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길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속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고난이 아니면 좀처럼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은 아니지만, 고난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 꿇지 않는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때로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것은 약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완악함이 때로 고난을 통하여 깨어짐으로 참된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다윗이 ‘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이라 불리게 된 것은 그가 많은 고난 속에서 기도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위협으로 적어도 10여 년 이상 광야와 동굴과 심지어 이방 나라까지 도망을 갔습니다. 때로는 미친 행동을 하면서까지 숨어다니고 도망자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다윗이 지은 시편 대부분이 그가 도망자 생활을 하면
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내용입니다. 다윗은 고난 속에서 기도를 배웠습니다. 만일 다윗이 도망자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하고 겸손하게 부르짖었던 기도를 왕이 된 이후에도 계속 했더라면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불필요한 고난을 받지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택하여 부르셨지만 그를 곧바로 왕궁으로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왕궁 대신 동굴로 보내셨습니다. 사울왕을 통하여 주어진 모진 고난과 위험에서 그를 훈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낮추시고 후에 들어 쓰십니다. 먼저 높이면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아시기 때문에 처절하게 낮추시고 후에 사용하십니다.
동굴에 숨어 있을 때 드린 기도
시편 142편은 57편과 더불어 다윗이 동굴에 숨어 있을 때 드린 기도입니다. 성경에는 ‘다윗의 마스길, 다윗이 굴에 있을 때 한 기도’라고 되어있습니다. ‘ 마스길’ 은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다윗이 동굴에서 드린 기도를 통해 배운 교훈을 시로 남겼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의 휘하에 있던 3천 명의 군사에게 포위당하고 쫓겨 다닐 때 동굴에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동굴이 ‘ 아둘람’ 이라고 불리는 동굴이었을 것입니다. 후에 이 동굴에 형제들과 원통한 이들이 모여들어 400명이 함께 공동체 생활하는 곳이 되었다고 사무엘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찾아오기 전에는 다윗 홀로 동굴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때는 참으로 외롭고 힘겨운 장소였을 것입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어둡고 캄캄한 곳이었
습니다. 아래에는 무시무시한 골짜기가 있고, 한 발짝이라도 잘못 내디디면 골짜기에 빠질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장소였습니다. 무엇보다 다윗의 영혼이 버림받고, 원수의 공격에서 그를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처절한 고독 속에서 그가 겪었을 고통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인간과 세상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을 끊음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을 의지하는 영혼으로 변화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바알 선지자들과 영적 대결에 사용하시기 전에 그를 그릿시냇가로 보내서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훈련하신 것과 같습니다. 모세를 출애굽 지도자로 사용하시기 전에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마른 막대기에 불과한 존재임을 알게 하고 그 후에 사용하신 것과 같습니다. 다윗은 동굴 속에 숨어 있는 동안 시편 142편과 57편 같은 신앙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되는 믿음의 교훈을 남겼습니다.
하나님께는 전혀 숨길 필요가 없다
다윗이 동굴 속에서 한 기도를 통해 배운 교훈이 무엇입니까? 첫째, 아무리 견디기 힘든 고통스러운 마음일지라도 하나님께는 전혀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목소리를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내 목소리로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내가 그분 앞에 내 불평을 털어놓았으며 그분 앞에 내 어려움을 보여 드렸습니다”(1~2절).
