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영혼이 좋은 땅입니다.
스스로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비유입니다. ‘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 로 잘 알려진 내용입니다. 내용은 매우 단순하지만 그 의미는 매우 깊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다른 비유들을 해석하는 기초가 되기도 합니다.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져서 열매 맺지 못했습니다. 또 어떤 씨는 흙이 얇게 덮여있는 돌밭에 떨어져서 뿌리내리지 못해서
열매 맺지 못했습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가시덤불이 흙의 영양분을 다 가져서 열매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100배, 60배, 30배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 비유를 들으면서 열매 맺지 못한 이유를 둘러싸고 있는 슬픈 소식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길가와 돌밭과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앗들이 열매 맺지 못한 채 생명의 가능성이 파손되었다는 것을 슬픈 소식으로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셔서 호숫가에 있는 많은 무리를 가르치실 때 이 비유를 가장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전혀 다른 동기를 가지고 있거나 호기심 때문에, 또한 사람들이 몰려드니 군중심리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 비유 말씀대로 예수님의 말씀이 열매 맺지 못한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슬픈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는데도 열매 맺지 못하는 그릇된 마음의 상태가 슬픈 소식입니다. 또 한편으로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씨앗이 좋은 땅에만 뿌려지지 않고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에 뿌려진다는 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그릇된 마음의 토양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하나님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놀라운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 놀라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기쁜 소식이자 소망의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토양의 종류는 네 종류의 결정된 인생을 의미하는 것이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길가로 태어나서 길가로 살다가 길가 같은 인생으로 죽고, 어떤 사람은 돌밭으로 태어나 돌밭으로 살다가 돌밭으로 죽고, 어떤 사람은 가시덤불로 태어나가시덤불로 살다가 가시덤불로 죽는다는 결정된 운명의 종류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이들의 마음에 있는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한쪽에는 길가와 같이 단단해진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 한쪽에 돌들이 있어서 말씀의 씨앗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가시덤불이 자라나서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 맺지 못하게 가로막기도 합니다. 그러나 좋은 땅도 있어서 일부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그 비율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토양의 상태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바뀔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소망입니다. 누구든지 한 종류의 마음으로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닙니다. 결정된 운명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좋은 땅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의 씨앗이 열매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과 기대를 가지고 계속 말씀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 상태를 분별하고, 열매 맺는 마음으로 토양이 변화하도록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길가, 반항적인 마음
열매 맺지 못하는 첫 번째 땅은 길가입니다. 길가는 반항적인 마음의 토양을 의미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단단한 길가와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씨앗을 거부합니다. 반항합니다. 대적합니다. 길가는 많은 사람이 밟고 다녀서 흙이 단단하게 굳어버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많은 죄로 인하여 상처와 아픔을 겪게 될 때 우리 마음의 토양이 단단해집니다. 사랑받지 못하고, 가정에서 한 번도 격려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하고, 사회에서 늘 배척당하고, 차별당하고, 무시당하면서 마음의 토양이 굳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대하지 못하고,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는 단단한 마음의 토양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 단단해져서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지도 못하는 마음의 토양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반항, 대적, 불순종하는 마음이 우리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수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거리처럼 인생의 성공을 거듭하고,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존경받는 영향력 있는 사람의 마음은 스스로를 위대하게 여겨서 단단해질수도 있습니다. 많은 상처를 받아서 마음이 단단해지기도 하지만, 많은 성공을 거듭하면서 교만으로 인해 마음이 단단해지는 위험도 있습니다. 어떤 종류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반항적인 마음이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사단은 이러한 마음 상태의 사람이 말씀을 들을 때 별로 염려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그 마음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금방 와서 그 말씀의 씨앗을 가져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영혼과 마음의 토양에 하나님 말씀의 씨앗이 뿌려져 열매 맺는 것이 얼마나중요한지 모릅니다.
인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 아담’ 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 아다마’ 에서 나왔습니다. 흙이라는 뜻입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몸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마음의 토양으로 받아야 존재할 수 있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한 마음이 길
가와 같이 단단해져서 하나님께 반항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사랑해야 할 가족을 등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마땅히 대화해야 할 부부가 일절 말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자체가 대적관계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연합의 관계, 하나 됨의 관계를 유지해야 할 인간이 말씀에 무감각해진다면 그 자체가 대적의 상태입니다. 반항의 마음입
니다.
