 사랑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예수님께 드리면 가족 사랑은 어떻게 합니까? 가족에 대한 사랑이 없어지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드려진 사랑,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 주변 사람을 올바르게 사랑하게 합니다.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진리 안에서 거룩한 사랑이 되기에 인간적인 사랑이 주는 죄와 아픔과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도리어 살리는 사랑, 회복시키는 사랑, 진정 세우는 사랑으로 가족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가족을 뛰어넘어 이웃을 사랑하고, 수많은 영혼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가족이 축복이 되려면 우리 가족이 최우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가족이 못 박힐 때 진정 가족이 축복이 됩니다.

 

가정을 십자가에 못 박은 신앙의 선배들

 

예수님을 가족보다 사랑한 제자의 모습을 보여준 믿음의 선배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따 가기에는 너무 먼 듯한 분들이지만, 못 따라갈 것도 없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히셨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자십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감옥에 계실 때 병약하신 어머님이 위독한 상황이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안타까웠겠습니까? 그 마음을 일본 형사들이 이용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효심을 자극하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지말라고 회유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감옥을 나오셨습니다. 조건적인 석방이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집에 돌아왔을 때 자초지종을 들은 아내 오종모 사모님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보, 감옥으로 다시 돌아가세요.” 주기철 목사님이 발걸음을 돌려 다시 감옥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순교하셨습니다. 연로하신 어머님에 대한 효심 때문에 감옥을 나온 주기철 목사님을 다시 돌려보내는 아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인간적인 사랑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사랑아닙 니까? 만일 주기철 목사님이 어머님을 돌본다는 이유로 돌아와서 신사참배 반대 설교를 하지 않았다면 한국 교회에 중요한 맥이 끊겼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 후배들이 바라보고 회개할 사도행전적인 모델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함께 그 운동에 참여했던 수많은 한국 교회 성도들이 시험에 들 뿐만 아니라 그 운동이 급속히 약화됐을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발걸음이 는 것을 사모님이 아신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가정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어머니를 돌보는 사랑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발걸음으로 인해서 잃어버릴 복음의 능력, 한국 교회에 미칠 영향을 바라보면서 남편에게 다시 감옥으로 들어가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가정의 모습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사모님도 그에 못지않았습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손양원 목사님이 신사참배 문제로 1년 7개월 형을 받고 순천형무소에 있을 때 혼자 여수 애양원을 섬기며 기도했습니다. 금식하고 철야하며 기도했습니다. 기도제목이 늘 이랬습니다 

“우리 손양원 목사님이 절대로 신앙이 꺾이지 않게 해주세요.” 보통 사람 같으면 “빨리 감옥에서 나오게 해달라고, 건강 하게 빨리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정양순 사모님은 절대로 신앙이 꺾이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정양순 사모님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1년 7개월 동안 손양원 목사님의 영적인 기개가 조금도 굽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1년 7개월이 지나면 석방해야 하는데 다시 종신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리고 순천에서 서대문형무소로 이감하게 됩니다. 정양순 사모님이 이감하는 길에서 손양원 목사님을 잠시 만났습니다. 보통 아내 같으면 손양원 목사님을 붙잡고 “이제 그만해도 좋으니 빨리 나오라”고 부르짖지 않았을까요? 정양순 사모님은 성경책을 들고 손양원 목사님께 가서 요한계시록 2장 10절을 읽어줬다고 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 리라”(계 2:10b, 개역개정). “당신이 우상에게 절하고 포기하면 내 남편이 아닙니다” 라는 말도 덧붙였다고 합니다. 남편이 충성되게 순교의 길을 가도록, 믿음을 지키도록 북돋아 주는 아내의 사랑이 남편을 저주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남편에 대한 사랑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뛰어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가정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중심의 가정

 

