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귀 기울입니다.
달리면서도 말씀을 읽을 수 있도록 마음에 새기고, 기다립니다.”
하박국서는 믿음의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질문과 그 질문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대답으로 구성된 예언서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께 질문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질문에 대답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이 없으면 질문이 없습니다. 질문이 없으니 기대하는 바도 없고, 기대하는 바가 없으니 실망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늘 질문합니다. 하나님을 더 알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이 세상에서의 부르심을 붙잡고 나갈 때 우리는 하나님께 늘 질문하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질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기대하게 됩니다. 때로 믿음의 사람은 실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움직이시는 지를 알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면 왜 이러한 일들이 진행되는지 의문을 가지고 때로 실망합니다. 하박국이 그런 실망 속에서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유다 백성들의 불의와 폭력, 부정한 모습에 하나님께서 왜 개입하지 않고 가만히 계십니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질문에 바로 응답하셨습니다. “악에 대하여 심판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심판은 바벨론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응답에 절반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심판하신다는 대답은 당연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응답은 하나님께서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민족이 바벨론이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더 부정하고, 더 악하고, 더 폭력적인 잔인한 민족이었습니다. 하박국이 유다 백성이어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유다 백성들보다 훨씬 더 악하고 잔인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민족입니다. 하박국이 던진 질문 하박국은 의롭고 선한 지도자가 나와서 개혁을 이루고, 악에 대한 정당한 징벌을 가하고, 우상을 근절하고, 다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세상으로 바꾸는 모습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선한 왕들이 일어나서 우상을 근절시키고, 하나님께로 돌이켰던 모습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두 가지 근거를 가지고 하나님께 심판 방법의 부당함을 질문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박 국이 아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악을 전혀 보지 못하는 정결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악한 이들이 그보다 의로운 백성들을 징벌하게 내버려 두실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오 여호와여, 주께서는 영원 전부터 계시 지 않습니까? 내 하나님, 거룩하신 주여, 우리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 오 여호와여, 주께서는 심판을 위해 그들을 세우셨습니다. 오 반석이시여, 주께서는 그들을 세워 벌하셨습니다. 주의 눈은 정결해서 죄악을 보시지 못하시고 죄악을 그냥 바라보시지 못하십니다. 그런데 악한 사람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들을 파괴시키고 있는데 왜 반역자들을 조용히 바라보고만 계십니까?”(1장 12~13절). 물론 하박국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고백 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 거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징벌하실지라도 완전히 우리를 버리시는 것은 아니라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벨론을 사용하시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더 악한 세상이 될 것 아닙니까?”, “과연 그것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입니 까?”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러한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를 뿐만 아니라 대적하고,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말살하고, 인권을 유린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나라와 세력들, 지도자가 세상에서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영향을 미칠 때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의로운 통치를 하신다면 왜 이런 세상이 되어 갑니까?”라고 질문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박국이 던진 질문입니다.
하박국의 질문과 품어 주시는 하나님
“주께서는 사람을 바다의 물고기처럼 만드셨고 다스리는 이가 없는 기어다니는 생물처럼 만드셨습니다. 그는 갈고리로 그들 모두를 낚아 올리고 그물로 끌어 올리며 어망 안에 모아 담고는 즐거워하고 기뻐합니다. 그리고 자기 그물에다 제물을 바치고 자기 어망에다 분향을 합니다. 잡아들인 것이 많고 그들의 음식이 풍성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 들이 그물을 비우고 계속 무자비하게 민족들을 죽여도 됩니까?”(1장 14~17절). 하박국은 유다 백성들을 연약한 물고기로 비유하고, 바벨론을 무자비한 어부로 비유했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그린 그림에는 군사들이 싸울 때 그물이 자주 등장한다고 합니다. 상대방 적군을 지배할 때 자신들은 어부로, 그들은 무기력한 물고기처럼, 그물을 던지기만 하면 끌려올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대상들을 정복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비유가 하박국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물만 던지면 잡히는 연약한 물고기처럼 백성들을 사로잡을 뿐만 아니라 바벨론의 악함은 그물을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고, 분향한다는 것입니다. 이 그물은 군사력을 의미합니다. 바벨론은 자신들의 군사력을 신으로 숭배했다는 것입니다. 그물에다 제사하고 분향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무기를 신처럼 여기고, 그것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악한 인생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민족들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을 멸하도록 사용하실 수 있느냐고 안타까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섭리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실망하고, 낙심하고, 당황하고 있는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해 주십니다. 두 번째 질문을 던지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하박국과 그 질문을 사랑의 마음으로 품어 주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대답 속에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과 경험,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영적 파수꾼처럼 기도하라!
