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걱정으로 삶을 무너뜨리지 않고,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괴로움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이 믿음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맡아서 걱정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으로 충분하다”(34절).
신학교 시절 뒷산에 올라 산책하고 잠시 기도하며 박윤선 목사님의 묘비에 쓰여 있는 이 말씀을 많이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국을 대표하는 성경학자의 묘비에 쓰여 있는 구절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성경 전체 구속사의 뼈대를 이루는 아주 귀한 말씀이 많이 있는데 왜 하필 이 말
씀일까 생각도 했습니다. 그분이 너무 평범해 보이고 신학적이지 않은 것 같은 말씀을 평생 좌표로 삼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복잡한 신학을 담고 있지 않을지라도 가장 중요한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 주시는 말씀입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은 미래에 대한 어떤 계획이나 준비없이 아무렇게 살라는 말씀이 분명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미래에 대한 철저한 준비와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탑을 세우려고 한다면 완공될 때까지 비용을 계산해 보아라”, “전쟁을 하면 과연 그 전쟁이 승산이 있는지 정확하게 판단해 보아라”, “예수님의 제자로서 무엇을 포기해
야 하는지를 계산해 보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더 나아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게 하지도 말라”고 교훈했습니다. 갈라디아서 말씀에서는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결코 만홀히 여기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은 내일에 대한 준비 없이 오늘의 의무를 저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일 죽을 것이니 그저 먹고 마시자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내일에 대한 걱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에 대한 걱정이 가득 차서 회피하고 잊어버리고자 마취상태에 들어가는 것뿐입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은 걱정으로 내일을 맞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내일을 걱정하는 삶을 살지 말라는 의미입니
다. 어떻게 하면 믿음 안에서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자연 만물에 하나님의 손길이 담겨있어서 진리와 섭리를 발견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종종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자연 현상을 이끌어 오시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그리고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 들의 백합화, 들풀을 보면서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삶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연의 피조물을 비유하실 때 너무 많은 것을 해석하려고 하면 본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실 때 모든 것을 해석하려고 하면 잘못 해석할 수 있습니다. 비유 상황에서 주시는 교훈에 집중할 때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저는 자연의 세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유심히 보곤 합니다. 얼마 전에는 새끼 새들을 양육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새들이 새끼들을 낳기 위해서 부리로 둥지를 만드는 모습이 기묘했습니다. 새들은 자기 몸만 들어갈 수 있는 출입구를 만들어서 가족을 보호하고, 애써 만든 둥지 안에서 새끼들을 낳습니다. 어미새는 어디선가 먹이를 마련해서 새끼 새들의 입에 넣어줍니다. 놀라운 것은 굶어 죽는 새가 없습니다. 하늘을 날다가 기진맥진해서 바다에 떨어져 죽는 새가 없습니다. 욥기에 그말씀이 나옵니다.
“저 하늘을 나는 바다를 나는 새를 누가 먹이는지 너는 아는가? 하나님께서 그 모든 새들을 먹이신다.”
새가 하늘 높이 날아서 넓은 세상을 본다고 할지라도 내일은 볼 수 없습니다. 새가 여러 날을 비행한다고 할지라도 내일은 볼 수 없습니다. 새는 언제나 오늘을 살 뿐입니다. 백합화와 들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일이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이 전부인 들풀도, 오늘 피었다 지는 꽃도 내일이 없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대충 만들어도 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잠시 피었다 지는 꽃도 완벽한 꽃으로 창조하십니다. 꽃에 향기가 있고, 아름다움이 있고, 색이 있습니다. 잠시 피었다 지는 꽃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자연으로 나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관점에서 새와 꽃을 보면 내일이 없이 오늘만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다루시
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내일을걱정하지 않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일을 나의 날로 생각하지 말라
어떻게 하면 내일에 대한 걱정을 버릴 수 있을까요? 세 가지 중요한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첫째, 내일을 나의 날로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내일이 나에게 보장된 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 개역개정).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저녁에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고 쉬려고 했던 직장인이 퇴근길에 쓰러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이 보장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의 시간도 보장된 사람이 아닙니다.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날만 살 뿐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가 내일을 계산하지 않고 오늘만 살아가고, 내일이 보장되지 않고 불에 던져질지도 모르는 들풀처럼 오늘만 우리에게 허락된 날입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는 종말의식을 가지고 살면 내일에 대한 걱정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중병에 걸려서 병원으로부터 일주일밖에 살 수 없다는 통지를 받은 성도님이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목회자가 그 가정을 위로하려고 방문했습니다. 그때 그 성도님이 목회자에게 이렇
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병원에서 저에게 앞으로 일주일밖에 살 수 없다고 말하더군요. 저는 정말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매일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여기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내일이 없다고 여기며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일주일이나 남았다니요. 감사합니다.”
