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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으로 비밀을 말함(고전14:2) 해석

새벽지기1 2019. 3. 23. 23:33


영으로 비밀을 말함(고전14:2) 해석

 

고린도 교회의 영적 상태

 

당시 고린도 교회가 당면한 영적인 문제는 매우 다양했으며, 또 어떤 것들은 매우 심각하기까지 했다. 성령의 은사 문제(고전12-14장)를 제외하고 고린도전서 1장에서 15장까지에 나타난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을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이 편지를 쓰기 약 3년 전에 바울이 세운 고린도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에 당면해 있었다.

1. 지적 우월감(고전1:17-18,20-25; 2:1-5,10-16; 3:18-23).

2. 교회 내 분쟁과 파당 사이의 문제(고전3:3),

3. 심각한 도덕적 성적 부도덕(근친상간) 문제(고전5:1),

4. 신자 사이의 법정 소송 문제(고전6:1-8),

5. 결혼(혼인) 문제(고전7:1),

6.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먹는 문제(고전8:6)

7. 공중 예배에서 여성들의 부적절한 행동(교회 안에서의 여자의 위치)(고전11:2-16),

8. 주의 만찬을 오용함(고전11:17-21),

9. 영적 은사들, 특히 방언의 은사에 대한 오용과 오해(고전14:1-5).

10. 잘못된 부활 신앙 문제(고전15장).

 

이와 같이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다루고 있는 문제들은 하나같이 다 심각한 것들뿐이다. 고린도교회는 모든 면에서 당시의 다른 교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의 영적 상태였음이 분명하다. 바울은 이런 영적 상태의 고린도 교회를, 육신에 속한 자로 규정하면서 그들의 신앙 수준이 어린아이 같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3:1-3).

 

영적으로 어린아이 같고, 육에 속한 고린도교회가 하나님께 방언으로 비밀을 말할 수 있을 만큼 높은 영적 수준이었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잘못된 자들의 주장대로 고린도 교회가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고전14:2)이 사실이라면,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영적 상태를 어린아이 같이 유치하며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고 평가한 것은 바울의 실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전체에서 포착되는 고린도 교회가 직면한 여러 가지 심각한 영적 문제들을 고려한다면,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책망이 그의 판단 착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4장 2절은 바울이 내린 방언의 정의가 아니라 오히려 어린아이 같은 고린도 교회의 부류 중, 영으로 기도한다고 하는 자들의 잘못된 거짓 방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은 육신에 속한 자들로서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만큼 영적으로 충분히 유치했다. 따라서 이들은 실제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거짓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지혜에는 어린아이 같았지만, 악한 일에는 장성한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고전14:20 참고).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는 말씀이 그냥 기록된 말씀이 아니다.

 

그러나 거짓방언 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근거로 자신들이 하는 방언기도는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기도라고 주장한다. 만약 바울도 이들처럼 방언기도를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기 위하여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썼다면, 방언하는 자야말로 놀라운 경지의 영적 고수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있다니 말이다. 그렇다면 정말 저들의 주장대로 고린도교회는 방언기도를 통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영적으로 고수였을까?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그것도 인간의 언어가 아닌 하늘의 언어로, 그것도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라 비밀을 창조주 하나님께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감히 상상하기조차 숨 막히는 최고의 영적 경지가 아닐 수 없다. 거짓방언 자들의 주장대로 방언기도가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방언기도야말로 영적으로 최고의 경지에 오르게 하는 놀라운 은사임이 틀림없다.

 

구약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누가 감히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 자가 있었는가?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엘리야,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 등 당대 최고의 영적 고수들도 하나님께 열심히 비밀을 들었으면 들었지, 감히 말하지는 못했다. 이는 신약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베드로, 바울, 그리고 예수님마저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하늘 언어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비밀을 말했던 고린도 교회의 방언 은사 자들이야말로 신구약 성경 전체를 망라해서 최고 경지의 영적 고수였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정말로 당시 고린도 교회의 방언 은사 자들이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있을 만큼 영적인 고수였을까? 정말 이들에게는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그러나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이들의 영적 상태와 바울이 평가한 이들의 영적 수준을 살펴보면, 이들이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했다는 말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도 거짓방언 자들은 방언의 유익에 대해 선전하는 데 열을 올린다. 예를 들면, 방언은 영적인 열정을 회복시켜주며, 하나님의 실제를 경험하게 해주며, 기쁨을 회복시켜 주고, 교만한 맘을 부수어버리고,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게 하며, 열정적인 전도자로 만들어주며, 열정적인 크리스천의 삶을 살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고린도 교회는 왜 그 모양 그 꼴이었을까? 지금 거짓방언 자들도 고린도교회처럼 '거짓말 중'이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근거로 고린도 교회의 영적 수준을 판단한다면, 고린도 교회의 영적 수준은 바울에게 책망 받아야 할 만큼 저급한 수준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 받아야 할 만큼 대단한 수준이라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바울은 왜 이들에게 어린아이 같이 유치하며,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고 책망했을까? 혹시 바울이 잘못 판단한 것은 아닐까?

