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하박국 1:1~11)

새벽지기1 2021. 6. 13. 07:00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믿으십시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박국서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질문하는 사람과 그 질문에 대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박국서는 하박국 선지자와 하나님과의 대화 내용으로 구성된 매우 독특한 선지서입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백성들에게 전하고 때로 교훈하고 책망하는 역할을 하지만,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따져 묻고, 항의하고, 불평하고, 질문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질문하는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매우 자상하게 응답해 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질문을 정죄하거나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질문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고, 깨달을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의 학습이 발달하려면 반드시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신앙의 학습도 마찬가지입니다.“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합니다. 불신의 의문이 아니라 알고자 하는 의문이요,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 고자 하는 의문입니다. “참된 믿음은 이해를 추구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알고자 하는 것은 믿기 때문입니다. 때로 불신자들을 만나면 불필요한 것 같은 질문을 합니다. 그런 질문을 정죄하거나 비판하거나 외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질문 같지만, 그분에게는 그 질문이 꼭 필요합니다. 그 질문을 통과하고,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 질문을 존중하고, 함께 고민해 보고, 비웃지 않고 존중하면 그 질문이 믿음으로 들어가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박국 선지자를 그렇게 대하셨습니다. 질문하는 선지자 하박국 하박국과 비슷한 질문을 던진 인물이 구약의 욥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과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욥은 개인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께 질문했습니다.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께 온 징벌이라면 “왜 아무 죄가 없이, 또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고자 했던 자신이 이런 징벌을 받아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하나님께 던졌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 역사와 시대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땅히 징벌하셔야 하는 불의와 왜곡된 폭력들을 왜 내버려 두고, 개입하지 않으시고, 정의로 심판하지 않으십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베일에 가려진 인물입니다. 하박국 선지서 외에는 다른 곳에 그 이름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가문 사람인지, 어디서 태어났고 구체적으로 어떤 시대 사람인지 추정하기 어렵습니다. 대략적으로 추정할 뿐입니다. 하박국서의 내용에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서 유다 백성을 심판하신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봐서 주전 587년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멸망되는 시기 이전 사람임은 분명합니다. 그 땅에 폭력과 강포와 불의가 가득한 것으로 봐서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멸망 이전에 극심한 죄악의 상태에 처해있었던 시점이었을 것입니다. 학자들은 여호야김 시대였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 하박국’ 이란 이름은 ‘ 포옹하다’ , ‘ 끌어안다’ 는 뜻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 선지자의 이름을 이렇게 해설했습니다. “하박국은 포옹자이다. 우는 아이를 껴안아서 달래듯이 하나님께서 뜻을 정하기만 하면 회복될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그 백성을 끌어안고 포옹하고 위로하고 붙잡아 주었던 선지자다.”

 

하박국 선지자는 중요한 질문 두 가지를 하나님께 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왜 악인들이 정의를 왜곡하도록 내버려 두십니까?”입니다.

불평 섞인 질문입니다. “악이 횡행하도록 왜 선하신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내버려 주십니까? 왜 개입하지 않으십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나는 악인들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바벨론으로 하여금 그 악인들을 심판하게 할 것”입니다. 바벨론에 의하여 주전 587년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되는 사건을 미리 말씀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대답 일부는 받아들이면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악에 대하여 심판할 것”이라는 대답은 당연히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을 통해서 심판하신다는 대답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바벨론이 더 악한 나라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더 잔인하고 악한 바벨론을 사용해서 심판하신다는 대답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두 번째 질문은 “왜 더 악하고 잔인한 바벨론에 의해서 무참히 짓밟히도록 하십니까?” 입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째 질문에 “바벨론도 그들의 악에 대해 동일한 심판을 받을 것” 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으로 악을 심판하시고, 또 심판의 도구로 사용한 악인들까지 공의롭게 다루십니다. 그래서 더 크신 하나님의 선을 이루어 가십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영혼

 