여러분,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닙니다. 내일이 나의 날이 아니면 아무렇게나 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살아보십시오. 가장 소중한 것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하루를 살 것입니다. 이러한 종말의식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도 ‘ 오늘’ 이라는 단어가 중요하게 들어가 있습니다. 먼 미래에 주의 나라가 임하고, 먼 미래에 악한자에게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오늘 주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내일의 괴로움을 만들지 말라
둘째, 스스로 내일의 괴로움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유명한 기독교 철학자 쉐렌 키에르케고르가 “내일에 대한 걱정은 인간 스스로가 발명한 괴로움”이라고 말했습니다. 인
간 스스로 만들어내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오늘에 해당하지 않는 괴로움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괴로움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괴로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날 그날 괴로움이 있습니다. 오늘의 괴로움이 있고, 내일이 주어진다면 내일의 괴로움도 있을 것입니다. 복음은 세상의 괴로움이 없을 거라고 보장하지 않고, 괴로움이 잠시만 있을 거라고 보장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 인생에 괴로움이 존재하고, 그 괴로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기고, 괴로움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체험하는 삶을 설명합니다. 복음은 “내일 일은 내일이 맡아서 걱정할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내일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일을 주신다면 내일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괴로움이라면 하나님께서 이길 힘을 주실 것입니다. 바로 이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내일의 괴로움을 이길 힘이 오늘 주어지지 않습니다. 내일 주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일의 괴로움을 미리 끌어옵니다. 그러면 괴로움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날 그날 이길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괴로움보다 괴로움을 생각하면서 가져온 걱정이 더 힘든 것 아닙니까? 불필요한 괴로움을 발명하지 마십시오. 내일의 괴로움을 앞서 끌어당기지 마십시오. 걱정은 내일 그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내일은 우리에게 없다고 생각하고 내일의 괴로움을 끌어오지 않는다면 우
리는 이겨낼 수 있습니다. 매일매일 주어지는 괴로움을 이길 힘을 하나님께 받고, 그 괴로움 속에서 변화되고, 그 괴로움 속에서 영원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괴로움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원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대한 정을 끊는 것입니다. 정이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괴로움의 중요한 목적입니
다. 이 땅의 괴로움 속에서 우리는 영원을 더욱 갈망하게 됩니다. 장애와 고통, 질병 속에 있는 사람들은 영혼을 더욱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잠시 살다가 소멸하는 존재로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절대로 소멸하지 않습니다. 영혼은 불멸합니다. 영혼은 영원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십자가에 죽으신 몸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몸은 곧 성육신하신 몸입니다. 바로 그 몸이 고난 당하셨고, 그 몸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 몸이 부활하셨고, 그 몸이 승천하셨고, 그 몸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바로 그 몸이 영원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씨앗처럼 소멸하는 것 같지만 우리의 몸을 통하여 부활의 몸을 입게 됐됐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영원하다는 것을 인지할 때 모든 괴로움을 통해 영원을 사모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
리에게 주신 고난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날 한 날을 대할 때 내일이 아닌 영원으로 의식하는 것이 중요합니
다. 여러분, 우리에게 내일은 없습니다. 영원만 있을 뿐입니다. 영원한 오늘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일 일을
아셨습니다. 내일 제자들이 배신하고, 도망가고, 불법 재판에 넘겨지고, 고난받고, 조롱받고,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고통을 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잡혀가시기 전날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던 최후의 만찬과 제자들을 섬기는 모습을 보면 내일의 고통을 아는 분 같지 않습니다. 만일 내일 우리에게 엄청난 고통이 있을 것을 안다면 오늘
우리는 내일에 대한 걱정으로 떨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내일 있을 십자가의 고통을 어떻게 오늘 이겨낼 수 있었
습니까? 영원을 의식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문제 가운데 계십니까? 고민하고 계십니까? 잠 못 이루게 하는 문제가 있습니까? 영원을 대입해 보