때로 가정에 상처와 아픔이 있습니다. 역기능 가정, 상처 입은 가정, 부모로부터 올바른 사랑을 받지 못한 가정, 깨어 진 가정, 반항하는 가정이 있습니다. 그 아픔과 상처를 예수님에게 가지고 나오면 치유 받고 회복하고 십자가가 주인된 가정으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부모가 주지 못한 사랑을 영적 부모가 채워주기도 합니다. 가족에게 돌봄을 받지 못한 고아와 같은 인생이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가정을 통해 돌봄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고백록>으로 유명한 초대교회의 지도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매우 폭력적이고 과격했습니다. <고백록>을 보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가 고생을 많이 한 것으로 나옵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의 어머니에게 “이런 남편과 어떻게 삽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나 모니카는 그런 남편도 주께 하듯 섬기고,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모니카의 생애가 <고백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17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술취한 것 말고는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빈자리가 컸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수사학자가 되기 위해서 만난 사람이 암브로시우스입니다. 수사학을 배우려고 암브로시우스를 찾아갔는데 그에게서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육신의 아버지에게서 경험하지 못한 사랑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고백록>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은 아버지가 갓난아이를 품에 안듯이 나를 안아주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 덕분에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이처럼 육신의 가정, 깨어진 가정, 역기능 가정, 상처 입은 가정에서 경험하지 못한 사랑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맺어진 새로운 가정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가정이 바로 하나님의 가정,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가정에서 만나게 된 영혼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족관계는 이 땅에서만 존재합니다. 영원한 나라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가족은 십자가로 나가게 하는 통로입니다. 가족이 너무 행복해서 십자가를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오히려 모든 풍요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너무 힘들어서 가족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면 더욱 십자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이 되지 않는 가정은 결코 축복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가정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어느 순교자는 “그리스도인들의 유일한 친척은 성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교회와 하나님의 가정에도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가정이라면 육신의 가정이 주지 못했고, 경험하지 못했던 빈자리를 채워줄 것입니다. 교회 같은 가정, 가정 같은 교회 가정과 교회는 하나님의 기관입니다. 인간이 세운 기관이 아니라 신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가진 기관입니다. 그래서 가정이 상처 입고 깨졌을지라도 하나님의 가정인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가정이 가정다우면 교회 같아집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면 가정 같아집니다. 진정한 가정은 십자가 중심의 교회 같은 가정입니다. 진정한 교회는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가정 같은 교회입니다. 가정 같은 교회, 교회 같은 가정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의 가정을 회복시킵니다. <폭풍 속의 가정>이라는 책의 결론에 제가 드린 말씀을 잘 정리한 중요한 문장들이 있어서 읽어드리고자 합니다. “가족은 복음이 아니다. 만일 가족이 삶의 궁극적 의미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가족이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고 당신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면 당신이 겪었던 역기능 가정이나 당신을 버린 배우자 또는 머나먼 반항의 나라로 떠나버린 자녀가 당신의 삶을 망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삶은 우리를 자유케 하여 가족을 이상화하지도 않고 악한 것으로 여기지도 않게 한다. 십자가에서 짐이 축복인 것을 볼 때 우리는 가족을 짐으로 여기거나 싫어하지 않게 된다. 또한 우리의 가족이 우리의 모든 욕구와 갈망을 채워 주기를 바라지 않게 된다. 우리 앞에 영광스럽고 영원한 삶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가족은 당신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당신을 이 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워할 이유가 아니다. 당신 앞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십자가의 길은 본향으로 이어진다. 빛은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빛나며,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 지금 어떤 폭풍과 싸우고 있든 당신은 살아남을 것이다.”

 

가족은 복음이 아닙니다. 십자가로 향하는 통로입니다. 가족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우리는 비로소 복음을 경험하고, 가족이 우리의 모든 욕구를 채워주기를 바라지 않고, 우리는 영원한 영광을 사모하게 됩니다. 가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공동체가 되면 비로소 가족이 교회가 되고, 교회가 가정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가정에 수많은 아픔과 상처가 있습니다.

행복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 가정을 십자가에 못 박힌 가정 되게 하시고,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