1절 원문을 보면 ‘ 나의 목소리’ 라는 단어가 두 번 강조되었습니다.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 소리 높여’ 라고 되어있는데 ‘ 나의 목소리’라는 표현이 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우리말 성경이 잘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나의 목소리는 고상하고 유식한 언어가 아닙니다.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 마음에서 터져 나오는 억울함, 상처, 아픔, 불평, 두려움등을 빠짐없이 하나님 앞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그분 앞에 내 불평을 털어놓았다”고 했는데 ‘ 불평’ 이라는 단어는 불평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을 낱낱이 살피면서 그 사정을 드러냈다는 의미입니다. 영어 ‘ 컴플레인(complain)’ 이라는 단어는 일부분이고, 오히려 ‘ 콘템플레이션(contemplation)’ 이라는 단어가 깊은 묵상 가운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영혼을 낱낱이 드러내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지만 얼마나 피상적입니까? 얼마나 남의 문제처럼 기도합니까? 또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도 포장하고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동양 문화권과 유교 문화권에서는 수치를 감추는 것을 미덕처럼 여깁니다. 자신에게 있는 부정적 감정을 가리고, 말하지 않는 것을 미덕이라고 보는 흐름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물론이요, 하나님께도 말씀드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할 텐데 나까지 기도해서 힘들게 할 필요가 있나’ 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지 않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조차 고상하고 멋있는 모습만 나타내려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목소리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있
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숨길 필요가 없는 축복을 가리는 것입니다. 코로나19 팬더믹으로 온 세계가 동굴 속에 빠져 있습니다. 끝을 모르는 터널을 지나고 있는데 그로 인해서 개인과 가정과 나라에 생기는 어두움을 하나님께 낱낱이, 꾸밈없이 표현해야 합니다. 그것이 두려움이든 아픔이든 상처이든 불평이든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서
는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아시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드러내고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의 자세, 정직한 자세를 우리가 다시 한번 배울 수 있기를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알고 계신다
둘째,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위험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알고 계십니다.
“내 영이 마음속에서 실망할 때도 내 길을 아는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내가 걸어가는 길에 그들이 몰래 덫을 숨겨 놓았습니다. 내오른쪽을 보아도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내가 피할 곳도 없었으며 내 영혼에 관심을 갖는 사람도 없었습니다”(3~4절).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주변에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고 의논할 사람도 없는 외로운 상황에서는 더욱 방황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위험한 상황 속에 나는 어떤 길을 가야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내 길을 아신다.”
바로 이것이 동굴 속에서 드리는 기도를 통해 다윗이 배운 영적인 교훈입니다. 지금 다윗이 처해있는 상황이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계획 속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위험한 길을 걸어갈 때 필요한 힘과 능력과 지혜와 은혜도 하나님께서 정확한 때에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욥도 동일한 고백을 했습니다. 욥의 고난 속에서 주옥같은 믿음의 고백들이 나오는데
그중 하나가 욥기 23장 10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내가 가는 길을 아시는데 그분이 나를 시험하시고 나면 내가 순금같이 나올 것이다”(욥 23:10).
“나는 갈 길을 모르지만, 하나님은 나의 길을 아신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나의 길을 아신다.”
여러분, 이 고백이 왜 중요합니까? 인생을 걸어갈 때 그 선택이 하나님 중심이 되지 않으면 모든 길이 위험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걸어가는 길은 결코 안전하지 않습니다. 원수들이 숨겨 놓은 덫이 곳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원수의 덫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길을 아시는 하나님
께 먼저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피난처가 되신다
셋째, 감옥과 같은 곳에 갇혀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습니다. ‘ 주는 내 피난처이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받는 내 몫이십니다.’ 내 부르짖음에 귀기울이소서. 나는 너무나도 비참합니다. 나를 핍박하는 사람들에게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합니다. 내 영혼을 감옥에서 풀어 주셔서 내가 주의 이름을 찬양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를 너그럽게 대하시면 의인들이
내 주위에 몰려들 것입니다”(5~7절).