첫째, ‘ 기도하라’ 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고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를 듣는 기도입니다. 내가 말하는 기도가 아니라 듣는 기도입니다. “내가 초소에 서서 망대에 자리를 잡고 주께서 내게 무엇을 말씀하실지, 내 호소에 주께서 뭐라고 응답하실지 지켜보겠습니다”(2 장 1절). 매우 당황스럽고 실망스러운 상황이었지만 하박국의 마음속에 있는 믿음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믿음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당황스러운 순간, 견디기 힘든 고난 속에서 수면 위로 드러납니다. 고난은 우리의 밑바닥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나타나게 합니다. 믿음이 순금 같은지, 아니면 도금된 믿음인지는 긁어보면 압니다. 찔러보면 압니다.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질그릇 같은 우리 인생에 보배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지, 아니면 질그릇일 뿐인지가 드러납니다. 감당하기 힘든 실망스러운 상황에서 하박국의 믿음이 분출됩니다. 그는 정말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낙심되고 어렵고 실망스러 울 때마다 더욱 기도했습니다. 실망스러운 상황이기 때문에 더욱 기도하는 영혼이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실지 귀기울여 듣는 기도였습니다. 영적 파수꾼이 되어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실지를 듣겠다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도 들어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것만 하나님 앞에 구해서 얻는 것이 기도라면 구하는 것을 얻는 것보다 받지 못하는 것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대로 들어주시면 아마 세상은 지옥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에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듣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이 기대하지 않은 대로 흘러갈 때, 때로는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않은 것처럼 흘러갈 때, 악한 사람들이 세상에 득세하는 것처럼 보일 때, 의로운 사람들이 억울하게 되고, 악한 사람들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 되어갈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귀기울여 듣는 영적 파수꾼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 소원을 아룁니다. 우리의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그런데 때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려고 하면 자리를 떠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시간을 드리지 않는 모습이 있습니다. 하박국은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실 때 듣고, 응답을 지켜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기록하라!
두 번째 교훈은 ‘ 록하라’ 입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셨다. ‘이 묵시를 기록하여라. 판에 똑똑히 새겨서 달리 는 사람도 읽을 수 있게 하여라’”(2장 2절).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주신 계시는 “말씀을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유대 선지자들은 자신의 집이나 성전에 있는 석판 위에 자신이 받은 예언을 기록함으로써 지나가는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달리는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똑똑히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달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위기 시대라는 것입니다. 편안하고 여유 있는 상황에서는 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심각한 재난의 상황, 불안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빨리 달리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달리는 사람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생과 사를 가를 수 있는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입니 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달리는 상황에서도 읽어야 합니다. 어떤 위기나 재난, 심각한 절망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대로 세상이 움직 여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 속에 우리의 살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만이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달리는 상황이라면, 위기와 재난의 상황이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달리는 상황에서 말씀을 읽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 판에 말씀이 기록되어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 판에 기록된 말씀은 달리면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달리면서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위기의 때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펴서 읽는다면 늦을 수 있습니다. 찾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 판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면 달리면서도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붙잡을 수 있습니다. 주야로 묵상하는 말씀, 내 마음에 둔 하나님의 말씀, 기록된 말씀, 우리의 마음 판에 성령께서 새겨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면 달려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읽고, 그 말씀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달려가는 사람에게도 알려 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시대처럼 위기의 시대가 있겠습니까? 임박한 진노와 하나님의 심판, 종말 직전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임박한 종말과 심판을 피하기를 원하지만 피할 수 없습니다. 달리는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 판에 새겨야 하고, 더 많은 사람이 읽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기다린다’
세 번째 교훈은 ‘기다리라’ 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묵시는 정해진 때가 돼야 이뤄지고 마지막 때를 말하고 있으며 반드시 이뤄진다. 비록 늦어진다 해도 너는 기다려라. 반드시 올 것이며 지체되지 않을 것이다”(2 장 3절). 믿음의 사람은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정해진 때에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이지만,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움직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는 역사에서 일어난 많은 일들이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연히 일어난 사건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역사의 사건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목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성경의 수많은 사건이 그때가 아니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입니다. 모든 때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때가 차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때가 차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아직도 역사 속에 이루어지지 않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이제 장차 임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사건이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사건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때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했는데 왜 더디 오시는가?”라고 질문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서에서 그 질문에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더딘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인내이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인내다.” 그러면서 이런 시간법을 알려줍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음을 잊지 말라.” 여러분, 인류 역사에 반드시 이 시간법을 대입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수십 년 정도 기다리고 “예수님을 기다렸는데 왜 안오십니까? 우리가 믿는 것이 과연 사실입니까? 믿을 수 있습니까?”라고 항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지금이 A.D. 2021년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2천 년이 지난 것이 아니라 이 시간법을 대입하면 이틀 조금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재림의 때를 ‘ 하루만 더 참자’ 라고 하시면 우리에게는 천년의 시간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천년이라는 긴 세월을 하루같이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참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정확한 때에 그 약속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다리고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겠다고 했습니다. 기도하며 귀 기울이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들에게 주는 그 말씀을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특징입니다. 믿지 않고는 하나님께 귀 기울일 수 없습니다. 믿지 않고는 그 말씀을 마음에 기록할 수 없습니다. 믿지 않고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2장 4절 말씀을 보면 의인의 삶과 악인의 운명을 대조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의롭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보아라.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의롭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 것이다”(2장 4절). 의인의 믿음과 악인의 교만을 대조했습니다. 왜 의인의 믿음과 악인의 불신을 대조하지 않고 교만이라고 했을까요? 불신의 뿌리는 교만이요, 그 정체가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은 누구입니까? 스스로 행실로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 속에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이 로마서 1장 17절에서 바울에 의해 인용됩니다. ‘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 이라는 말씀이 로마서 전체 주제입니다. 하박국 전체 주제와 로마서 전체 주제가 하나로 연결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1절에서도 반복되고, 히브리서 10장에서도 반복됩니다. 계속 반복되는 이유는 가장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주어진 배경은 하박국 시대입니다. 임박한 심판 직전에 살길을 주신 것입니다. 임박한 진노와 심판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반응하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십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처해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 이 심판을 돌이킬 수 없습니다. 심판은 정해져 있습니다. 심판은 임박해 있습니다. 그 심판 아래에서 살길은 믿음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악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인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죄인이라고 인정하면 의롭다 여길 것이요, 자신을 의롭다 하면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죄를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을 의롭다 여기십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귀 기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달리면서도 읽을 수 있도록 마음에 새깁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날마다 바라보며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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