 

바울은 이런 심각한 고린도 교회의 상태를 염려하며, 고린도전서 14장 20-25절에서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이 선자지의 예언을 듣지 않다가 심판당한 것처럼, 예언(하나님의 계시) 대신 거짓 방언에 집착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이것이 바울이 이들에게 "특별히 예언하려고 하라"(고전14:1),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고전14:5), "다 예언을 하면"(고전14:24), "예언하기를 사모하며"(고전14:39)라고 반복해서 예언을 강조하는 근본적인 이유다.

 

절대 그럴 리는 없지만, 설령 방언기도가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은사라고 할지라도, 저급한 영적 수준의 고린도교회가, 하늘의 언어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허황된 말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고린도교회는 육신에 속한 자들, 어린아이 같은 자들이므로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 거짓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 2절의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말은 바울이 내린 방언의 정의가 아니라 육신에 속한 자들이 자신의 거짓 방언을 숨기기 위해 만들어낸 어린아이 같은 유치한 거짓말임에 틀림이 없다. (이창모)

 

바울은 14절에서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니라 거짓 방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15절에서는 방언기도를 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바울은 수많은 외국인을 상대로 방언으로 말한 적은 많았지만(고전14:18). 여기서는 바울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14절에서처럼 가정법을 쓰지 않고 직설법을 쓰고 있다, 바울은 결코 방언으로 하나님께 기도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18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 '방언을 더 많이 말하는 것'을 감사했지, '방언으로 더 많이 기도한 것'을 감사하지는 않았다. 바울은 어디에서도 방언기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14절-19절(특히 19절)에 걸쳐서 방언기도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가 무슨 의미인지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인간의 구성 요소 중 '영'과 '마음'은 서로 구별은 되지만,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거나 작동하지는 않는다. 즉, 자신의 영이 자신의 마음이 알지 못하게 어떤 비밀을 말하거나 행동할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은 인격, 감정 등과 함께 공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영과 마음이 독립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들지 않으셨다. 그래서 성경 어디에서도 영과 마음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행동한다는 표현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거짓 방언을 구사하던 자들은 자신의 방언을 마치 이성이 관여하지 못하는 것, 하나님을 향해 영이 독립적으로 기도하는 것처럼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인 관점이 아니라 당시 헬라 철학을 배경으로 하는 이교적인 관점이다. 당시 사람들은 헬라의 이방 신전에서 사제들이 하는 예언이나 신탁에 대해 일반적으로, "영은 이성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이므로 사람들에 의해 소유되지 않고, 영에 의해 드러난 신탁이나 예언은 신적인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고린도교회의 거짓 방언 자들이 자신의 방언을 이성이 관여하지 못하는 영의 활동으로 말하는 것은, 과거 우상에게 끌려 다녔던 경험(고전12:1)을 토대로 자신의 방언이 이방 신전의 사제들처럼 신적인 것임을 드러내려는 심산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 15a절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는 바울의 말을 보면, 고린도 교회의 예배에서 거짓 방언을 하는 자들이 자신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방언으로 회중 앞에서 기도와 축복뿐만 아니라 찬송도 한 것으로 보인다. 예배에서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신비한 소리로 신을 찬송하는 것은 당시 이방 신전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생소한 광경이었다. 신구약 성경 어디에도 이런 괴상한 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했다는 기록은 없다. 왜냐하면 이런 형태의 찬송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찬송이 아니기 때문이다. 찬송은 자신의 신앙고백을 노래에 실어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 행위이다. 그런데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이상한 찬송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높일 수 있겠는가?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가 영으로 하나님께 찬송하는 최고의 찬송인 '방언 찬송'이 사실이라면,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는 도대체 무슨 찬송이란 말인가? 하나님께 다이아몬드(방언)로 된 찬송을 하고 난 뒤에 또 깡통(보통 언어)으로 된 찬송도 하겠다는 말인가? 정말 방언 찬송이 최고의 찬송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는 바울이 방언 찬송을 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다음 26절을 보라! 바울은 "찬송 시"와 "방언"을 따로 언급하므로 이 둘을 구별하고 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14:26).