다윗이 극심한 고독 속에 있는 상황을 ‘ 영혼마저 감옥에 갇혀 있다’ 고 표현합니다. 육신은 동굴에 있고 영혼은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다윗은 또다시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육신은 동굴에 영혼은 감옥에 있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피난처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분깃이라는 고백입니다. “주는 내 피난처시오,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받는 내 몫이십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다윗은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추방당하고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누릴 수 있었던 자신의 분깃도 모두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분깃이 되시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몫이 되신다고 고백합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 할 수 있는 위대한 고백은 “세상 모든 것이 나에게서 떠났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
이기에 두렵지 않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정직한 마음으로 자신의 아픈 마음을 고백하지 않
았더라면 이런 믿음의 고백에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있는 상황 그대로 하나님 앞에 꾸밈없이 나아가면서 하나님이
피난처요, 분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소망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 깨달음을 얻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다윗
을 왕궁으로 보내기 전에 동굴로 먼저 보내셔서 믿음을 체험하게 하시고,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소망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태어나셨습
니까?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동물의 우리에 누이셨습니다. 예수님께
서 태어나신 장소에 대한 학설들이 몇 가지 있는데 하나는 마구간이고, 또 하나는 지하 동굴입니다. 베들레헴 근처 산
악지대 거주민들의 마구간은 사실 지하 동굴이었습니다. 마구간이면서 동시에 지하 동굴이었다는 학설을 저는 믿습니
다. 요셉과 마리아가 머물 곳이 없어서 갈 수밖에 없었던 곳은 사람들의 발밑에 있는 지하 동굴이었습니다. 세상의 바
닥 밑에 있는 곳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땅 아래 하늘이 임한 것입니다. 세상과 동등한 수준으로 오셨을 뿐만 아니
라 세상보다 낮은 곳으로 오신 것입니다. 다윗이 있는 아둘람 동굴같이 어둡고 침침한 곳으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여러분, 고난 속에 있기 때문에 영원히 감옥에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고난이 없어도 영혼이 감옥에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지 못합니다. 고난에 처하면서 비로소 발견한 것이지 고난이 없을 때도 영혼은 감옥에 있습니다. 동굴에
있으나 왕국에 있으나, 가난하나 부하나 모든 인간은 영혼이 감옥에 있습니다. 죄의 감옥, 세상의 감옥, 자기 자아라는
감옥에 영혼이 갇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지하 동굴에 낮아지심으로 임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낮아지신 것은 모든 영혼을 감옥으
로부터 자유롭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동굴 같은 고난에 처하지 않으면 자신의 영혼이 갇혀 있는지를 알지 못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동굴에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울을 통해 다윗이 험악한 고난을 받게 하
셨을까요? 짐 에드워드라는 분이 쓴 <세 왕 이야기>라는 책을 보면 명쾌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로
하여금 다윗을 고통 속에 두신 것은 다윗 안에 있는 또 다른 사울을 미리 제거하려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무리 선하고
의로운 사람일지라도 권력이 주어지고, 왕의 위치가 되면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가 되는지, 사울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셨기 때문에 사울로 하여금 미리 다윗을 훈련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윗 안에 있는 사
울을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영혼은 죄의 감옥, 자기 자아의 감옥, 이 세상의 헛된 이념과 사상의 감옥에 갇혀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극심한 동굴에 처했을 때 비로소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감옥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의지하고 기도합니다.
“주님 나를 이 영혼의 감옥에서 풀어 주시옵소서.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
의 피난처시요 분깃임을 고백하며 찬양의 회복을 소망합니다. 공동체의 회복을 소망합니다.”
예배의 기쁨, 교제의 즐거움 소망
“내 영혼을 감옥에서 풀어 주셔서 내가 주의 이름을 찬양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를 너그럽게 대하시면 의인들이 내
주위에 몰려들 것입니다”(7절).
탄식과 하소연으로 시작했던 기도가 예배의 기쁨을 소망하고, 교제의 즐거움에 대한 소망으로 끝납니다. 이것이 하
나님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언제나 우리를 참된 예배자, 참된 교회의 일원으로 부르시는 것과 관련 있습니
다. 그래서 다윗을 모진 고난 속에, 어두운 동굴에 처하게 하신 것입니다. 동굴 속에서 메아리치던 다윗의 기도가 하나
님께 드려지는 찬송으로 변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처절한 고독 속에 내버려 두신 것은 장차 그에게 주어질 참된 하나
님의 백성들과 교제의 축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해졌습니까?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혼의 감옥에서 우리가 건짐을
받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고난, 동굴 속에 우리가 던질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의 피난처이시고 나의 분깃이심을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을 선물 받았습니다. 우리는 길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그 길을 아십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속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가 우리의 살길임을 믿습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정직하고 꾸밈없이 말씀드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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