돌밭, 피상적인 마음
두 번째 열매 맺지 못하는 마음은 돌밭입니다. 돌밭은 피상적인 마음의 토양입니다. 유대 지역의 밭들은 겉은 흙이지만 바로 밑에 돌들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대 지역에는 돌이 많습니다. 실제로 평야가 매우 일부입니다. 돌밭에 있는 흙은 씨앗을 빨리 받아들여서 먼저 싹을 낸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돌이 온돌효과를 내서 싹이 먼저 난다고 합니다.
경험 많은 농부들은 싹이 빨리 나는 것은 결국 뿌리 내리지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 듣기는 잘 듣고 감정적으로 잘 받아들이되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고, 열매 맺지 못하게 하는 인간의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잘 받아들이는 것 같은데 깊이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같은 크리스천인 것 같은데 그 속을 들어가 보면 우상이 있고, 미신이 있습니다. 피상적으로만 크리스천이고 내면은 돌에 막혀서 제대로 열매 맺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돌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가 의심 없이 반응하도록 만드는 세계관을 의미합니다. “세계관이란 창자 속에 내려가 있는 믿음”이라는 정의가 있습니다. 이처럼 세계관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반응하게 합니다. 안경을 쓰면 렌즈가 어느 정도인지, 어떤 색인지, 눈과 일치되어서 알 수 없고 느낄 수 없습니다. 그대로 보게 됩니다. 노란색을 쓰고 있으면 세상이 노랗게 보이고, 빨간색을 쓰고 있으면 빨갛게 보입니다. 우리 마음의 토양에 큰 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부하는 수많은 돌이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습니다. 근본적으로는 무신론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 위에 유물론, 회의론, 진화론 등 수많은 사상이 돌이 되어서 인간의 마음에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21세기 이 세상을 뒤덮고 있는 큰 돌이 무엇입니까?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는 사상입니다. 흔히 ‘ 포스트모던주의’ 라고 말하는데 권위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도전하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어, DNA가 그것밖에 없는데 “왜 남자와 여자밖에 없느냐, 왜 그런 성의 구분을 부여받아야 하느냐, 성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유럽과 미국의 어느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자기를 남자로 느끼는지 여자로 느끼는지 그래프를 그려보라고 합니다. 학생은 분명히 남자인데 자신을 여자로 느끼는지 남자로 느끼는지를 확인해보라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이 혼동하게 합니다. 성을 스스 규정할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 사상에 박혀 있는 돌이 무엇입니까? 태어나면서부터 받아들여야 할 절대적인 권위의 진리가 세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태어나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자기가 알아서 정하라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 엄청난 돌들이 인간의 마음에 박혀 있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그 순수하고 깨끗한 어린이의 마음에 돌들을 하나씩 박아 놓는 것입니다. 세상의 철학과 사상과 헛된 의식의 돌을 박아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씨앗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여러분,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인간이 받아들여야 할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가 중요합니다. 바로 이것이 돌의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그 명제는 절대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스스로 세상에 절대적으로 받아들일 권위나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붙잡고 모든 세상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그것만은 절대적으로 여깁니다. 그 명제대로라면 그것도 상대적이어야 할 것 아닙니까? 거짓입니다. 앞
뒤가 다른 것입니다. 절대 혼동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자유로 포장하든, 인권으로 표현하든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열매를 보면 압니다. 큰 돌들이 마음의 토양에 박혀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수납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듣고 싶은 대
로 듣고 봅니다. 심지어 ‘ 퀴어신학’ 을 만들었습니다. 성경을 동성애를 지지하는 책으로 바꿔 버립니다. 성경도 자기식으
로 해석해서 목적과 주장을 합리화하도록 바꿔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이
러한 마음의 토양에 있는 돌들을 부숴버리는 능력이 있기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로운 영을 줄 것이다. 내가 너희 육신으로부터 돌과 같이 굳은 마음
을 없애고 너희에게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다”(겔36:26).