 

바울은 왜 "찬송 시"와 "방언"을 따로 언급하는 것일까? 그것은 "찬송 시"와 "방언"이 서로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찬송 시"에 방언으로 하는 "찬송 시"는 없으며, "방언"에 찬송으로 하는 "방언"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거짓 방언 자들은 이방 신전에서나 하는 이상한 소리의 노래를, 자신의 높은 영성을 과시하기 위하여 성령의 은사로 가장해 예배 안으로 들여온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영성을 과시하며 신령하게 방언으로 찬송하지만, 이들의 방언 찬송은 고린도 교회를 침몰시키려는 사탄의 노래일 뿐이다. 고린도전서 14장 15b절에서 바울이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 한 말은 방언 찬송도 하고 일반적인 찬송도 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은 인간의 영과 마음의 관계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내 영(루아흐, spirit)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시142:3).

 

만약 영의 일을 마음이 알 수 없다면, 이 시편 기자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영이 속에서 상하는 것을 마음(이성)이 알 수 없는데도 마치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 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계22:6).

 

하나님이 "선지자들의 영"만의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은 선지자들의 마음과 육체의 하나님은 아니시란 말인가? 여기서 "선지자들의 영"은 선지자들의 전인격을 의미하는 것이지, 육체나 마음이 배제된 '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요한이 여기서 '영'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본문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영'(성령)이 주시는 계시와 관련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영과 마음이 연합된 것으로 보는 것은 한글 성경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한글 성경에서 "심령"으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프뉴마티'(pneu,mati, 영)이다. 그런데 '프뉴마티'를 단순히 '영'으로 번역하지 않고 '심령'(心靈: 마음과 영)으로 번역한 것은 영과 마음이 별개의 것이기는 하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번역일 것이다. 이런 번역 경향은 한글 성경 곳곳에서 발견된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프뉴마티, pneu,mati)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눅1:80).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프뉴마티, pneu,mati)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롬1:9).

 

이 밖에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고후2:13; 엡4:23; 빌4:23; 골2:5; 딤후4:22; 몬1:25 등). 또 성경에서 '영'과 '마음'을 병기한 곳은, 고린도전서 14장 14-15절 외에 시편 51편 10절에서도 볼 수 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마음"과 "영"은 구별되는 것이지만, 본문에서 시인은 그것을 구별하려고 "마음"과 "영"을 번갈아 쓴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은 같은 의미인데 시적으로 다르게 표현했을 뿐이다. 시인의 이런 표현은 '내가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를 반복해서 강조하되 같은 단어를 중복해서 쓰지 않으려는 히브리적 언어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표현 기법이 가능한 것은 "마음"과 "영"은 구별되는 것이지만 따로 작동하지 않고 긴밀하게 연합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상적인 인간에게서 '영'과 '마음'은 결코 따로 작동하지 않는다. 즉 '영'이 말하는 것을 '마음'(이성)이 모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영'과 '마음'이 따로 작동하여 '영'이 하는 말을 '마음'이 알 수 없다면, 그것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멘 붕 상태에서나 가능한 현상일 것이다.

 

바울이 로마 교회에 편지한 다음 말씀들을 보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8:16).

 

성령이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이런 이성적인 인식 때문에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수 있게 된다(롬8:15). 그러므로 이 본문은 성령이 우리 '영'과 더불어 하시는 증언을 우리가 이성(마음)으로 알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영'이 하는 일을 '마음'(이성)이 알 수 없다면, 성령이 우리 영과 더불어 증언하시는 것을 우리가 이성적으로 알 수 없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신 줄 알 수 없으며,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수 없을 것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10:9).

 

여기서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과 '마음에' 믿는 것은, 중복을 피하려고 다른 표현을 썼을 뿐 같은 의미의 진술이다. 그러므로 만약 입으로 시인한 것을 마음이 알 수 없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입으로 말한 방언을 마음이 알 수 없다면, 이것 역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도 "성령의 역사로 그들 자신도 모르는 언어로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영 따로', '마음 따로'의 방언은 영지주의의 이단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방언은 영으로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마음이 알 수 없다는 주장은 명백한 영지주의의 이단 사상이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2:16).

 

이 본문은 바울이 70인경29)의 이사야 40장 13절을 인용한 것이다. 70인경은 히브리어 성경 이사야 40장 13절의 '여호와의 신'(루아흐, Spirit)을 헬라어 '눈 퀴리우'(nou/n kuri,ou, 주의 마음)로 번역했다. 바울은 본문에서 70인경의 번역 '눈 퀴리우'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으며, '눈 크리스투'(nou/n Cristou, 그리스도의 마음)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즉 70인경도, 바울도 '영'(pneu/ma,프뉴마)과 '마음'(nou/j,누스)을 구별하지 않고,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순절주의자들이 영과 마음을 전혀 다른 차원의 것으로 구별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영지주의의 이단 사상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고전7:34).