십시오. “이 고민을 영원히 할 고민인가? 영원히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고민인가?”라고 질문해보십시오. 그게 아니라면
버리셔야 합니다. 지금 우리를 괴롭게 하는 문제가 영원히 우리를 괴롭게 할 문제가 아니라면 자유할 수 있습니다. 예
수님께서 내일 있을 십자가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는 영원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연적인 생명은
끝나지만,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을 살 때 영원을 사는 것입니다. 내일은 없지
만 영원은 있습니다.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내일을 허락하신다는 것은 영원에 속한 오늘을 사는 것
입니다. 매일 영원에 속한 인생으로 살아갈 때 내일에 대한 걱정이 우리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내일의 괴로움이 있
다면 그 괴로움을 이길 힘을 내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생이 믿음의 삶입니
다. 예수님은 내일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을 ‘ 믿음이 적은자들’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일이 나의 날이라고 생각하
고, 내일의 걱정을 오늘 가져와서 괴로워하고, 영원에 속한 인생을 바라보지 못하고, 좁은 시각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사람을 가리켜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세 가지 믿음
‘하물며’, ‘아신다’, ‘더해 주신다’
예수님께서 세 가지 믿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믿음은 ‘ 하물며’ 의 믿음입니다.
“오늘 있다가도 내일이면 불 속에 던져질 들풀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는 얼마나 더 잘 입히
시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30절).
여러분, 성경을 암송할 때 완벽하게 외워야 암송한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의 능력을 믿는 게 진짜 암송입니다. 저 공
중의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 하루 있다가 불에 던져지는 저 들풀도 아름답게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하물며 나와 같이 하
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이를 돌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두 번째 믿음은 ‘ 아신다’ 의 믿음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이방 사람들이나 추구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이런 것이 필요하다는 것
을 아신다”(32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모르기 때문에 알려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
리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줄 모르고, 내 능력으로 얻은 줄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 번째 믿음은 ‘ 더해 주신다’ 의 믿음입니다.
“오직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너희에게 더해 주실 것이다”(33절).
홍해선교회를 만들어서 40년 동안 중동 선교를 했던 캐나다의 한 의료선교사님에게 “40년 동안 어떻게 이 많은 사역
을 감당했습니까? 어느 단체가 후원을 했습니까?”라고 질문했더니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저의 후원 단체는 마태복음 6장 33절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더해 주시는 하나님의 대한 믿음입니다. 먼저 구하라는 것은
앞서 우리가 말하는 의식주를 비롯한 모든 삶의 필요를 예수님께서 무시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염세주의, 폐쇄주의,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순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걱정이 있
다면 나머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진짜 해야 할 걱정을 하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에 대한
간절함 있는지를 걱정하라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짜 걱정해야 할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 나
라의 의가 있는지, 우리 안에 영생이 있는지, 우리 안에 합당한 믿음이 있는지, 우리 안에 부활의 소망이 있는지 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만 있어야 합니다. 나머지는 더해 주시는 것입니다.
C.S. 루이스가 우선순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번째 것들을 첫 번째 놓을 때는 그것을 얻을 수 없다. 첫 번째 것들을 첫 번째에 놓을 때 두 번째 것들을 얻을 수
있다. 첫 번째 것들을 첫 번째에 놓을 때 두 번째 것들은 억눌려지지 않고 오히려 증가된다.”
가장 중요한 것을 먼저 할 때 나머지는 덤으로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내일의 걱정과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내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오늘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일의 걱정으로 삶을 무너뜨리지 않고,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괴로움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이 믿음의 삶입니다. 내일의 걱정으로부터 자유하고,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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