가시덤불, 이중적인 마음
세 번째 열매 맺지 못하는 땅은 가시덤불에 덮여있는 땅입니다. 가시덤불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의 마음에 있는
이중성을 의미합니다. 가시덤불이 많이 자라나는 흙의 특징은 자양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영양분이 있는데 그 영양분
을 가시덤불이 먼저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씨앗이 열매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토양이 영양
분이 가장 많을 때 그 영양분을 가시덤불이 빼앗아 가서 말씀의 씨앗이 열매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몸 안에 생기는 암
세포의 실체가 무엇입니까? 정상적인 세포보다 빨리 번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세포가 가져가는 영양분을
뺏어 가는 게 암세포의 본질입니다. 이처럼 우리 영혼과 마음의 암세포가 마땅히 열매 맺어야 하는 에너지를 뺏어 가
서 말씀의 씨앗이 자리 잡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걱정과 돈에 대한
유혹입니다. 마음을 빼앗을 정도로 좋은 것들이 가시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자녀가 가시가 되고, 부모가 가
시가 되고, 지식과 명예, 좋은 일들이 가시가 되기도 합니다. 우선순위가 뒤바뀐 모든 것이 가시가 됩니다. 결국 그 가시
가 우상이 됩니다. 말씀의 씨앗이 뿌리내리는 것보다 빨리 자라는 가시가 마음에 덮여있을 때 이중적인 마음이 됩니
다.
좋은 땅, 순종하는 마음
넷째로 열매 맺는 좋은 땅이 있습니다. 좋은 땅은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열매를 맺어 100배, 60배, 30배 결실을 낸다
”(마 13:23).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뿌리내려서 열매를 맺을 때는 반드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가 한 영혼뿐만 아니라
다른 영혼과 온 세상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가 예배의 자리로 나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을 처음 들었던 소수의 제자들에게 말씀의 씨앗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 맺었고, 오늘 우리에게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말씀의 씨앗이 우리에게 임해서 또 다른 열매들을 맺
어 가는 것입니다. 세 단계의 하나님 말씀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예수님께서 소수의 제
자들의 마음에 말씀의 씨앗을 심으시는 단계입니다. 저는 이것을 ‘ 30배의 열매’ 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두 번째 단
계는 말씀의 씨앗이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성장하는 단계입니다. 이것을 ‘ 60배의 열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그동안 뿌려졌던 씨가 맺은 열매들을 추수하고 수확하는 단
계입니다. 이것을 ‘ 100배의 열매’ 라고 규정하고 싶습니다.
좋은 땅은 어떤 땅입니까?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이 전혀 없고, 순수하게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열매
맺는 땅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마음은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만물보다 심히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네 종류의 땅은 결정된 운명으로 살아가는 인생을 말씀하시
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 있는 네 종류의 토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네 가지 토양
이 모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시덤불이 많고, 어떤 사람은 돌밭이 많고, 또 어떤 사람은 단단한 길가가 많고, 또 어
떤 사람은 좋은 땅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네 종류의 토양이 모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땅이란 자
신 안에 네 종류의 토양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 상태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분별하고,
깨닫고,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영혼이 좋은 땅입니다.
C.S. 루이스가 영적 스승으로 여긴 분이 조지 맥도날드 목사님입니다. 그분의 글과 설교를 통해 회심했기 때문입니다.
C.S. 루이스는 조지 맥도날드 목사님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영에 이처럼 가까이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이분보다 더 가까이 있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
극찬입니다. 그런데 정작 조지 맥도날드 목사님은 자신의마음 토양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영혼은 척박한 땅, 기근의 땅, 여기저기 잡초가 가득하고 무엇인가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곳이다.”
여러분, 누가 그리스도의 영에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까? 내 영혼이 얼마나 척박하고, 얼마나 기근이 있고, 얼마나 가
시가 많고, 얼마나 큰 돌이 있고, 얼마나 단단한지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영혼이 좋은 땅입니다. 가시와 같고,
길가와 같고, 돌밭과 같은 마음이 변화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성령의 능력으로 마음의 토양이 변화
될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이 변화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영혼이 좋은 땅입니다. 스스로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
리 안에 박혀 있는 엄청난 돌은 스스로 빼낼 수 없습니다. 가시도 스스로 뽑을 수 없습니다. 길가와 같이 단단한 마음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에
게 성령의 능력이 부어질 때 묵은 마음의 토양이 기경되는 것입니다. 가시덤불이 불태워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돌이 부서지는 것입니다. 마음의 토양은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 마음
에도 변화되는 좋은 땅이 있습니다. 그 영혼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변화의 가능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마음의 토양은 변화될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마음에 있는 완악한 마음,
죄로 말미암아 상처 입고, 굳어지고,
죄로 말미암아 들어있는 바윗돌과 가시덤불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깨어지고 태워지고 변화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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