 

본문에서 바울이 굳이 '몸과 영'을 구별해 병기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몸과 영'이 독립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 아니라, 마치 그런 것처럼 가르치는 헬라 철학의 이원론에 물든 고린도 교회31)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헬라 철학의 이원론을 바탕으로 한 영지주의는 '몸과 영'이 독립적으로 작동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들은 육체로는 아무리 죄를 지어도 영에는 영향을 줄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죄를 범하며 방탕하게 사는 자가 어떻게 그 육체와 상관없이 영만 거룩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바울은 '영'만 거룩하면 된다는 이들에게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라는 표현으로 일침을 가한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영과 몸'의 일반적인 순서를 따르지 않고 '몸과 영'으로 순서를 바꾸어 쓴 것도 '몸'보다 '영'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영지주의 사상을 의식한 표현일 것이다.

 

우상 제물에 대한 고린도 교회의 관대한 태도도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우상 제물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운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집단은 그리스도교 내에서는 영지주의 집단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고린도 교회가 육체의 부활은 믿지 않고, 영적인 부활만을 믿은 사실(고전15장 참고)은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고린도 교회에는 육체와 자연스러운 육욕을 거부했던 영지주의적 금욕주의자들이 있었고(고전7장 참고), 육체는 아무런 소망 없이 부패할 것으로 여기고 육체를 탐닉했던 영지주의적 쾌락주의자들도 있었다(고전5장; 6:12-20 참고).

 

고린도교회의 거짓 방언 자들은 이런 영지주의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거짓 방언을 영적인 것으로 격상시켰다. 그러므로 방언은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며, "나의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짓은 정상적인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영지주의의 이단 사상에 물든 병든 교회의 모습이다.

 

바울이 말하는 고린도전서 14장 14절의 방언기도는 정상적인 상태에서 하는 기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순절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방언은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므로 기도의 내용을 자신의 마음이 알 수 없다고 계속 주장한다면, 자신들의 방언기도를 비정상적인 상태, 즉 넋을 놓은 상태(황홀경)에서 하는 헛소리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될 것이다. 1700년대 중반에 일어났던 미국의 셰이커(Shakers) 교도들도 비정상적인 몽롱한 상태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며 방언도 했다고 한다.

 

생각해 보라! 오순절주의자들의 말대로 방언기도가 하나님과 영으로 통하는 기도가 사실이라면, 일반적인 언어로 하는 기도나 침묵 기도는 무엇으로 하나님과 통하는 기도란 말인가? 영과는 상관없이 마음이나 육체로만 하나님과 통하는 기도란 말인가? 그러면 방언을 하지 못했던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과 '영으로' 통하는 기도는 전혀 하지 못했다는 말이 아닌가?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렇게 고난당하며 고생만 했던 것일까? 또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방언으로 기도하실 수 없어서 하나님께 '영으로' 기도하지 못하시고, 단지 마음과 육체로만 기도하셨단 말인가? 예수님은 하나님과 '영으로' 통하는 기도를 하지 못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셔서 하나님께 십자가의 잔을 치워달라고 기도하셨던 것일까?

 

구약의 족장들이나 선지자들은 영과 마음과 육체, 즉 전인격으로 하나님의 영과 통하는 기도를 했다. 그러므로 때로는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도 했으며, 즉각적으로 기도의 응답을 받기도 했다(창20:17; 삼상1:27; 7:9; 왕상9:3; 렘1:6-9 등).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두시고 영과 마음과 육체의 온 힘을 다 동원하셔서 전인격으로 하나님과 영이 통하는 기도를 하셨다.

 

글을 닫으며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자신들의 방언기도는 '영으로'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마음이 알지 못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들의 방언기도는 '영 따로', '마음 따로'로 하고 있는 거짓 방언임에 틀림이 없다.  

칼빈은 자신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성령의 역사로 그들 자신도 모르는 언어로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존 칼빈, 고린도전서, 존 칼빈 성경주석출판위원회 편역(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79), p.530.

 

("육에 속한 사람"으로 번역한 헬라어 '프쉬키코스'(yuciko.j)는 동물적이며 자연적인 생명을 소유한 자연인이라는 의미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를 통칭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육에 속한 사람"은 순전히 인간적인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지, 성령의 움직임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서 "육에 속한 사람"을 성령과 상관없는 자로 규정하고, 뒤이어 3장 1-3절에서 고린도교회를 "육신에 속한 자"(sa,rkinoj, 살키노스. 이 세상에 속해 있으므로 성령의 지배 아래 있지 않은 자)로 말함으로, 이들이 구원받지 못한 "육에 속한 사람"은 아니라 할지라도 "육에 속한 사람"처럼 성령의 일을 받지도 않고, 그것을 깨닫거나 분별하지도 못하는 "육신에 속한 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바울의 평가대로 고린도 교회의 영적 수준이 이 정도라면, 이들은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기는커녕, 성령이 예언의 은사를 통해 주시는 계시(비밀)조차도 듣기 어려운 상태라고 보아야 옳다.)