“보아라.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의롭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합 2:4). 여러분, 실제 믿는 자들이 어떻게 살아났습니까? 심판의 한복판에서 하나님께서 살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 심판의 길은 죽는 길 같지만 거기에 살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는 멸망인 것 같고, 죽음인 것 같고, 종말인 것 같지만 하나님의 심판에는 온전하게 구원하는 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처방을 받아들이는 영혼에게는 믿음으로 살아나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노아도 믿음으로 살았 습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의 삶의 초점 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살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구원의 약속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살길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 17절에서 하박국 2장 4절 말씀을 인용하여 로마서 전체 줄거리가 나옵니다. 이 말씀은 종교개혁의 모토가 되기도 합니다. 마틴 루터에 의해서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이 발 견됩니다. 하박국은 이미 종교개혁의 메시지를 하나님께 직접 받은 것입니다. 하박국이 깨달은 말씀은 어떠한 시대이든, 하나님이 역사를 어떻게 움직이시든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영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이 3장에 이르러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하박국이 가졌던 의문, 불평, 항의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과 경배로 바뀌게 됩니다. 하박국의 항의가 찬양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가 가졌던 두려움이 믿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가 가졌던 염려가 하나님께 대한 경배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질문이 찬양되고, 항의와 불평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되고, 염려와 두려움이 믿음과 경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 워런 위어스비’ 라는 목사님이 하박국서에 나타난 이 변화를 장마다 세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1장 염려자, 2  관찰자, 3장 예배자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변화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신실하게 동행하는 성도의 실망

 

“오 여호와여, 제가 언제까지 부르짖어야 합니까? 주께서 듣지 않으시고, ‘ 폭력입니다’ 라고 제가 주께 외쳐도 주께서는 구해 주지 않으십니다. 왜 저로 하여금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왜 죄악을 쳐다보게 하십니까? 파괴와 폭력이 제 앞에 있습니다. 갈등이 있고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지 않고 정의가 아주 실행되지 못합니다.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 버려서 정의가 왜곡되고 있습니다”(2~4절). 하박국의 실망은 불신자의 실망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신실하게 동행하는 성도의 실망입니다. 불신자는 하나님께 실망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기대하는 바도 없기 때문입니다. 실망하는 영혼이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불신의 실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지하고 동 행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영혼이 실망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신실하게 하나님과 동행했기에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선하신 행동을 하셔야 할 것 같은데 왜 가만히 계십니까?”라는 질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신실하게 동행하는 영혼의 실망입니다. 악에 치우쳐 살아가는 사람은 무감각해집니다. 때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임박한 심판의 진노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하나님과 신실하게 동행한 영혼이었기에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느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벌써 세상을 심판했어야 한다는 의로운 마음에서 비롯된 실망입니다. 또한 하박국은 용기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 “어느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언제까지 더 부르짖어야 합니까?”라고 부르짖을 수 있었습니다. 하박국의 실망은 자기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에서 비롯된 실망입니다.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것에 대한 실망이 아닙니다. 자신이 속한 나라와 민족, 시대와 역사에 대한 깊은 책임을 느끼는 실망입니다. 이스라엘은 택함을 받은 민족입니다. 특별한 이적과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형성된 민족입니다. 율법이 주어졌던 민족입니다. 고고학적인 증거로도 율법이 있었다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윤리적 지주를 부여받은 민족입니다. 그 율법을 내팽개치고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박국은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당시가 율법을 저버렸다면, 이 시대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내버리고 있습니다. 정의가 무참히 짓밟히고 있습니다. 기준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모든 기준이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도 하박국의 안타까움이 있어야 합니다. 하박국 처럼 공동체와 시대에 대한 안타까움을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박국의 실망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 된 실망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상황을 보면서 하나님  침묵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을 잘못 견딥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침묵하심으로도 일하십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그 아들의 부르짖음에도 침묵하셨습니다. 그 침묵은 무관심이 아닙니다. 거부가 아닙니다. 그 침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의 때에 응답하십니다. 때로 침묵하시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역사의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기 때문에 하박국이 하나님께 대한 실망을 지나고 하나님으로부터 대답을 듣는 과정에서 깨달은 진리들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섭리는 반드시 악에 대한 심판을 포함합니다.

