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상처 준 가족 용서하기 (창세기 45:1~8)

새벽지기1 2021. 5. 30. 22:37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요셉과 같이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상처는 가족에게서 받은 상처입니다. 그 상처가 자녀들에게 이어져서 가문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의 뿌리가 되기도 합니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한 아버지와 십대 아들이 심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급기야 아들이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다 돌아오지 않자 찾아 나섰습니다. 찾고 찾아도 아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마지막 수단으로 신문에 광고를 내기로 했습니다. 아버지가 낸 문구는 “사랑하는 파코. 정오에 신문사 정문 앞에서 만나자. 모든 것을 용서한다. 사랑한다”였습니다. 스페인에서 가장 흔한 이름 중 하나인 ‘ 프란치스코’를 집에서 애칭으로 부를 때 ‘ 파코’ 라고 한다고 합니다. 다음 날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만나자고 한 그 신문사 앞에 800명의 파코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수많은 아들이 집을 나와 아버지의 용서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건입니다.

 

상처 준 가족을 용서한다는 것은 쉬워 보일 수 있지만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행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믿음의 축복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 사람이 요셉입니다. 요셉의 용서와 원리 요셉은 기적을 행한 적도 없고, 놀라운 예언을 한 적도 없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이 된 것은 그가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을 죽이려 했고 종으로 팔아넘긴 악을 행한 형들을 용서하는 모습때문에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십자가의 용서가 어떻게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의 은혜가 가정에 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의 가정에서 일어난 일이 얼마나 끔찍합니까? 형들이 동생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죽이는 일에 실패하자 종으로 팔아넘겼습니다. 요셉의 이야기가 우리 사회의 이야기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지만, 형들에게 받았던 상처는 치유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상처가 늘 요셉의 마음 한구석에 있었을 것입니다. 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에 왔을 때 요셉은 마음에 숨겨뒀던 상처와도 대면해야 했습니다. 요셉은 그 상처를 십자가로 승리하고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요셉의 생애 클라이맥스는 총리가 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의 기록은 요셉이 형들에게 복수할 힘과 능력이 있음에도 복수하지 않고 사랑으로 용서하고 형들을 대면한 모습을 상세하게 부각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용서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도전이 무엇입니까? 상처를 준 대상이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가족을 용서했을 때 장차 그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이루신 하나님의 용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일어난 아픈 상처를 어떻게 치료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요셉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상처 준 가족에 대한 용서의 원리가 있습니다.

 

용서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첫째, 용서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이루어 집니다. 용서는 일종의 여행 같아서 상처가 깊을수록 오랜 여행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손쉬운 용서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손쉽게 해치우는 용서는 어쩌면 외식일 수 있고, 고통을 대면하기 싫어서 무마하고 덮어버리는 성격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문제를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요셉의 용서는 즉각적이고 즉흥적인 용서가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왔을 때 자신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형들을 시험했습니다.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아세웠습니다. 누명을 씌운 것입니다. 도둑으로 몰아세운 적도 있습니다. 형들을 시험한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찾아가 복수하는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멈춰서 있었습니다. 섣불리 용서한다고 선언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모든 상황에서 형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지 기도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요셉의 용서는 천천히 이루어졌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형들이 삶과 가족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에 요셉의 이야기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요셉이 “다시 올 때는 베냐민을 꼭 데려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막냇동생이 보고 싶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형들이 아버지를 설득해서 베냐민을 데려옵니다. 그 때 요셉이 베냐민의 가방에 자신의 은잔을 넣어 도둑으로 누명을 씌웁니다. 베냐민을 붙잡아두려 했습니다. 거기까지만 보면 요셉이 형들과 관계를 회복하고 그 땅에 살도록 하려는 의지가 없어 보입니다. 베냐민만 머무르게 하려는 의도가 보입니다. 그때 형 유다가 등장합니다. 베냐민이 쓴 누명을 자신이 쓰겠다고 합니다. 베냐민을 놓아주는 대신 자신이 벌을 받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유다는 요셉을 종으로 팔자고 제안한 장본인입니다. 요셉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다가 베냐민을 보호하고 대신 벌을 받겠다고 간청하는 모습을 보면서 요셉이 하나님께서 이 모든 상황에 함께하고 계심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은혜의 마중물’ 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요셉이 주저했을지도 모릅니다. 형들과 관계없이 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셉이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이끄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요셉의 마음을 움직여서 형들을 용서하도록 유다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역사하 시면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을 것입니다. 물론 상대방이 변화 가능성을 보여야만 용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요셉에게 있었던 억눌렸던 마음과 풀리지 않았던 감정, 형들에게 쌓였던 미움이 터져나오는 계기가 된 것은 유다의 간청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의 마음을 만져 주시고, 성령님께서 역사해 주시고,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되지 않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은혜의 마중물을 부어 주시면 우리가 용서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를 기다리며 서두르지 않고 용서를 향해 나가는 여행을 해야 합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는 것도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미움과 분노가 감정 속에만 있지만 오래되면 그것이 인격이 되고 DNA가 되기 때문입니다. 미움과 분노가 DNA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것이 자녀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것을 털어 내는 순간을 바라보면서 용서를 향한 여행을 해야 합니다. 서두르지 않지만, 하나님의 때를 바라보며 용서를 위한 여행을 해야 합니다. 그 시기를 다른 사람이 예측해줄 수는 없습니다. 알려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때를 알려 주실 것입니다.