죄악으로 관영한 세상에서 하나님이 아무것도 하시지 않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일하고 계십니다. 악에 대한 심판을 반드시 포함하십니다. “그러나 자기 힘이 신이라고 여기는 죄인들, 그들도 바람 처럼 사라져 없어질 것이다”(11절).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힘을 신으로 여 는 사람들을 반드시 바람처럼 사라지게 합니다. 역사의 교훈을 통해 우리는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역사 속에 자신의 힘을 신처럼 여긴 사람들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악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악을 반드시 떠날 것입니 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절대로 보호하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악을 심판하십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는 악에 대한 심판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믿는 의인은 반드시 악으로부터 떠나게 되고 있습니다. 악과 더불어 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악을 반드시 포함하기에 의인은 반드시 악을 떠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과정이 우리가 원하는 바와 정반대로 전개될 수 있습니다.

“보아라. 이제 바벨론 사람들을 내가 일으킬 것이다. 그들은 사납고 과격한 사람들이다. 남의 생활 터전을 빼앗으려고 온 땅을 돌아다닐 것이다”(6절). 하나님께서 악한 세상을 심판하신다면 의로운 지도자가 나타나 의로운 질서로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바벨론 같이 더 악한 이들이 나타난다면 “하나님, 어떻게 된 것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바와 정반대가 아닙니 까?”라고 실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 대한 심판의 도구로 더 악한 바벨론을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벨론이 얼마나 악하고 사나운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원하는 바와 정반대지만 하나님께서 더 크신 목적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사납고 굉장히 악한 민족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피지배 민족을 존속시키는 면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모두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통로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말도 안 되는 방향인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넓은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섭리는 온 세상을 바라보며 새로운 일을 행하십니다.

“다른 나라들을 보고 잘 살펴보아라. 놀라고 질겁할 것이다. 네가 살아 있는 동안에 내가 어떤 일을 행할 것인데 네게 말해 주어도 너는 믿지 못할 것이다”(5절). 하나님의 섭리는 유다 백성들의 수호신처럼 일하시는 게 아닙니다. 온 세상을 동시에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는 살고 있는 이곳, 이 시대, 우리 문제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시대, 모든 세상,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섭리하시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서 이 시대 우리 문제만 바라보면서 어떻게 온 세상을 통치하시고 모든 시대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인류가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을 대적할 때 하나님께서 흩으심으로 심판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한 사람을 택하셔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세속의 역사에는 이 두 사건이 전혀 상관없습니다. 세속의 역사가들이 이 두 가지 사건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 시대의 문제, 한 영역만 알 뿐입니다. 그런데 성경 역사의 신비는 그 줄거리를 통해서 모든 역사가 연결된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그래서 성경을 많이 읽으면 역사를 보는 눈이 열립니다. 세상의 모든 역사가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서 연결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연결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하나님 안에서는 연결되는 사건입니다.

 

베들레헴에 나오미라는 여인이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잘살아 보겠다고 모압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이 죽고 자부 룻과 함께 돌아 왔습니다. 그 룻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이 출생했습니다. 한 개인의 불행처럼 보이는 사건이 이스라엘 민족과 연결된다는 것을 어떻게 역사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개개인의 역사, 좋은 일만이 아니라 불행해 보이는 모든 역사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연결되어 있습니다. 미얀마에서 무력이 승리하는 것 같고, 올바르지 않은 통치자들이 세상을 정복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미얀마와 전혀 상관없는 것 같은 어떤 나라, 어떤 사람을 통해 모든 것이 연결되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북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상관없는 것 같은 어떤 사건을 통해서 북한을 변화시키는 역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성경 역사를 보면 반드시 그렇습니다. 전혀 상관없는 것 같은 나라와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를 새롭게 바꾸십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의인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를 어떻게든 섭리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악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가 기대하는 정반대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전혀 상관없는 것 같은 모든 역사 의 움직임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 입니다. 역사(history)를 히스 스토리(his story), ‘그분의 역사’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도 하박국 선지자 시대와 비슷하게 거짓과 불의, 싸움과 갈등, 공의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무너지고, 공동체가 깨어지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품고 우리는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그리고 언제까지 부르짖어야 합니까? 왜 이 불의를 그냥 두십니까?”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모두 이해할 수 없는 섭리로 일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믿으십시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