 

용서는 선물입니다

 

둘째, 용서는 의무가 아니라 선물입니다. 요셉이 의무로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용서를 한 것은 용서가 자신에게도 가장 좋은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미움과 분노를 마음에 가지고 살아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을 얼마나 해치고, 삶을 어둡게 하는지를 체험했을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복수하면 문제가 되고, 행하지 않으면 마음과 생각에 미움과 분노가 가득 차게 됩니다. 요셉도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는 것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미국 풀러신학교 루이스 스미디즈 교수님은 용서를 “하나님께서 발명하신 선물”이라고 정의하며 “하나님이 용서하신다는 것은 하나님 당신 자신에 대한 치료책이기도 하다”고 했습 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요구하고 집을 나갔습니다. 당시 히브 리 문화에서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고 집을 나간다는 것은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유산을 요구하고 집을 나간 것은 아버지를 죽은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죽이는 것과 같은 죄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집을 나간 이후 아버지는 하루도 마음 편한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마음속에 솟아나는 아들에 대한 분노가 날마다 그를 괴롭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을 변화시킬 능력이 없었습니다. 아들을 치유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은 아들을 용서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화해와 용서를 하나로 보고 오해합니다. 용서는 이루어져도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화해는 상호 간에 하는 것입니다. 상대편에게도 깨달음이 있고 뉘우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용서는 일방적입니다. 상대방이 변화되지 않아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용서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내가 용서하면 가해자가 축복된 삶을 살 것 같아서 용서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의 감옥에 갇혀 사는 사람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입니다. 용서는 피해를 본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용서를 통해 자유롭게 되는 최초의 사람이 자기 자신입니다. 나아가 용서는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용서한 만큼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이미 예수 십자가 안에서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고 누리지 못합니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용서의 연관성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를 탕감해줬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갚을 수 없는 액수의 빚입니다. 평생 노력해도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백 데나리온 갚을 수 있는 빚을 진 누군가를 탕감해주지 않았습니다. 처벌했습니다. 자신은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 받았는데, 갚을 수 있는 빚을 진 사람은 탕감해주지 않고 왜 처벌했을까요? 두 가지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받았다는 것을 믿지 않고, 그것을 누리지 않았습니다. 만일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해줬다면 자신이 얼마나 값진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날마다 누리고 체험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각 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가 다른 이를 용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다른 이를 용서한 만큼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고 누린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새로운 기억을 선택

 

셋째, 용서는 망각이 아니라 새로운 기억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용서를 원하지 않고 거부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나쁜 일을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해주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악행을 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자신을 소개할 때 “당신들이 종으로 팔아 넘긴 요셉입니다”이라고 했습니다. 악행을 망각하고 지운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억을 선택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습니까? 형들에 대한 복수의 권리를 하나님께 내어드렸기 때문입니다. 심판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후에 야곱이 죽자 형들이 “이제 요셉이 지금까지는 아버지 때문에 참았는데 이제 우리를 해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두려워 엎드렸습니다. 그때 요셉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여러분, 모든 악행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요셉은 형들의 악행을 망각한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악행에 대한 심판의 권리가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맡겨 드렸습니다. 요셉이 선택한 것이 무엇입니까? 새로운 기억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기억이란 새로운 미래입니다. 새로운 기회입니다. 요셉은 새로운 미래의 문을 여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만일 요셉이 과거에 겪은 악행에 대한 기억에 묶여서 복수하는 일에만 몰두했다면 새로운 미래의 문이 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악행에 대한 복수는 하나 님께 맡기고, 새로운 미래를 바라봤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족의 생명을 지키는 일에 자신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바라본 것입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 제게 가까이 오십시오.’ 그들이 가까이 오자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형님들이 이집트에 팔아 버린 형님들의 동생 요셉입니다.’ 하지만 형님들이 저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거나 자책하지 마십시오. 이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하시려고 저를 형님들보다 먼저 여기로 보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4~5 절).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악행도 하나님께서 선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악이 저절로 선으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통로가 용서입니다. 십자가가 통로입니다. 십자가는 인류 최대의 악행이었습니다. 가장 큰 흠이 없고, 죄가 없는, 완전하고 의로우신 분을 불법으로 무고하게 수치와 모욕을 당하게 하고, 최고의 고통으로 죽게 했습니다. 십자가는 최고의 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십자가를 구원의 십자가로 바꾸셨습니다. 수치의 십자가를 영광의 십자가로 바꾸셨습니다. 죽음의 십자가를 생명의 십자가로 바꾸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 소서”라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용서의 기도가 드려졌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악행이 하나님의 선으로 바뀌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 안에 거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요셉과 같이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선으로 바꾸실 때 사용하는 통로가 십자가의 용서입니다. 우리가 가족에게서 받은 상처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고,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이기 어려워도, 십자가의 용서를 붙잡는 사람에게는 모든 악행이 하나님의 선으로 됩니다. 요셉에게는 가문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었지만 성경 전체를 보면 아브라함의 언약이 요셉을 통해 이루어지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장차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진 대역전의 사건이 이루어지는 예표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깊은 상처를 받았지만, 십자가의 용서를 통해 가족의 생명이 보존될 수 있는 미래의 선을 선택했습니다. 자신을 얽매고 있던 기억 에서 자유로운 기억으로, 자신을 두렵게 하는 기억을 용기 있는 기억으로, 자신을 아프게 했던 기억을 능력 있는 기억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고통은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억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망상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미래의 소망을 여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과거로 닫혔던 미래의 문을 열게 합니다. 우리가 이 문을 열려고만 한다면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혜의 마중물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었던 용서를 하는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과거의 얽매임에서 자유로워지고, 새로운 미래,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체험하는 인생으로 변화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